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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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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포터스 노래는 멈추지 않아”

수원삼성 응원단, K리그1 승격 기회 놓쳐도 좌절 대신 재정비…소비자 집단 아닌 ‘열두 번째 선수’의 활약
등록 2024-11-15 21:59 수정 2024-11-18 11:37
프로축구 수원삼성블루윙즈 서포터스 ‘프렌테 트리콜로’의 모습. 수원삼성블루윙즈 누리집.

프로축구 수원삼성블루윙즈 서포터스 ‘프렌테 트리콜로’의 모습. 수원삼성블루윙즈 누리집.


경기를 뒤집은 건 선수와 감독이 아니라 북소리였다.

2024년 11월3일, 프로축구 케이(K)리그2(2부 리그) 수원삼성블루윙즈 대 안산그리너스 전. 수원은 이 경기에서 이기지 못하면 5위까지 주어지는 플레이오프 티켓을 향한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지는 상황이었다. 2023년 K리그1(1부 리그) 최하위를 기록해 창단 후 처음으로 K리그2로 강등된 수원으로서는 승격이 절실했다. 일단 이겨놓고 다음주 다른 팀들의 경기 결과를 지켜봐야 했다. 그만큼 중요한 절체절명의 경기. 그러나 선제골은 후반 10분 안산의 발끝에서 나왔다.

2024년 11월10일 인천축구전용경기장에서 열린 프로축구 K리그1 2024 37라운드 대전하나시티즌과의 경기에서 2-1로 패하며 인천 유나이티드가 2부 리그로 강등이 확정되자 인천 유나이티드 팬들이 머리를 감싸 쥐고 있다. 연합뉴스

2024년 11월10일 인천축구전용경기장에서 열린 프로축구 K리그1 2024 37라운드 대전하나시티즌과의 경기에서 2-1로 패하며 인천 유나이티드가 2부 리그로 강등이 확정되자 인천 유나이티드 팬들이 머리를 감싸 쥐고 있다. 연합뉴스


평일이건, 주말이건 경기장으로

‘끝났구나.’ 직전까지 수원 응원가가 울려퍼지던 경기장에 고요한 탄식만 터져 나오는 그 찰나에, 좌절한 관중을 향해 들려온 것은 응원가의 재개를 알리는 북소리였다. 실점부터 북소리까지 3초쯤이나 걸렸을까. 실점 직전보다 훨씬 더 큰 소리로 응원가가 울려퍼졌다. 하필이면 가사도 이랬다. “우리들의 노래는 멈추지 않아.” 수원이 두 골을 연달아 넣고 꿀맛 같은 역전승을 거둔 것은 바로 그 북소리, 관중을 일으켜 세우고 선수들을 다독인 그 북소리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번 시즌 K리그가 끝을 향해 가고 있다. K리그2는 모두 종료됐고, K리그1은 마지막 라운드만 남았다. K리그1 마지막 라운드가 끝나면 이제 승격팀과 강등팀을 정하는 승강 플레이오프의 시간이 다가온다. 수원은 결국 6위로 시즌을 마무리했다. 승강 플레이오프에 수원의 자리는 없다. 응원하는 입장에서 슬프고 괴로운 일이지만, 좌절하기보다 희망을 품게 되는 것은 11월3일의 그 북소리 때문이다.

북을 친 건 누구였을까. 수원의 응원을 주도하는 서포터스, 프렌테 트리콜로다. 그중에서도 응원가 박자 연주와 구호 제창을 맡은 팀이다. 프렌테 트리콜로는 응원을 맡는 팀과 원정버스,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운영 등을 맡는 행정팀, 응원석을 꾸미고 퍼포먼스를 맡는 현장팀으로 구성돼 있다. 경기가 무너질 뻔한 순간에 분위기를 바꾸는 절묘한 응원으로 역전승을 이끌어낸 이들은 활동비를 따로 받지 않는다. 오히려 회비를 내면서 활동한다. 그럼에도 리그 시즌이면 평일이건 주말이건 낮이건 저녁이건 무조건 일정을 비우고 경기장에 달려와 궂은일 하기를 자처한다.

마침 안산과의 경기 직후 수원 지지자(특정한 축구팀을 응원하는 이들은 자신을 ‘팬’이라 부르기보다 지지자, 서포터라고 칭한다)가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 ‘백한량’에 현장팀의 하루를 관찰한 영상이 올라왔다. 영상 제목은 ‘프렌테 트리콜로를 이끄는 힘’.

