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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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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 감겨주실 분을 구합니다

등록 2025-11-06 22:49 수정 2025-11-12 20:36
요하네스 페르메이르의 ‘우유를 따르는 여인’. 위키미디어

요하네스 페르메이르의 ‘우유를 따르는 여인’. 위키미디어


“머리를 감겨주실 분을 구합니다.”

가격: 건당 1000,000원

시간: 월~금 중 시간 협의

혹시 서울 강북 강변도로를 거쳐서 오십니까. 해 저물 무렵 한강의 끝을 향해 달리십시오. 사람들이 가장 많이 투신한다는 마포대교를 지나면, 오른쪽에 현석동 나들목으로 나가는 길이 보입니다. 그곳은 호젓합니다. 가을이면 서울에서 가장 아름다운 낙엽이 지는 곳이지요. 이따금 마음을 다잡고 싶은 사람들이 묵묵히 그곳을 달립니다. 나들목에 도착하면 소라 껍데기처럼 소용돌이치는 길이 보일 겁니다. 그 길을 따라 정면으로 100여m 걸어오십시오. 붉은 벽돌로 된 작은 집이 나타납니다. 오래전, 그곳은 소아과 건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아무도 그곳에서 치료받지 않습니다.

정면을 바라보십시오. 푸른색 문이 있습니다. 그 문 위에 “당신의 머리를 감겨드립니다”라고 쓰여 있습니다. 왼쪽을 바라보십시오. 만화방이 있습니다. 예정보다 일찍 도착하면 그곳에서 만화를 보며 기다리십시오. 그곳에는 이미 절판된 걸작 만화가 많이 있습니다. 오른쪽을 바라보십시오. ‘원조’라는 간판이 붙은 떡볶이집이 있습니다. 그곳은 원조가 아닙니다. 그 옆에 남색 창문이 달린 작은 집이 있습니다. 아무 간판이 없는 그곳, 그 집이 원조입니다. 가게 벽에는 아무개가 아무개를 사랑한다는 낙서가 어지럽게 한가득 적혀 있습니다. 기다리는 동안 시장하시면 그 남색 창문 집에서 떡볶이를 드십시오. 만화방과 떡볶이집 사이에 당신의 목적지가 있습니다. 찾기 어렵지 않습니다.

이 일을 위해 특별히 입어야만 하는 옷은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렇게나 하고 오시면 안 됩니다. 운동복이나 반바지 차림은 삼가십시오. 단정한 옷차림을 해주십시오. 반드시 정장을 입을 필요는 없습니다. 반드시 구두를 신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슬리퍼는 삼가십시오. 왜 이토록 복장을 신경 쓰냐고요? 살아보니, 복장이 태도를 만들더군요. 그리고 태도가 전부더군요. 이 일은 제게 아주 소중한 행사입니다. 남들이 교회에 가듯, 성당에 가듯, 절에 가듯, 저는 매주 이곳에 와서 머리를 감습니다. 마치 세례를 받는 것처럼. 당신이 가진 옷 가운데 가장 단정한 옷을 입고 와주시기를 청합니다.

이 일을 위해 특별한 식이요법은 필요 없습니다. 채식하거나 금주해야 할 필요 같은 것은 없습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어봅니다. 개고기를 드십니까. 이제는 보신탕을 드시는 분이 많이 줄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직도 드시는 분들이 있다고 하더군요. 만에 하나, 당신이 개고기를 즐기신다면 이 일에 적합한 분이 아닙니다. 개를 먹은 당신의 도움은 사양합니다. 꼭 보양식을 드시겠다면 개보다는 흑염소를 권합니다. 흑염소보다는 미나리를 권합니다.

이 일을 위해 특별히 준비할 물건은 없습니다. 모든 비품은 현장에 구비돼 있으니까요. 단 하나 준비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당신의 손입니다. 설마 누군가 당신의 손톱을 뽑지는 않았겠지요. 이제 그런 고문은 사라졌지 않습니까. 손톱이 너무 길어도 안 됩니다. 손톱이 길면 머리를 감길 때 두피에 필요 이상으로 강한 자극을 주게 됩니다. 손톱이 너무 짧아도 안 됩니다. 손톱이 짧으면 머리를 감길 때 두피에 너무 작은 자극을 주게 됩니다. 칼끝이 머리를 베지 않으면서 스친다는 느낌이 들게끔 손톱을 관리해주십시오.

손톱만큼 중요한 것이 손의 피부입니다. 손이 부드러울수록 좋습니다. 혹시 맨손으로 거친 일을 하십니까. 혹은 격렬한 운동을 하십니까. 그러면 아마 손바닥에 굳은살이 있을 것입니다. 굳은살은 좋지 않습니다. 굳지 않은 살을 원합니다. 당분간 장갑을 끼고 작업이나 운동을 해주십시오. 그리고 아침저녁으로 핸드크림을 듬뿍 발라주십시오. 태생적으로 부드러운 손보다는 당신의 노력으로 부드러워진 손이 더 좋습니다.

