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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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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의 공허와 모욕, 건너가세 건너가세

경쟁 굴레 벗고 베풀며 마음 보듬는 삶… 반야심경과 육바라밀의 지혜
등록 2024-09-27 20:03 수정 2024-10-03 17:58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보관된 산스크리트어 반야심경. 위키미디어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보관된 산스크리트어 반야심경. 위키미디어


“고단한 인생길, 출구는 없을까?”

인생길의 절반을 넘어선 사람은 안다. 돈과 지위, 권력을 놓고 벌이는 다툼에는 끝이 없음을. 돈은 언제나 충분하지 않다. 인류 최고 부자 가운데 한 명이던 록펠러조차도 얼마나 더 돈을 벌고 싶은가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지금보다 ‘조금 더 많이’ 필요합니다.”

높은 자리에 대한 갈망도 다르지 않다. 아무리 지위가 올라가도 끝없이 그 이상을 바라게 될 테다. 반면, 파산과 추락에 대한 공포 역시 삶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중년은 피로하다. 치열하게 다투며 여기까지 왔지만, 경쟁의 끝이 보이지 않는 탓이다. 점점 힘이 빠지며 불안이 짙어진다. 언제까지 싸움을 이어갈지 자신이 없다. 결국 뒷전으로 밀려날 운명도 두렵다.

이런 처지에 한숨 쉬는 중년이라면 ‘반야심경’을 소리 내어 읽어보라. 한문 260자로 쓰인 이 짧은 경전은 말 그대로 ‘진언’(眞言)이다. 모든 고뇌에서 벗어나게 하는 진실된 말씀이라는 의미다. 깊이 뜻을 되새기며 거듭 읽어보라. 답이 없던 인생에 다른 길을 열어줄 혜안이 열릴지도 모르겠다.

일체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법

“관자재보살이 반야바라밀을 진심으로 실천하실 때, 모든 것이 공(空)함을 밝게 깨닫고 일체의 고통에서 벗어나셨다.”(觀自在菩薩 行深般若波羅密多時 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

반야심경의 첫 구절이다. 무엇보다, ‘일체의 고통에서 벗어나셨다’라는 말이 가슴 먹먹하게 다가올 듯싶다. 돈과 권력, 지위는 결코 내 불안을 잠재우지 못한다. 이 셋이 없을 때 우리는 쪼들리고 움츠러든다. 반면, 권력을 손에 쥐고 부자가 된다 해서 삶이 행복해지지는 않는다. 물론 세상은 가진 것 많은 나를 살갑게 대해준다. 그러나 내가 움켜쥔 돈과 권력에 굽신거리는지, 진정 나를 좋아하는지 알 수 없다. 나에게서 부와 지위가 사라진다면, 사람들은 나를 짓밟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가슴은 늘 불안에 떤다.

걱정 근심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관자재보살이 아니더라도, 중년들은 이미 안다. 세상의 악다구니들이 헛되고 부질없음을. 떵떵거리다 힘없이 밀려나던 상사들, 기고만장하다 나락까지 떨어진 부자가 한둘이던가. 그럴 때마다 ‘뭣이 중한가?’라는 자조 섞인 물음을 던졌을 터다. 하지만 깨달음의 순간은 잠시뿐, 다시 치열한 경쟁 속으로 뛰어든다. 높이 올라가지 못한다면, 아니 살아남지 못한다면 나 또한 비참해지리라는 불안이 스멀거리는 탓이다.

그래서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의 실천이 중요하다. 관자재보살이 모든 괴로움을 떨쳐버린 이유는 ‘반야바라밀다’를 진심으로 실천했기 때문이다. 종교라는 맥락을 떠나서라도, 반야바라밀다를 일상에서 꾸준히 해나가는 일은 중요하다. 이는 중년의 삶을 밝고 건강하게 가꿔주는 지혜이기 때문이다. 왜 그럴까?

법륜 스님의 ‘반야심경 강의’. 법륜 스님은 보시 바라밀을 조건 없이 상대가 진정 잘됐으면 하는 마음으로 베풀라고 설명한다.

법륜 스님의 ‘반야심경 강의’. 법륜 스님은 보시 바라밀을 조건 없이 상대가 진정 잘됐으면 하는 마음으로 베풀라고 설명한다.


