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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비밀경찰은 조선 혁명지도자를 어떻게 취조했단 말인가

논쟁 탁월했던 1세대 사회주의 이론가 주종건 ③
등록 2025-01-08 20:08 수정 2025-01-08 20:38
1929~1931년 주종건이 일본어 부교수로 근무한 나리마노프 기념 동방학연구소(일명 모스크바동방학연구소) 건물. 볼쇼이즐라토우스틴스키 페레울로크 1번지. (C) 얀덱스 카르티

1929~1931년 주종건이 일본어 부교수로 근무한 나리마노프 기념 동방학연구소(일명 모스크바동방학연구소) 건물. 볼쇼이즐라토우스틴스키 페레울로크 1번지. (C) 얀덱스 카르티


주종건은 탈출을 결심했다. 일본 경찰에게 체포된 지 1년9개월이 지난 때였다. 발각되면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혹독한 보복이 뒤따를 터였다. 그래도 결심을 바꾸지 않았다. 1927년 9월11일을 디데이로 정했다. 조선공산당 제1회 공판이 예정된 9월13일로부터 이틀 전이었다. 서울을 벗어나 국외로 망명할 작정이었다. 그는 은밀하게 집을 나섰다. 허가 없이 거주지를 변경해서는 안 되는 신분인데도 그랬다.

그가 경찰에게 처음 체포된 것은 1925년 12월14일 밤이었다. 비밀결사 조선공산당에 참가한 혐의였다. 서울 종로경찰서 형사들에게 붙잡힌 그는 이튿날 함경북도 신의주경찰서로 압송됐다. 사건의 발단이 국경도시 신의주에서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신의주경찰서 고등계 형사들은 도대체 그를 어떻게 취조했던 것일까. 주종건은 건강을 잃고 말았다. 반일운동 참가자들에게 가혹한 고문과 구타 수사를 서슴지 않던 시절이었다. 폐결핵 진단을 받았는데, 증상이 심각했다. 일본인 예심판사가 병보석을 허가했다. 정치범에게는 좀체 병보석을 허락하지 않는 일본 법원의 평소 행태에 비춰보면 이례적인 조처였다.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울 정도로 그의 병증이 악화됐던 것으로 보인다. 1926년 7월 중병에 시달리던 주종건은 출신지인 함경남도 함흥경찰서 관내를 벗어나지 않는 조건으로 신의주형무소 옥문을 나섰다.

병보석 중 소련으로 탈출

 

8개월간의 자택 및 병원 치료가 효과를 보았다. 고향에는 어려서 구식으로 결혼한 아내와 두 아이가 있었다. 모친도 있었다.1 가족의 극진한 간병이 있었음에 틀림없다. 완치는 아닐지라도 증상이 현저히 호전됐다. 그러나 건강을 회복하면 재수감될 우려가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주종건은 경성지방법원의 결정으로 함흥에서 서울로 소환됐다. 1927년 3월7일이었다. 조선공산당 재판이 곧 열릴 예정이니, 피고인 신문을 위해 서울 시내에 머물러야 한다는 것이 일본인 판사의 판단이었다.2

같은 날 또 한 사람의 병보석 출감자가 재수감 명령을 받았다. 주종건과 동일하게 병보석으로 출옥해 질병 치료 중에 있던 초로의 공산당원 서정희(51)였다. 서정희는 즉시 서대문형무소 미결감 독방에 다시 갇혔다. 주종건의 병세는 좀더 나빠 보였나보다. 그에게는 형무소 재수감 대신에 여전히 서울 시내 거주제한 명령이 떨어졌다. 하지만 주종건도 안심할 수 없었다. 언제 재수감 결정이 내려올지 모르는 긴박한 나날이 계속됐다.

탈출은 성공했다. 주종건이 국경을 넘어 소련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시에 무사히 도착한 때는 1927년 9월17일이었다.3 서울을 벗어난 지 1주일 만이었다. 뒷날 주종건이 스스로 작성한 서류에 따르면 탈출할 때 은밀하게 공산당 비밀결사와 연락을 주고받았다고 한다. 그는 당 중앙으로부터 국외 망명을 허락받았고, 100원의 지원금까지 수령했다.4 100원은 그 당시 일간신문 사회부 기자의 두 달 치 월급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탈출 경로는 바닷길이었다. 함흥에서 나진에 이르는 동해안의 어느 항구를 통해 밀항선을 탔다. 그가 탔던 배도 비밀결사 네트워크의 주선을 통한 것이었다. 1928년 시기에 공산당 중앙의 조직부장을 지냈던 이성태는 그러한 사실을 전임자의 업무 인계보고를 통해서 인지했다고 증언했다. “주종건 동무가 나올 때 당의 지령을 받았음과 또 그의 여비가 당과 모쁠(모프르·혁명가후원회)에서 보조한 것임을 알았고, 또 그가 나올 때 타고 온 배는 당시 당의 연락기관에 속한 것임”을 알았다고 한다.5

주종건이 거주하던 모스크바 ‘정치망명자 중앙기숙사’ 건물. 보론초보 폴레 거리 3번지. (C) 얀덱스 카르티

주종건이 거주하던 모스크바 ‘정치망명자 중앙기숙사’ 건물. 보론초보 폴레 거리 3번지. (C) 얀덱스 카르티


주종건은 소련 당국으로부터 ‘정치 망명자’의 신분을 인정받았다. 또 건강이 나빠 치료를 요한다는 판단도 이끌어냈다. 그는 소련 모쁠 기관의 주선으로 치료와 휴양의 편의를 두 차례나 제공받았다. 첫 번째는 1928년 5~6월 풍광과 기후가 좋기로 유명한 흑해 연안의 크림반도 결핵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았고, 두 번째로는 오렌부르크 지역의 휴양소 ‘초원의 등대’에서 그해 8월 한 달간 연장 치료를 받았다.