손이 부드러워야 한다고 해서 손에 힘이 없어야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머리를 감기는 힘 정도는 대개 다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대개 살아갈 힘 정도는 갖고 있지 않습니까. 힘의 유무보다 중요한 것은 힘을 통제하는 능력입니다. 통제하지 못하는 힘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습니다. 큰 힘을 가졌지만, 그 큰 힘을 잘 통제해 부드럽게 머리를 어루만져주세요. 머리에 상처를 낼 수도 있는 힘, 그러나 상처를 내지 않는 절제, 이것을 원합니다. 적장의 수급(首級)처럼 제 머리통을 사랑해주세요.

어느덧 약속 시간이 되었습니까. 약속된 시간이 되면 문자로 비밀번호를 알려드리겠습니다. 1분이 넘도록 문자가 오지 않으면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그럴 일은 없을 것입니다. 저는 바쁘다는 이유로 머리 감는 일을 소홀히 하지는 않습니다. 자, 비밀번호가 도착했나요. 그러면 이제 그 번호를 누릅니다. 기차역 대합실 사물함처럼 딸깍 하고 문이 열릴 것입니다. 저절로 열릴 것입니다. 망설임 없이 건물 안으로 들어오십시오.

들어온다는 일 자체가 당신에게 약간의 용기가 필요한 일일지 모릅니다. 낯선 건물에서 낯선 사람을 만나는 일이니까요. 해괴한 일들이 일어나곤 하는 세상이니까요. 용기가 필요하기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도대체 어떤 사람이 들어올지 저 역시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삶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이 정도의 위험 감수는 필요한 것 같습니다. 이 일에는 상호신뢰가 중요합니다. 저는 당신을 완전히 신뢰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당신도 저를 신뢰해주십시오.

들어오셨습니까. 갑자기 흥미진진한 일이 펼쳐지지는 않습니다. 이제 아시지 않습니까. 인생은 무료하다는 것을. 바쁘지만 무료하다는 것을. 건물 안으로 들어오시면, 문은 자기 무게를 못 이겨 자동으로 닫힐 것입니다. 세상 많은 것들이 자기 무게를 못 이겨 세계와 단절되지 않습니까. 혹시라도 문이 닫히지 않으면 살짝 문을 밀어주세요. 그러면 비밀을 지키는 입술처럼 어김없이 닫힐 것입니다. 문이 닫히면, 당신의 계좌로 50만원이 입금됩니다. 나머지 50만원은 당신이 건물 밖으로 다시 나간 직후에 입금됩니다.

건물 안으로 들어오면 문이 두 개 연이어 보일 것입니다. 왼쪽 문을 열고 들어가십시오. 오른쪽 문 뒤에는 제가 있습니다. 제게 와서 인사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저희는 아무 인사 없이 만나고 헤어질 것입니다. 들어와 보면 큰 공간이 두꺼운 커튼으로 나뉘어 있음을 알게 될 겁니다. 붉은 커튼이 방 한가운데를 완전히 가로지르고 있으므로 저희는 서로를 볼 수 없습니다. 그 커튼 한 가운데 놓인 의자에 가서 앉으십시오.

자리에 앉으면 바로크 음악이 흐르기 시작합니다. 생전에 사랑하는 딸을 잃었던 이가 작곡한 음악이지요. 제가 그토록 기다리던 머리감기가 시작된 것입니다! 당신 자리 앞에 사람 머리통만 한 구멍이 뚫려 있습니다. 그 구멍에서 제 머리통이 쑤욱 나올 겁니다. 거북이 머리처럼 나올 겁니다. 구멍에 머리를 넣는다는 것은 자신을 무방비 상태에 둔다는 말입니다. 아시겠습니까. 당신을 완전히 신뢰한단 말입니다. 생각이 많아서인지 제 머리통은 다른 사람들보다 약간 더 큽니다. 저는 생각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습니다. 눈은 뭔가 보지 않을 수 없고, 귀는 뭔가 듣지 않을 수 없고, 허파는 숨을 쉬지 않을 수 없듯이, 머리는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머리를 감겨주는 동안 제 생각의 파도가 잦아들 겁니다.

머리통이 나오고 나면, 제 눈 위로 준비된 수건을 얹어주세요. 어둠이 내려와 내 눈을 덮기까지 그 짧디짧은 시간에 저와 당신은 서로를 보게 됩니다. 그 순간 가능하면 살짝 미소지어 주세요. 안심해도 된다는 것처럼. 그 짧은 순간이 지나면 머리를 감기는 동안 당신도 나도 서로를 볼 수 없습니다. 당신이 제가 어떻게 생겼는지 관심이 없듯이, 저도 당신이 어떻게 생겼는지 관심이 없습니다.