깨달음 위한 6가지 실천 ‘육바라밀’

반야바라밀에서 ‘반야’(般若)는 지혜라는 의미다. ‘바라밀’(波羅密)은 ‘저 언덕으로 건너간다’는 뜻이다. ‘반야심경’은 600권 넘는 ‘반야경’을 A4 한 장 분량으로 줄여놓은 경전이다. 따라서, 반야반라밀 안에는 깨달음을 건너가기 위한 여섯 가지 수행 방법이 압축돼 담겨 있다. 이를 육바라밀(六波羅密)이라고 한다. 각각을 살펴보자.

첫 번째는 보시(報施)바라밀이다. 보시란 ‘베푼다’라는 의미다. 세상에 원래 내 것이란 없다. 그러니 나누고 돕겠다는 자세로 살라. 법륜 스님은 보시바라밀의 의미를 예를 들어 설명해준다. 부지런히 농사지었다고 해서, 반드시 수확을 크게 거두리라는 보장은 없다. 날씨나 다른 조건이 따라주지 않는다면 노력이 소용없어진다. 그렇다고 농사짓지 말아야 할까? 그렇지 않다. 보시도 그렇다. 내가 준 만큼 무엇인가를 챙겨야 한다는 욕심 탓에, 마음이 지옥으로 바뀐다. 이는 보시일 뿐 보시바라밀이 아니다. 조건 없이 상대가 진정 잘됐으면 하는 마음으로 베풀라. 어느덧 자애롭고 인자한 노인의 기품이 내 영혼과 얼굴에 피어날 터다.

두 번째는 지계(持戒)바라밀이다. 지계는 ‘규율을 지킨다’라는 뜻이다. 진정 자유로운 사람은 욕망에 휘둘리지 않는다. 쾌락은 언제나 허탈하고 씁쓸한 뒤끝을 남기지 않던가. 삿된 욕망을 다스리며 튼실하게 삶을 꾸리는 이들을 보라. 건강과 행복이 그들의 일상에 자리잡지 않았던가. 그러니 함부로 생명을 대하지 말고, 남의 것을 턱없이 바라지 말며, 음란에 빠지지 말고 진실을 말하며 온갖 중독 물질을 멀리하라.

이기려 하지 않으면 굴욕도 없다

세 번째는 인욕(忍辱)바라밀이다. 이는 마음을 보듬으며 모욕과 상처를 꾸준히 이겨내는 일이다. 불가에서는 ‘상(相)을 짓지 말라’는 말을 많이 한다. 자기가 옳다고 고집부리지 말라는 뜻이다. 나이 지긋할수록 자기 생각을 앞세우며 아득바득하는 모습은 추해 보인다. 어른이 어린아이와 싸워 이겼다고 칭찬받겠는가. 차분히 물러서서 맞서려 하지 않는 태도가 되레 현명할 때도 많다. 이기려 하지 않는다면 굴욕을 느낄 일도 없다. 그러니 마음 내려놓고 살라.

그다음은 정진(精進)바라밀이다. 꾸준히 변함없이 노력하는 자세를 뜻한다. 바람직한 변화와 차이는 꾸준한 실천이 만든다. 때때로 실수할 때도 있고 마음이 내려앉기도 한다. 그래도 꿋꿋하게 생활을 다잡으며 올곧게 일상을 가꾸기 위해 노력하라.

이렇게 한결같이 나아가기 위해서는 선정(禪定)바라밀이 필요하다. 선정이란 고요하고 차분한 상태를 뜻한다. 감정은 끊임없이 불퉁거리며 마음을 흔들곤 한다. 정신을 잡아끄는 호기심거리도 좀 많던가. 달뜨고 흥분해 있는 채로 믿음직한 판단을 이끌기란 어렵다. 따라서 항상 주의 깊게 정신을 살펴야 한다. 화나서 정신줄을 놓고 있지는 않은지, 순간 수치심에 안 해도 되는 말을 내뱉지는 않는지 마음의 고삐를 언제나 단단히 쥐고 있으라는 의미다.

