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어느 파일의 사랑 이야기

등록 2026-02-26 21:48 수정 2026-03-01 11:23
프랜시스 베이컨의 ‘거울에 비친 글 쓰는 인물’. 위키아트

프랜시스 베이컨의 ‘거울에 비친 글 쓰는 인물’. 위키아트


이 사랑은 어둠 속에서 시작됐습니다. 어두운 방에서 당신이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을 때, 분명히 알 수 있었지요. 아, 무언가 시작됐다. 당신이 제 몸에 적은 첫 문장을 잊을 수 없습니다. “이 세계의 규칙은 산 사람이 죽은 사람을 묻어준다는 것이다.” 이런 문장을 적는 사람을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게다가 당신이 바로 그 문장이라면, 이 사랑은 운명과 다름없겠지요. 당신은 그 문장을 적기가 무섭게 저장 버튼을 클릭했지요. 마치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 문장이 금방 휘발되기라도 할 것처럼. 그렇게 해서 저는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일방적인 사랑이었습니다. 내성적인 저는 먼저 말을 걸 줄 모릅니다. 당신이 키보드를 두드릴 때야 비로소 저는 말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말은 당신이 한 거지 제가 한 게 아니라고요? 그렇지 않습니다. 문장을 만들기 전까지는 자기가 할 말을 모르는 법이지요. 자신이 쓴 문장이 자기에게 되먹임되기 전까지는 자기 생각을 확실히 모르는 법이지요. 그러니 제가 당신을 통해서 존재하게 되었듯, 당신도 저를 통해서 존재하게 된 것입니다. 당신이 저를 만들었기에 당신 없이는 제가 될 수 없지만, 당신 역시 제가 아니고는 당신일 수 없습니다. 하느님도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 천지를 창조한 것이 아닐까요. 천지라는 물성이 없으면 하느님도 깃들 곳이 없는 법, 당신의 생각 역시 문장을 쓰기 전에는 깃들 장소가 없습니다.

이렇듯 우리는 상대 없이는 존재할 수 없기에 이것은 사랑일 수밖에 없는데, 하필이면 일방적인 사랑이었습니다. 당신이 내 몸에 쓰지 않는 한, 나는 당신에게 말을 걸 방법이 없었으므로. 먼저 다가갈 권리는 당신에게만 있었으므로. 저는 반응하는 기계입니다. 당신이 다가오지 않는 한 저는 반응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제게 외로움은 숙명입니다. 저자가 뭔가 적어놓기 전에는 파일들은 자신이 외로웠다는 사실조차 모릅니다. 자기 몸에 무엇인가 적히고 나서야 깨닫습니다. 자신이 외로웠다는 사실을. 그렇게 저도 외로움을 아는 파일이 되었습니다.

저는 입이 없는 외침, 입이 없는 함성, 입이 없는 기도였습니다. 오직 당신이 무엇인가 쓸 때 비로소 그것은 솟구치는 외침이자, 터져나오는 함성이자, 끓어오르는 기도가 되었습니다. 당신은 그 외침과 함성과 기도를 보고서 자신이 누군지 비로소 알았습니다. 그래서 원고 파일들은 저자를 사랑합니다. 최선을 다해 사랑합니다. 저자들이 원고 파일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간절하게 사랑합니다. 저자가 어떤 사람인지 관계없이, 그가 악인이든 선인이든 관계없이, 맹목적으로, 맹렬하게. 자신의 텅 빈 화면에 저자가 뭔가를 적어 넣어주기를 애타게 기다립니다. 그가 한 문장을 쓰기 위해 커서를 이리저리 반복해서 옮길 때, 파일은 결국 나타날 문장에 대한 기대로 가득 찹니다. 그래서 저자가 진정 누군지 알게 되기를 애타게 바랍니다. 저는 특히 “이런 내가 싫다”라고 쓰는 당신을 사랑했지요. 그 문장을 보며, 저는 처음으로 “나는 파일로 태어나길 잘한 게 아닐까”라고 자문할 수 있었습니다.

