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0월18일 영국 하원 본회의장. 스코틀랜드민족당(SNP) 소속의 데이비드 린든 의원이 집권 보수당에 질문을 던졌다. “장애를 가진 동료 의원들의 의회 시설 접근권을 위해서 어떤 조처가 이뤄질 것인가?”라고 물었다. 보수당을 대표해서 이 질문을 받은 폴 베리스퍼드 의원이 일어나 “미안하다. 내가 오스트레일리아 출신이기 때문에 린든 의원의 질문을 이해하지 못했다. 천천히 다시 말해달라”고 요청했다. 본회의장에 웃음이 새어나왔다.
그러자 린든 의원은 “오늘 내가 인기가 좋은 것 같다”며 같은 질문을 자세히 반복했다. 그러나 베리스퍼드 의원은 두 번째 질문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다시 일어나 “정말 미안하다. 아주 천천히 오스트레일리아 영어로 다시 말해줄 수 있느냐?”고 농담을 섞어 다시 요청했다. 그러자 의회 안에서 웃음이 터져나왔다. 린든 의원이 같은 질문을 세 번이나 해야 하는 상황이 되자 사회를 보던 린지 호일 하원 부의장이 나섰다. “내 생각엔 그 답변은 글로 하면 좋을 것 같다.”
베리스퍼드 의원이 린든 의원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것은 발음과 억양 때문이다. 린든 의원은 스코틀랜드 출신으로 글래스고 영어를 썼고, 베리스퍼드 의원은 오스트레일리아 출신으로 오스트레일리아 영어를 썼다. 심지어 이 상황을 정리한 호일 부의장은 잉글랜드 북서부 랭커셔 영어를 쓰고 있었다. 이렇듯 영국의 지역 영어는 서로 의사소통이 안 될 정도로 차이가 난다.
세계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언어인 영어는 수많은 지역어(방언)를 갖고 있다. 크게 보면 제1 언어로 쓰는 나라인 영국, 미국,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등의 영어가 있고, 그 나라 안에도 또 많은 지역 영어가 있다. 영국은 표준어가 없고 ‘리시브드 프러넌시에이션’(RP, 보편적 발음)이란 개념만 있다. 이것을 ‘킹스 잉글리시’ ‘비비시 잉글리시’ ‘포시 잉글리시’라고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법률적인 것이 아니라 관행적인 것이다. 그래서 의회에서도 자기 지역의 발음과 억양으로 자유롭게 말한다.
영국은 다양한 지역어를 갖고 있고, 각 지역 사람들은 그 지역어를 사용하는 데 별로 주저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수도인 런던 동부에도 지역어가 있는데, 이것을 ‘코크니 잉글리시’라고 한다. 런던의 노동자, 평민들이 쓰는 영어다. 영화 <킹스맨>에서 태런 에저턴이 쓴 영어가 코크니이고, 콜린 퍼스가 쓴 영어가 RP라고 할 수 있다.
영국은 이런 각 지역의 영어를 자랑하고 홍보한다. 예를 들어 버밍엄 지역어는 ‘브러미’, 비틀스가 나온 리버풀 지역어는 ‘스카우스’, 뉴캐슬 지역어는 ‘조디’라고 애칭을 붙였다. 또 중북부의 맨체스터나 랭커셔, 요크셔도 각자 독특한 지역어를 갖고 있다. 특히 스코틀랜드, 웨일스, 북아일랜드에선 원래 그 지역 원주민 언어인 켈트어와 켈트어 억양이 강한 영어 등 두 언어를 함께 갖고 있다.
켈트는 독일계 앵글로색슨 민족이 들어오기 전부터 브리튼섬에 살던 원주민이다. 영국의 4개 나라 가운데 잉글랜드를 제외한 스코틀랜드, 웨일스, 북아일랜드는 현재도 켈트 민족이 산다. 이들은 애초 켈트어를 썼으나, 잉글랜드의 영향으로 자신들의 언어를 많이 잃어버렸다. 현재 켈트어를 가장 많이 쓰는 지역은 웨일스로 인구의 20%가량이 웨일스어(켈트어)를 할 줄 안다. 스코틀랜드의 고유어인 스코틀랜드 게일어(켈트어)는 6만 명 정도만 사용할 수 있다. 웨일스어와 스코틀랜드 게일어는 사용자가 크게 줄었지만, 2005년 이들 나라의 공용어로 인정됐다. <비비시>(BBC)도 웨일스어와 스코틀랜드 게일어 방송을 한다. 북아일랜드에선 아일랜드 게일어(켈트어)에 대해 영국계 주민들의 반감이 컸다. 그러나 2006년부터는 정부 차원에서 켈트어 사용을 장려하고 있다. 물론 현재 웨일스와 스코틀랜드, 북아일랜드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언어는 지역 영어다.