이렇게 여러 바라밀을 꾸준히 해나가는 일상은 반야바라밀을 이뤄나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반야바라밀은 베풀되 대가를 바라지 않고, 지키려는 마음이 없이도 저절로 규율을 따르게 되며, 참으려 하지 않는데도 감정을 누를 일이 없고, 매 순간 맑게 깨인 정신으로 살아가는 삶이다.

자기 방치는 아동 학대보다 잔인하다고 했다. 좌절과 슬픔, 불안과 혼란에 빠진 중년이여, 가라앉은 자신을 내버려두지 말라. 육바라밀에 따라 생활을 꾸준히 가꾸며, 고민과 괴로움을 내려놓아보라. 꾸준히 운동하면 몸매가 달라지며 건강해지듯, 육바라밀의 실천은 일상의 삶을 한결 견실하게 바꿔놓을 테다.

욕망에 휘둘리지 않겠다는 각오

하지만 육바라밀의 지혜가 마뜩잖은 분도 있을 듯싶다. 산속에서 도를 닦는 선사(禪師)들이야 고요하게 지내며 육바라밀을 이뤄갈지 모른다. 그러나 복잡하고 번다한 일상을 사는 우리가 마음 챙김에 신경 쓰기가 어디 쉬운가! 맞는 말이다. 그러나 깨달음을 얻기 위한 수행은 세상과 동떨어진 수도자들의 몫만은 아니다. 불가에서는 ‘발심’(發心)을 강조한다. 온갖 욕망에 휘둘리지 않고 혼란에서 벗어나 깨달음을 얻겠다고 마음먹어야 한다. 이런 결심의 순간이 수행의 시작이다.

근육을 키우려는 사람은 일부러 무거운 역기를 찾아 든다. 우리 일상의 온갖 괴로움은 마음의 근력을 키우는 역기와도 같다. 욕심나도 양보하고, 게으르고 싶은 욕망을 추스르며 마땅히 할 일을 하라. 호승심을 내려놓고 차분해지며, 꾸준히 차분하고 안온한 정신을 지키려 노력해보라. 이 모두가 온갖 번뇌에서 벗어나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과정이다. 생활의 고통이 점점 커지고 있는가? 이는 깨달음을 위해서는 되레 좋은 일이다. 더 큰 어려움에도 여전히 평정심을 잃지 않는다면, 그대는 더 크고 훌륭한 인격으로 거듭날 터이기 때문이다.

지혜의 세상으로 가는 주문

앞서 소개한 반야심경의 첫 구절을 다시 살펴보라. 관자재보살은 바라밀을 꾸준히 실천해서, 마침내 세상은 전부 공할 뿐임을 깨달았다.(조견오온개공) 이는 모든 것이 부질없다는 허무주의를 뜻하지 않는다. 무엇에도 집착할 이유가 없음을 알았다는 의미다. 직장에서 높은 지위에 있다 해도, 그 자리가 곧 나는 아니다. 인생의 상당 시간을 비루한 위치에서 보냈다 해서, 그 처지 역시 곧 내가 아니다. 결국 세상 모든 것은 공(空)일 뿐이다. 나는 무엇도 아니었으며, 그렇기에 앞으로 무엇이건 될 수 있다.

100살 시대, 인생은 더욱 길어지고 있다. 오십의 그대가 왕년을 그리워하며 매달릴 이유는 없다. 그 모두는 공일 따름이다. 나는 여전히 새로워질 수 있다. 어떤 자리건, 지위와 권력은 더 이상 상관없다. 육바라밀을 꾸준히 실천한다면, 당신은 세상의 시선과 욕망에 휘둘리지 않는 깨달음의 경지로 나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오십 줄인 그대여, 반야심경의 유명한 주문을 되뇌어보라.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娑婆訶)

“건너가세 건너가세, 저리로 건너가세. 저기로 다 함께 건너가세. 깨달음이여, 만세!”

 

욕심과 번뇌는 채우고 없애려 할수록 강해진다. 반백인 그대는 이 사실을 안다. 반야심경의 깊은 지혜를 되새기며 번뇌에 흔들리지 않도록 마음을 다잡아보시기 바란다.

 

안광복 서울 중동고 철학교사·철학박사

 

*반백철학: 교사이자 철학박사인 안광복이 오십 대에게 철학을 처방합니다. 4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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