현장팀은 경기 시작 5시간 전부터 모여 악기와 물품을 점검하고, 응원석에 팀의 상징색을 담은 천(반다나)을 설치하고, 수원 선수들에게 보일 메시지가 담긴 배너를 걸고, 상대 선수들에게 위압감을 선사할 대형 깃발의 자리를 잡아둔다. 준비작업이 끝나면 다시 경기장 밖으로 나가 거리 응원으로 분위기를 한껏 끌어올린다. 경기 중에는 흐름에 맞게 응원곡이나 구호를 재빠르게 골라내 제창을 유도하는 것도 이들의 역할이다.

강등 이후 ‘서포터스’ 숫자 더 늘어

댓글에 따르면 이들의 수는 K리그1에 있던 2023년보다 K리그2로 강등된 2024년 오히려 크게 늘었다고 한다. 강등 이유를 ‘응원이 부족해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올해 K리그1 승격에 실패한 직후 현장팀이 인스타그램에 올린 메시지도 한결같다. “너무 아쉽지만 아쉬움에만 젖어 있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올 한 해 나태하지는 않았는지, 혹은 현실에 안주하지는 않았는지 돌아보며 과거가 아닌 더 나은 내일을 향해 마음을 다잡고 다시 처음부터 준비할 것입니다.”

돈을 받고 일하긴커녕 오히려 예매전쟁과 티켓값을 치러야 경기장에 들어올 수 있는 사람들이 선수들만큼, 아니 어쩌면 선수들보다도 더욱 강력한 책임감으로 경기에 임한다는 것이 늘 흥미로웠다. 이번 시즌 수원의 승격 실패에서 보듯 그 책임감이 승리와 성과로 돌아온다는 보장이 거의 없음에도 말이다. 이들은 매 시즌 새로운 응원가를 발표하고, 기존 노래를 더 나은 형태로 발전시킨다. 경기가 없어도 주기적으로 모여 연주 실력을 가다듬고 더 멋진 응원 퍼포먼스를 보여주기 위해 수시로 고민하고 기획한다.

어떤 지지자들은 아예 팀을 새로 만들어낸다. 경기 안양시에는 2004년 3월까지 ‘안양엘지(LG)치타스’라는 축구팀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팀이 서울로 연고 이전을 감행하게 된다. 지금 FC서울이 안양LG가 서울로 이전해 이름을 바꾼 팀이다. 한순간에 지역 연고 팀을 잃어버린 안양LG 지지자들은 좌절했으되 멈춰 서지 않았다. 팀이 사라졌지만 서포터스 ‘레드’(RED)는 해체되지 않았다. 이들은 2004년 4월 ‘FC안양 창단 후원회’를 만들고 축구팀 창단을 위한 행보를 시작했다. 집회를 열고, 거리 행진을 하고, 기획서를 만들고, 안양 시민들의 서명을 받았다.

이들의 행보는 2012년 10월 마침내 결실을 봤다. 안양시의회에서 축구단 창단 조례안이 가결되면서 FC안양의 출범을 알렸다. 조례 제정 과정에서 안양시의회 내 당시 야당이었던 새누리당의 반대가 심해 한 차례 부결됐는데, 이때 새누리당 시의원들을 압박한 것도 물론 레드였다. 2024년 7월 개봉한 다큐멘터리 ‘수카바티: 극락축구단’은 이 과정을 잘 담아내고 있다. 오직 축구를 향한 열정 하나만으로 광야에서 바닥을 긁어온 이들은 2024년 K리그1 승격에 성공해 마침내 지난 20년의 노력을 보상받았다. 아니, 이렇게 말하면 안 된다. 이들은 2013년 2월 FC안양이 창단한 날 이미 모든 노력을 보상받은 것이다.

‘FC 안양’ 창단 이끌어낸 서포터스 ‘레드’
안양 LG가 서울로 연고 이전한 뒤 서포터스 ‘레드’가 해체되지 않고 ‘FC안양’ 창단을 이뤄내기까지 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수카바티: 극락축구단’의 한 장면.

안양 LG가 서울로 연고 이전한 뒤 서포터스 ‘레드’가 해체되지 않고 ‘FC안양’ 창단을 이뤄내기까지 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수카바티: 극락축구단’의 한 장면.


안양 LG가 서울로 연고 이전한 뒤 서포터스 ‘레드’가 해체되지 않고 ‘FC안양’ 창단을 이뤄내기까지 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수카바티: 극락축구단’의 한 장면.