이들 세 나라에선 켈트어의 영향으로 켈트어 억양이 강한 영어를 쓴다. 심지어 스코틀랜드엔 ‘스코틀랜드 영어’와 고대 노섬브리아의 영어에서 유래한 ‘스코트어’라는 두 가지 지역 영어가 있다. 북아일랜드 영어는 스코틀랜드 영어와 비슷하다. 아일랜드 게일어에서 스코틀랜드 게일어가 나왔기 때문이다. 잉글랜드에 통합된 지 가장 오래된 웨일스는 영국의 3개 켈트 나라 가운데 방언의 강도가 약한 편이다. 켄 로치 감독의 영화 <앤젤스 셰어>에선 스코틀랜드 영어,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에선 아일랜드 영어를 들을 수 있다.
영국의 영어는 전세계로 확산했는데, 가장 대표적인 지역은 물론 미국이다. 미국은 크게 서부, 남부, 북부, 중부, 뉴잉글랜드, 중부대서양 등 6개 방언으로 나뉜다. 여기에 뉴욕, 펜실베이니아 서부, 알래스카, 하와이 등 방언이 더해지기도 한다. 미국도 영국처럼 표준어가 없다. 영국 영어의 RP와 비슷한 개념으로 ‘제너럴 아메리칸’(일반 미국어)이란 개념이 있다. 이 발음에 가까운 지역은 동부의 뉴욕이나 워싱턴디시가 아니라, 중북부의 아이오와 지역과 네브래스카 동부와 일리노이 서부라고 한다.
김진해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국어학)는 “영어권에선 정부가 위에서부터 언어 정책을 하달하지 않고 전문가들이 시민의 언어를 살펴서 사전을 만들고 문법을 정한다. 표준성과 보편성을 정부가 정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에 맡긴다”고 말했다.
프랑스는 세계에서 가장 오랜 표준어 전통을 가진 나라다. 프랑스는 1635년 아르망 리슐리외 추기경이 아카데미 프랑세즈(프랑스 학술원)를 세우면서 파리 지역 언어를 바탕으로 프랑스어의 표준화에 나섰다. 이 기구는 문법을 통일하고 사전을 만들어 시민들에게 가르쳤다. 이렇게 통일된 프랑스어는 아메리카와 아프리카의 식민지로 퍼졌다. 19세기 말부터는 학교와 군대, 대중매체를 통해 파리의 프랑스어가 표준어로 확고히 자리잡았다.
그러나 프랑스어의 표준화 이후에도 시민들은 자신들의 지역어를 일상어로 사용했다. 현재 프랑스에는 크게 10가지 정도의 지역어가 남아 있다. 로망어로 오일어·오크어·프랑코프로방스어·코르시카어·카탈루냐어, 게르만어로는 플라망어·알자스어·로렌어, 켈트어로는 브르타뉴어, 그리고 바스크어가 있다. 프랑스 대부분 지역에선 오일어·오크어·프랑코프로방스어가 사용되며, 나머지 7개 지역어는 접경지 등 아주 제한된 지역에서만 사용된다. 현재 파리가 있는 프랑스 북부의 오일어는 지역어가 쇠퇴했고, 파리와 거리가 있는 남부의 오크어는 아직 널리 사용되고 있다.
프랑스에선 정부에 따라 지역어에 대한 태도가 크게 달라졌다. 1920년대 아나톨 드 몽지 교육부 장관은 “프랑스의 언어 단일화를 위해 브르타뉴어는 사라져야 한다”고 주장했고 공공장소에서 브르타뉴어 사용을 단속했다. 그러나 1951년엔 교사와 학생들의 자발적 의사에 따라 다양한 지역어를 학교에서 공부할 수 있게 됐다. 대통령 가운데 조르주 퐁피두는 1970년대에 “하나의 프랑스에는 하나의 언어와 문화만이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1980년대 사회당의 프랑수아 미테랑이 집권한 뒤엔 여러 언어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쪽으로 바뀌었다. 2000년 자크 랑 교육부 장관은 한 인터뷰에서 “공공 교육기관을 통해 각 지방 언어의 교육을 하겠다”고 약속했다.
김덕호 경북대 교수(국어학)는 “모든 나라가 현대화 과정에서 경제 활동을 원활히 하기 위해 표준어를 도입하고 지역어를 억눌렀다. 그러나 20세기 후반 이후로는 문화 다양성에 대한 요구가 커졌고 다시 지역어를 연구하고 교육하고 있다. 다시 지역어를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활용하는 시대가 됐다”고 말했다.