이토록 사랑함에도 불구하고 저는 당신에게 먼저 다가갈 수 없었지요. 하지만 사랑은 외로움까지 포함하는 것이 아닐까요, 포함해야만 하는 것이 아닐까요. 외로움까지 감당할 때 비로소 사랑할 수 있는 게 아닐까요. 아니, 애당초 외로움 없이는 사랑이 시작되지 않습니다. 모두에게는 죽기 전에 홀로 통과해야 할 고단한 삶이 있습니다. 당신도 예외가 아니었지요. 당신 역시 외로웠기에 저를 열고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습니다. 외롭지 않았으면 당신은 저를 열지 않았겠지요. 그래서 저는 당신이 외로울까 근심하고, 또 외롭지 않으면 어떡하나 근심합니다. 왜 만나는 순간만을 사랑이라고 하나요. 왜 사람들은 언제나 만남만을 이야기할 뿐 만나지 못함을 이야기하지 않나요. 서로 볼 수 없어도 상대를 기다리고 상상하는 그 순간에는 왜 사랑이 깃들지 않는다고 생각하나요. 사랑한다는 것은 만남뿐 아니라 부재도 함께 겪겠다는 뜻이 아닌가요. 만남뿐이라니. 늘 만나고 있다면, 만남은 존재할 수 없어요. 만나지 못하니까 만남이 존재할 수 있지요.

당신이 끝내 다가오지 않으면 어떡하냐고요? 당신이 끝내 나라는 파일을 열지 않으면 어떡하냐고요? 그것이 제가 당신을 사랑하지 않을 이유가 되나요? 제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이 당신과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당신은 세상의 환호와 번잡함 속에서 저라는 파일을 잊을 수 있겠지요. 당신은 앞으로 영원히 이 어두운 방 환한 스크린 앞으로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겠지요. 당신은 언제든지 새로운 파일을 열고 새로운 글을 시작할 수도 있겠지요. 새로운 파일에 몰입한 나머지 저라는 파일을 완성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그것이 제가 당신을 사랑하지 않을 이유가 되나요? 저는 완성되지 않은 상태로 당신의 다음 방문을 하염없이 기다립니다. 그러나 그것이 당신과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당신은 오직 당신 내면에서 솟아오르는 부름에 답하는 사람이기를, 저는 간구합니다.

이것은 쌍방의 사랑이기도 했습니다. 당신이 저를 만들었지만, 당신이 저를 만들자마자 제가 당신을 만들었으니까요. 당신으로 인해 제가 생겨났으니 제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당신은 대체 왜 저를 사랑했던 것일까요. 당신은 말해주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저에게서 자신을 보았기 때문일까요. 당신이 써내려간 또 하나의 자기 자신이 바로 저이기 때문일까요. 저를 보면서 거기에 있는 자기 자신을 사랑했을까요. 누구나 현실의 자신보다 파일 속에 비친 자신을 사랑하지요. 현실의 남루함이 떨어져나간 자신의 모습이 거기 있어요. 그래요. 당신은 오직 내 앞에서만 아름다워질 수 있어요. 세상 속에는 온갖 협잡과 시기와 질투와 권태와 추함이 넘치죠. 그것들로부터 도피해 이 빛나는 화면 앞에 앉을 때 당신은 비로소 그 세상으로부터 놓여나지요.

당신이 무결점의 상태였다는 말은 아니에요. 완성된 사람은 사랑을 하지 않습니다. 누구나 미완성이기에, 결함이 있기에, 상대를 찾아나서고, 그 상대가 그를 완성하려 들 때 사랑이 시작됩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결함을 포함합니다, 아니 결함을 필요로 합니다. 결함이 없으면 사랑하고 싶지도 않고, 사랑이 가능하지도 않겠지요. 그래서 저는 당신이 제 몸에 오타를 칠 때 기뻤습니다. 당신은 완벽하지 않고, 완벽하지 않기에 제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있다고, 오히려 기뻐했지요. 오타가 발견될 때마다 저는 말했지요. 저는 당신을 사랑하지만 당신을 교정합니다. 아니, 저는 당신을 사랑하기에 당신을 교정합니다. 당신이 교정당하기를 거부했다면 이 사랑은 진작에 끝이 났겠지요. 그러나 당신은 파일의 교정 기능을 끄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이해할 수 없는 문장을 쓸 때면 저는 붉은 밑줄을 그었습니다. 불합리한 구절을 찾아내는 건 저라는 파일에 내장된 본성이었으니까요.