안양 LG가 서울로 연고 이전한 뒤 서포터스 ‘레드’가 해체되지 않고 ‘FC안양’ 창단을 이뤄내기까지 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수카바티: 극락축구단’의 한 장면.


프로스포츠에서 팬의 위상은 티켓값을 치르고 팀과 관련한 다양한 상품을 구매하는 ‘규모 있는 소비자 집단’이라는 지점에 있다고 여겨진다. 많은 팬을 보유한 팀일수록 더 큰 시장을 확보하고 있다는 의미이며, 더 큰 시장을 확보한 팀에 더 많은 광고와 투자가 몰리는 것이 오늘날 프로스포츠에서 일어나는 일종의 양극화 현상이다. 하지만 프렌테 트리콜로와 레드처럼 팀의 경기력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물론이고 창단까지 관여할 정도로 헌신하는 지지자들의 존재를 떠올리면 팬의 위상이 단지 그런 시장성에 한정된다고 말하긴 어려울 듯하다. 이런 지점에서 흔히 서포터스를 일컫는 ‘열두 번째 선수’라는 말은 단지 비유가 아니다.

축구팀 지지자들의 이러한 열정과 향상심, 그리고 창의성은 어디서 비롯되는 걸까. 그것은 어쩌면 ‘자발성’이라는 단순한 요인일지도 모른다. 돈이 되지 않고 산업이 아니기 때문에 계산되거나 정산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오는 무한한 헌신. 회사에서는 헌신이 돈이나 승진과 같은 유형의 무언가로 보상되지 않는 한 지속되기 어렵지만, 애초에 그런 것을 기대할 필요가 없는 영역에서 헌신은 오히려 어떤 목표 지점 없이 무한히 지속될 수 있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아래 모든 것이 복속돼 있고 체제 속 개인은 거기서 벗어날 수 없다는 냉소주의와 패배주의가 지배하는 세상이다. 돈이 없으면 아무것도 이뤄낼 수 없고 무언가를 이뤄내기 위해서는 돈이 있어야 한다는 게 이 세상의 결코 변하지 않을 규칙인 것처럼 여겨진다. 그런 질서에 짓눌릴 때 나는 2024년 11월3일, 그날의 북소리를 떠올릴 것 같다. 프로스포츠라는 가장 자본주의적인 장의 완강한 규칙을 뛰어넘는, 자발적이고 대가 없는 헌신이 만들어낸 그 빛나는 순간을.

그 열정과 헌신이 체제에 도전하는 가능성의 공간을 연다. 그래서 소비자나 팬이 아니라 ‘지지자’인 것이다. 티켓을 손에 쥐고 등가교환을 요구하는 소비자가 아니라, 애정하는 대상에게 한없는 사랑만을 보내는 대상화된 팬이 아니라, 경기를 함께 만들어가는 지지자. 이런 가능성의 공간을 중계 화면으로는 볼 수 없다. 북소리는 중계화면으로는 들리지 않는다. 북을 치는 지지자 옆에 있을 때 가장 생생하게 들린다. 옆자리의 동료가 악쓰듯 구호를 외치는 표정, 앞자리 동료가 멈추지 않고 팔을 흔드는 모습, 나와 같은 타이밍에 울고 웃는 동료가 뒷자리에 있다는 경험. 이런 순간들을 중계화면으로는 알아차릴 수 없다. 맞다. 나는 지금 K리그를 영업하고 있는 거다.

‘그깟 공놀이’의 보석 같은 순간들

‘그깟 공놀이’라고 우습게 여길 수도 있겠지만, 그깟 공놀이에 ‘낭만’이 있다. 프로스포츠엔 그런 순간이 이따금 있다. 팀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졌을 때 충분히 다른 팀으로 떠날 실력이 있는 선수가 기어이 그 팀에 남기로 선택하고 또 그 팀을 위기에서 구해내는 순간. 도저히 적수가 없을 것 같던 최강팀을 뜬금없이 약팀이 잡아내 팬들을 울리는 순간. 엄청난 점수차로 밀리던 팀이 불가해한 정신력으로 마침내 역전에 성공하는 순간. ‘돈’으로 시작해 ‘돈’으로 끝나는 것처럼 보이는 프로스포츠에서 이런 보석 같은 순간들이 나타날 때 우리는 그것을 낭만이라고 부르고, 그때마다 스포츠를 향한 사랑이 더 깊어진다.

강남규 ‘토론의 즐거움’ 멤버·‘지금은 없는 시민’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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