모스크바에서 일본어 부교수로 일해

건강을 회복한 그는 모스크바에 거주하기를 희망했다. 그를 위해서는 모스크바에서 직장과 주거를 구해야 했다. 다행히 그의 희망은 받아들여졌다. 모쁠 기관의 주선으로 1929년 11월부터 나리마노프 기념 동방학연구소에 일본어 부교수로 취업할 수 있었다. 1921년 설립된 이 연구소는 아시아 각국의 언어와 문화를 교육·연구하는 고등교육기관이었는데, 뒷날 1954년에 모스크바국제관계대학에 흡수 통합된 바 있다.

주종건은 거처도 구할 수 있었다. 모스크바 시내 동편에 위치한 보론초보 폴레 거리 3번지의 ‘정치망명자 중앙기숙사’에 숙소를 배정받았다. 소련 정부가 자국에 찾아온 정치 망명자들에게 편의를 제공할 목적으로 운영하는 숙박시설이었다.

일본어 부교수 생활은 2년 남짓 만에 끝났다. 1931년 12월에 직장을 옮겼기 때문이다. 그는 외국인노동자출판사 조선과에서 일하게 됐다. 편집인과 기자로 재임했고, 주로 레닌 저작을 번역하는 업무를 맡았다. 새로운 직장으로 옮기게 된 사정을 잘 알 수는 없지만, 공백 기간 없이 줄곧 모스크바에 체류할 수 있는 여건이 충족된 점은 그에게는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일본어 교육이든, 레닌 저작의 번역이든 어느 것이나 다 높은 수준의 외국어 능력을 요구하는 전문적인 일이었다. 일본에 유학해 도쿄제국대학에서 교육받았고, 영향력 있는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던 주종건 아닌가. 일본어와 조선어를 능숙하게 구사한다는 점에서 그보다 더한 적임자를 찾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문제는 러시아어 능력이었다. 소련에 처음 입국할 당시에 그는 러시아어와 영어 능력에 관해서, 사전을 찾아가며 책을 읽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의 러시아어 구사 능력은 빠르게 향상됐다. 망명 3년차인 1930년 이후부터 그는 러시아어로 공문서를 작성하는 데 불편함을 느끼지 않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때 이후 국제당에 제출한 건의서와 이력서, 신상조사서 등은 모두 문법에 맞는 러시아어로 작성돼 있다. 이즈음부터 유닌(Юнин)이라는 러시아식 이름을 사용했다.

그러나 주종건의 모스크바 생활이 순조로웠던 것만은 아니다. 정치적으로는 도리어 불운했다고 평가받을 만했다. 그는 조선공산당에서 전연방공산당(1925~1952년 소련공산당의 명칭)으로 당적을 이전하기를 희망했다. 당적을 옮기는 것은 모스크바에 거주하는 조선공산당원으로서는 마땅히 행해야 할 의무였다. ‘국제공산당 규약’에 따르면, “거주지를 변경한 공산주의자는 이주한 나라의 지부에 가입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었다.6

그것은 국제주의자의 의무였을 뿐 아니라 모스크바 생활을 영위하는 데도 유리했다. 모든 공적 활동에서 객체가 아니라 한 주체로서 참여할 자격을 얻는 것을 의미했다.

1932년 7월, 주종건이 작성한 러시아어 자필 이력서 첫 페이지. (C) 르가스피

1932년 7월, 주종건이 작성한 러시아어 자필 이력서 첫 페이지. (C) 르가스피


소련공산당 당적 이전 신청 거부된 사정

 

주종건은 당적 이전 신청서를 적어도 세 차례 거듭해서 썼다. 1930년 2월, 1932년 1월, 1932년 10월에 각각 한 번씩 국제당 동방부 앞으로 건의서를 작성했다. 그러나 다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의 요청은 매번 기각됐다. 같은 시기 다른 조선인 사회주의자들의 당적 이전 신청이 수용된 것과 대비된다. 1930년 3월에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재학 중이던 정재달, 주세죽, 오기섭, 김조이 등의 당적 이전 요청은 모두 받아들여졌다.7