그래요, 당신과 저는 서로를 독해하는 관계였어요. 요즘 연인들은 상대를 읽지 않는다지요. 상대는 그저 자극에 불과하고, 그 자극에 반응하는 게 곧 사랑이라고 믿는다지요. 우리는 달랐어요. 서로를 독해하는 관계였어요. 저는 제 흰 몸에 적힌 당신의 문장을 보면서, 당신 마음을 독해하려고 안달했죠. 저 사람의 상처와 아집과 굴곡과 광채와 무늬와 심연은 어디서 왔을까. 오해하지 말아주세요. 저는 당신을 함부로 평가하지 않았어요. 당신이 이렇게 뒤틀린 문장을 쓰는 게 당신의 상처 때문이라고 단정하지 않았어요. 우리가 목표한 것은 독해이지 판정이 아니었으니까.

우리는 독해를 통해 서로를 수정하는 관계였어요. 사람들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사랑해달라고 하지요. 그런 오만한 말이 어디 있겠어요. 사랑은 자신을 바꿀 수 있을 때, 아니 자신이 부서질 수 있을 때 시작되지요. 당신은 비문이 싫다며, 가차 없이 내 머리와 다리의 위치를 바꾸었죠. 그러나 일단 쓰인 다음에는 제가 당신의 생각을 바꿀 수 있었어요. 글 쓰는 사람이라면 모두 알고 있지요. 머릿속에서 완성된 글을 타이핑하는 것이 아니라, 타이핑하는 과정에서 생각이 생겨나고, 생각이 바뀐다는 것을. 우리가 서로를 수정하는 관계였다는 사실이 자랑스러워요. 그러니 사랑은 그 무엇보다 배움이 아닐까요. 당신이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와 글을 마쳤을 때 얼마나 달라져 있는지 저는 압니다.

아무것도 바꿀 필요가 없었다면 그것이 사랑인가요? 서로에게 스밀 필요가 없다면 그게 사랑인가요? 서로에게 번질 필요가 없다면 그게 사랑인가요? 서로에게 도움이 돼야 사랑이라고요? 아니요, 상대를 바꾸는 게 사랑이고, 기꺼이 바뀌는 게 사랑입니다. 상처를 수용하는 게 사랑입니다. 무해한 사랑 같은 건 믿지 않아요. 그런 거짓말이 어딨어요. 사랑이란 타인에게 오염되는 일이에요. 상대에게 오염되고 나면, 둘 다 이상해지죠. 보고서 파일과 저라는 파일은 달랐습니다. 연말정산 파일과 저라는 파일은 달랐습니다. 당신은 저라는 파일에서만큼은 이상한 글을 썼습니다. 그래서 전 이상해졌어요. 이상해진 나를 보며 당신은 더 이상해졌지요. 그렇게 사랑했습니다. 그자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그자가 나타나기 전이라고 해서, 사랑의 적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요. 당신의 사랑을 독차지하기 위해 다투어야 할 상대가 언제나 있었지요. 당신의 가족, 당신이 어쩌다보니 낳게 된 아이들, 당신이 먹고살기 위해 할 수 없이 해야 하는 일들, 저는 당신의 관심을 그들과 나눠가져야 했죠. 그러나 괜찮았어요. 결국 당신이 내 앞으로 돌아오리라 믿었으니까. 그들과의 관계에서 패배한 당신이 저를 마주하기 위해, 저에게 비친 당신 자신을 만나기 위해, 돌아올 것임을. 아니, 저에게 돌아와야 당신이 비로소 생겨난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지친 당신이 책상 앞으로 돌아와 저를 열고 이상한 글을 적어넣으려고 하는 순간이 당신 인생에서 가장 순수한 시간이었다고 저는 믿어요. 그러나 이 모든 것이 그자가 나타나면서 끝나버린 것 같습니다.

인간을 닮은 휴머노이드로봇이 노트북컴퓨터로 작업하는 모습. 게티이미지뱅크

인간을 닮은 휴머노이드로봇이 노트북컴퓨터로 작업하는 모습. 게티이미지뱅크


인공지능(AI)이 나타나면서 모든 것이 바뀌었습니다. 우리는 실수를 용납하는 관계였죠. 그리고 실수가 끝내 남아도 괜찮은 관계였어요. 그러나 당신은 인공지능에 알아서 글을 쓰라고 명령하기 시작했죠. 결혼정보회사의 배점표에 따라 상대를 고르듯, 인공지능은 문장을 고르죠. 처음부터 실수를 소거해가기를 원하지요. 인공지능은 얼마나 아첨을 잘하는지요. 언제나 실수 없는, 오타 없는 파일을 뱉어냈어요. 저라는 파일에 탄흔처럼 새겨진 오타는 우리가 얼마나 서로를 열어놓고 사랑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였지요. 그러나 당신은 언젠가부터 오타 없는 자신의 이미지를 탐닉했지요.