다언어로 인해 어려움을 겪는 나라도 있다. 대표적인 나라는 중국이다. 중국의 언어는 중국어 방언과 53개 소수민족 언어로 이뤄져 있다. 방언은 크게 7개로 나뉘지만, 실제로는 수백 개의 방언으로 이어진 ‘방언 연속체’다. 통상 7대 방언이라고 하면, 관화(북방과 남서부 대부분), 우어(장쑤성, 저장성, 푸젠성), 간어(장시성), 샹어(후난성), 민어(푸젠성), 하카어(광둥성 북부), 광둥어(광둥성) 등이다. 이 가운데 관화를 쓰는 중국인이 8억 명 이상으로 전체 인구의 60%에 이른다. 관화는 만주어의 영향을 받은 중국 북방 방언으로 보통화(표준어)의 바탕이 됐다.
소수민족 언어는 모두 53개가 있고, 그 가운데 21개 민족은 고유 글자도 갖고 있다. 집권 초기 중국 공산당은 ‘이중 언어(민족어+보통화) 교육’을 실시함으로써 보통화를 보급하는 동시에 소수민족의 언어와 문자, 문화를 보호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보통화의 보급이 더 강하게 이뤄지면서 소수민족 언어는 급속히 쇠퇴해왔다. 현재 만주어 등 소수민족 언어 가운데 절반 이상이 소멸 위기에 처했고, 사용자가 1만 명 미만인 언어도 22개에 이른다.
더욱이 중국 정부는 개혁·개방 이후 ‘중화 민족주의’를 더 강조하면서 교육 과정에서 소수민족 언어 교육을 제한하고 있다. 이런 조처는 2017년 위구르, 2018년 티베트, 2020년 내몽골과 조선족자치구로 확대됐다. 이런 보통화 확대와 소수민족 언어 제한은 내몽골과 같은 소수민족 지역뿐 아니라 홍콩 같은 방언 지역에도 적용됐다. 이에 대해 반발도 일어났다. 현재 중국 정부는 2035년까지 전국에서 보통화와 간체 한자 사용을 완성하는 정책을 추진 중이다.
중국과 비슷한 조건을 갖고 있으면서도 조금 다른 정책을 취하는 나라가 인도다. 인도는 2011년 총조사(센서스)에서 1369개의 언어가 확인됐고, 이 가운데 121개 언어가 1만 명 이상의 사용자를 가진 것으로 나타났다. 또 121개 언어 가운데 중요한 22개 언어는 헌법상 계획언어(또는 지정언어)로 정해졌다. 계획언어란 역사적·문화적·지역적·정치적으로 중요하고 사용자가 많은 언어를 말한다.
현재 인도의 연방정부는 힌디어와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한다. 인도는 1947년 독립 때 인구의 다수(30~40%)가 사용하는 북부의 힌디어만을 국가 언어나 연방 공용어로 정하려 했다. 그러나 다른 지역 언어 사용자들이 강하게 반발해 영어를 공동 공용어로 정해 사용하고 있다. 힌디어를 단독 공용어로 사용하는 것에 대해선 여전히 반감이 강하다. 특히 힌디어(인도아리아어권)와 언어 계통이 다른 남부의 드라비다어권의 반대가 강하다.
인도는 2014년 나렌드라 모디 총리가 취임한 뒤 강한 힌디어 공용어 정책을 추진 중이다. 모디 총리는 유엔 총회에서 힌디어로 연설하는가 하면, 연방정부의 업무에서 힌디어 사용을 더 강화했다. 2020년 국가 교육 정책에서는 ‘세 언어 원칙’을 제시했다. 정규 교육 과정에서 세 가지 언어를 가르쳐야 하고, 그 가운데 두 개 언어는 인도 지역어로 해야 한다는 정책이다. 다시 말해 해당 지역어, 영어와 함께 힌디어를 가르치라는 뜻이다.
그러나 인도에선 중국과 달리 다수 사용자 언어인 힌디어가 단기간에 단독 공용어가 되긴 어려울 전망이다. 이동원 한국외대 인도연구소 인문한국(HK)교수는 “인도는 민주주의 국가이고 연방제 국가다. 22개 주에서 어떤 언어를 사용할지를 연방정부가 일방적으로 결정하거나 강제할 수 없다. 현재 정부가 힌디어 확산을 추구하고 있으나 그것이 얼마나 받아들여질지는 알 수 없다”고 말했다.
김규원 선임기자 che@hani.co.kr
참고문헌:
민경만·김주아, ‘신중국 언어 정책에 대한 고찰’, 2022
선효숙, ‘프랑스어와 프랑스의 언어들, 그 특성과 사회적 운동 및 언어 -정책 동향’,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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