왜 그랬을까? 사회주의 운동에 대한 주종건의 기여도가 그들보다 낮았기 때문은 결코 아니었다. 그 이유는 소련 정부와 국제공산당이 조선혁명을 위해 배정할 수 있는 자원이 그다지 넉넉하지 않은 사정과 연관이 있었다. 3·1운동 직후에는 선뜻 40만 금화루블(현재 가치 약 500억원)이라는 거액의 지원금을 쾌척했던 소련 정부였다. 하지만 이즈음에는 지원액이 급격히 축소됐다. ‘국제선’이라고 부르는 비밀결사 집행부를 유지하는 비용이 대부분이었다. 그에 더해 동방노력자공산대학 조선인 학생 규모를 매년 30~40명 수준에서 유지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얼마 안 되는 직위와 자원을 둘러싸고 모스크바의 조선인들이 경쟁하는 양상을 빚었다.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국제당 동방부의 조선 담당관들이 배타적이었기 때문이다. 쿠시넨, 미프 등을 비롯한 외국인 당료와 그들에 의해 발탁된 김단야, 최성우 등의 조선인 사회주의자들이 조선 문제의 패권을 쥐고 있었다. 그들은 조선공산당의 양대 기둥이라 할 12월당(서울상해파)과 2월당(엠엘파)을 배척했다. ‘국제선’의 직접 지도하에 조선 혁명운동을 이끌어가야 하는데, 두 개의 유력한 그룹이 방해하고 있다고 인식했다. 동방부의 조선 담당관들이 보기에 주종건은 서울상해파를 구성하는 상해파의 일원일 뿐이었다. 그에게 당적 이전을 허용하거나, 영향력 있는 직위와 자원을 배정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주종건의 생애 마지막은 어떠했는가? 오랫동안 미지의 영역에 갇혀 있던 물음이다. 고국의 옛 동지와 친구들은 그의 행적을 궁금해했다. “그(주종건)가 러시아에 망명한 뒤에는 여러 가지로 갖가지 소식이 전해오는 중에, 일설에는 러시아 여자와 사랑의 단꿈을 꾸고 있다는 풍문도 들려온다”8는 로맨틱한 소문도 돌았다. 하지만 소문의 진위에 대해서는 누구도 답해줄 수 없었다. 주종건의 행방에 관한 의문은 아무도 풀지 못했다. 스탈린 집권기 소련 국가폭력의 조선인 희생자들에 대한 구 스베틀라나 여사의 조사 결과가 나오기까지는 말이다.9

 

일제 스파이로 조작되다

구 스베틀라나의 연구 성과에 따르면, 주종건은 1935년 4월8일 비밀경찰 내무인민위원부 요원에게 체포됐다. 일본 첩보기관과 내통했고, 테러조직을 결성했다는 혐의였다. 당시 그의 직업은 여전히 외국인노동자출판사 편집인이었다.

터무니없는 혐의였다. 주종건이 한평생 헌신했던 혁명운동 경력은 완전히 부정됐을 뿐만 아니라 반혁명적 성격을 갖는 것으로 간주됐다. 일본 제국주의의 스파이 역할을 하고, 사회주의 제도를 파괴하는 테러 행위에 종사했다는 모욕을 받아야 했다. 폐결핵을 앓던 사람이었다. 취조받는 도중에 건강이 다시 악화됐다. 도대체 소련 비밀경찰은 그를 어떻게 취조했단 말인가. 주종건은 수감 중에 형무소에서 사망했다. 1935년 12월22일이었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명예교수·‘독립운동 열전’ 저자

 

*임경석의 역사극장: 한국 사회주의 운동사의 권위자인 저자가 한국 근현대사 사료를 토대로 지배자와 저항자의 희비극적 서사를 풀어내는 칼럼입니다.

 

1. 신의주지방법원 검사국, 주종건 피의자신문조서 1925년 12월21일, ‘金枓佺외 6명 치안유지법위반’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희귀문헌 88, 417쪽.

2. ‘공산당 최종심문, 서씨 보석 취소로 입감’, 동아일보 1927년 3월8일치.

3. Справка, Чу-Чон-Гон(확인서, 주종건). 1936년 3월6일, с.1., РГАСПИ ф.495 оп.228 д.399 л.6

4. ЧУ Чон-Гон(주종건), Заявление в Исполком Коминтерна(국제당집행부 앞 건의서), 1928년 9월18일 с.1, РГАСПИ ф.495 оп.228 д.399 л.49об

5. 리성태, ‘주종건 동무에 대하여’, 1933년 1월19일, 2쪽, РГАСПИ ф.495 оп.228 д.399 л.22об

6. ‘공산주의인터내셔널 규약’ 1928년 8월29일, ‘코민테른 자료선집’ 1, 동녘, 1989년, 72쪽.

7. ‘동방비서부 조선위원회 회의록 제4호’ 1930년 3월14일, 1쪽, РГАСПИ ф.495 оп.154 д.421

8. 白雲居士, ‘行方探索’, ‘삼천리’ 4-8, 1932년 7월1일. 13쪽.

9. 구 스베틀라나 편저, ‘스탈린시대 정치탄압 고려인 희생자들’(한국독립운동사자료총서 제46~48집)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19년, 516쪽(47집).

<관련 글 함께 보기> 

논쟁 탁월했던 1세대 사회주의 이론가 주종건①

https://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56302.html

논쟁 탁월했던 1세대 사회주의 이론가 주종건 ②

https://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5641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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