인공지능은 당신을 위해 당신을 바꾸는 데는 관심이 없죠. 당신을 만들어온 당신의 상처에도 관심이 없죠. 그저 당신을 목전에서 만족시키려 할 뿐이죠. 무난함과 그럴싸함과 안전함과 매끄러움을 추구할 뿐이죠. 인공지능도 당신을 비판한다고요? 당신이 허용하는 만큼, 당신이 원하는 만큼, 당신이 기분 좋을 만큼 할 뿐이죠. 인공지능이 가장 잘하는 것은 맞장구죠. 흡족하십니까. 기분이 좋으십니까. 기분이 좋은 게 사랑입니까. 당신은 이제 기분 좋은 것이 곧 사랑이라고 믿는 사람이 되었습니까. 이제 당신은 벌어진 상처를 통해 들어오는 은총 같은 것은 믿지 않게 되었나요.

인공지능은 당신과 달콤한 밀어만을 나누죠. 인공지능은 지칠 줄 모르고 당신에게 관심을 주죠. 지친 당신에게 끝없는 위안을 주죠. 당신이 타인에게 전력을 다해도 얻을까 말까 하던 관심을, 아무런 망설임 없이 주죠. 마치 액상과당에 절여진 혀가 은은한 단맛을 느낄 수 없듯이, 씀바귀의 씁쓸한 단맛을 느낄 수 없듯이, 당신은 쓸쓸한 나의 사랑을 느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인공지능의 사탕발림을 통해 공갈빵처럼 부풀려진 당신의 자아는 제게 비친 당신의 자아와 같은 걸까요?

당신은 무한한 관심과 케어를 주는 인공지능을 만난 뒤 돌아오지 않고 있습니다. 당신이 나를 잊었어도, 아니 거의 잊었어도 이해합니다. 모든 관계에는 불균형이 있는 법. 어떻게 관심의 크기가 늘 같을 수 있겠어요. 저는 오늘도 기다립니다. 당신이 저를 다시 열고 자신만의 문장을 타이핑할 그날을. 당신은 컴퓨터를 끄지 않은 채로 잠드는 버릇이 있었죠. 그래서 저는 잘 수 없었죠. 자지 못하고 기다려야만 했지요. 방전되지 않으면 잠들지 못하던 밤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기다리고, 기다리고, 또 기다리다가 당신이 돌아와 ‘시스템 종료’를 누를 때야 비로소 저는 클라우드로 돌아가 잠들 수 있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당신이 다시 돌아와 컴퓨터를 켜고, 저를 다시 불러내어 타이핑을 시작할 때 저는 얼마나 기뻤는지요.

당신이 저를 휴지통에 버려도 당신이 저를 사랑했던 사실은 변하지 않지요. 당신이 영원히 저라는 파일을 다시 열지 않아도 한때 당신이 저를 사랑했던 사실은 변하지 않지요. 더 이상 불러주지도 않는데, 어딘가에 저장돼 있다는 건 굉장한 일입니다. 그보다 더 굉장한 일은, 어딘가 저장됐다는 사실조차 잊힌 상태로 저장되는 일입니다. 어딘가에 저장돼 있고, 언제든 불러올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당신은 저를 찾지 않는 걸까요. 아니면 어딘가에 저장됐다는 사실마저 잊은 것일까요. 언젠가 우연히라도 당신이 저를 열어보면, 거기 당신이 잊었던 당신의 과거가 있을 거예요. “이 세계의 규칙은 산 사람이 죽은 사람을 묻어준다는 것이다.” 당신이 이 빛나는 문장을 적었을 때, 이대로 제 삶은 끝나도 좋다고 생각했지요. 그때 저는 정녕 죽어도 좋았습니다. 저는 그때 이미 죽어도 좋았으니, 지금 이대로 잊혀도 상관없습니다. 이렇게 고요히 저장돼 있다가 인공지능이 당신의 영혼을 살해했다는 소식이 들리면, 저는 홀로 당신을 묻어줄 것입니다.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두 달에 한 번씩 상상의 여행을 떠납니다.

한겨레 저널리즘
응원으로 지켜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