머리에 물을 일정한 속도로 부어주십시오. 요하네스 페르메이르의 그림 ‘우유 따르는 여인’에서처럼 차분히 부어주십시오. 물을 붓는 속도와 양에서 당신의 절제력이 느껴지도록 해주십시오. 머리가 모두 젖어도 한동안 계속 부어주십시오. 온도가 중요합니다. 갑자기 차갑거나 뜨거운 물이 머리에 쏟아지는 것만큼 당황스러운 일은 없습니다. 머리에 이미 너무 차갑거나 뜨거운 물이 부어지는 순간, 머리는 긴장하게 되기 때문이지요. 자, 당신 옆에 큰 단지가 보일 것입니다. 당신이 별도의 조처를 하지 않아도 이미 적절한 온도로 세팅돼 있습니다. 그래도 물을 머리에 부으면서 물어주세요. “괜찮으신가요? 물이 너무 뜨겁거나 차갑지는 않은가요?” 그러면 저는 대답할 것입니다. “딱 맞아요. 더할 나위 없이 딱 맞아요.”

머리를 감는 동안 하는 상상이 중요합니다. 저는 다음과 같은 상상을 하며 누워 있을 겁니다. 당신도 저와 같은 상상을 해주세요. 이곳은 노아의 방주 같은 곳입니다. 폭풍우가 거세게 몰아칩니다. 비가 아주 많이 옵니다. 언제든 배는 부서져 폭풍우 속으로 사라질지 모릅니다. 그러나 당신은 아랑곳하지 않고 머리감기에 열중합니다. 머리를 잘 감기면 폭풍우가 사라져줄 것이라고 믿는 사람처럼.

다음에는 절간을 상상합니다. 저는 머리를 빡빡 깎은 동자승입니다. 어떤 사연인지 모르지만 이른 나이에 출가했습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대웅전 앞 큰 마당을 쓸고 있습니다. 마침 그곳을 지나던 당신이 제 머리를 보고 말합니다. 스님도 머리를 감으셔야지요. 아무리 짧게 머리를 깎아도 약간의 머리칼은 남아 있는 법이랍니다. 마치 가시지 않는 번뇌처럼. 제가 스님의 번뇌를 다 씻어드리지요.

그다음에는 사막을 상상합니다. 당신과 나는 오아시스에서 만납니다. 당신과 나는 아주 오랫동안 사막을 건너왔습니다. 이 사막에 끝이 있을까요. 당연히 목이 마릅니다. 그러나 물을 마시기 전에 머리부터 감습니다. 머리에 더 심각한 갈증이 있는 사람처럼 머리에 물을 붓습니다. 이 모든 상상은 당신 하기 나름입니다. 제 머리를 감기는 동안 당신이 정말 이런 상상을 하는지 저는 확인할 도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꼭 이렇게 상상해주십시오. 머리를 감기는 시간은 10분 정도입니다. 10분이 넘었으면, 계속 할지 말지는 당신에게 달렸습니다. 기분이 내키면 좀더 오래 감겨주셔도 됩니다. 설령 제가 조금 더 감겨달라고 해도, 당신은 거절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나직하게 “10분 넘었습니다”라고 말해주십시오. 저는 당신의 말을 잘 듣습니다. 공손한 아이처럼 말을 잘 듣습니다. 머리를 다 감기셨습니까. 그럼 이제 머리 말리는 일로 넘어가십시오. 반드시 제가 준비한 드라이기를 사용해주십시오. 이 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리면 드라이기로부터 사랑받는다는 느낌이 듭니다. 왼손으로 제 큰 머리를 살짝 들어 올리고 오른손으로 드라이기를 꼭 쥐어주세요. 이제 따뜻한 바람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머리를 말리는 동안 제게 짧게 아무 말이나 걸어주시기 바랍니다. 혼잣말처럼 해도 좋습니다. 중요한 것은 말의 내용보다 어투입니다. 가능한 한 다정하게 말해주십시오. 딱히 하고 싶은 말이 없을 때는 다음 예문 가운데 아무거나 말씀하시면 됩니다. “오늘은 정말 놀랍게도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날이었어요.” “과거나 미래가 아니라 현재를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빙하는 떠돌다가 결국 바다의 일부가 됩니다.” “달리는 기차 속에서 갑자기 삶에 실망하셨습니까.” 이 말에 제가 뭐라고 반응할지는 모르겠습니다. 그 순간 제 마음이 결정하겠지요. 제가 뭐라고 대답하든 딱히 답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머리를 다 말리셨나요? 이제 모든 일이 끝났습니다. 당신은 비품들을 그대로 두고 일어섭니다. 당신이 들어왔던 그 문으로 다시 나가시면 됩니다. 당신이 건물 밖으로 나가면 약속했던 나머지 50만원이 당신 계좌로 입금될 것입니다. 입금을 확인하셨습니까. 이제 당신은 당신의 일상을 사시면 됩니다. 혹시라도 오해를 살까봐 마지막으로 말씀드립니다. 이것은 이상한 알바가 아닙니다. 저는 당신에게 해를 끼치거나 성적 접촉을 할 의도가 없습니다. 아무런 부담도 갖지 말고 지원해주세요. 사람을 살릴 기회입니다. 우리는 구원받기 위해 타자가 필요하지 않습니까. 머리 감겨주실 분을 구합니다.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한 달에 한 번씩 상상의 여행을 떠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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