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20호 ‘위조지폐 사건의 진실 다툰 조선 변호사 김용암’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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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판사 사건 제25회 공판이 열린 1946년 10월24일, 김용암 변호사는 최후 변론에 나섰다. 사흘 전에 피고인들이 중형을 구형받은 뒤 처음 열리는 공판이었다. 구형량은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다. 담당 검사는 피고인 열 사람 가운데 넷에게는 무기징역형을, 셋에게는 15년형을, 남은 셋에게는 각각 10년형을 구형했다. 방청석의 피고인 가족들 속에서는 탄식과 함께 울음소리가 터져나왔다.
오전 10시를 조금 넘긴 때 시작된 김용암의 변론은 오래 계속됐다. 점심시간마저 훌쩍 건너뛴 오후 2시까지 피고인들의 무죄를 논하는 열변이 이어졌다. 이 최후 변론은 당시 언론 보도에 따르면 “열렬하고도 장쾌한 명변론”이었으며, “듣는 사람에게 큰 흥미와 감격을 주었다”는 평가를 받았다.1
김용암 변호사의 변론은 검사의 유죄 소견을 논박하는 내용으로 이뤄졌다. 그는 가장 먼저 자백의 임의성 문제를 제기했다. 고문과 유도심문에 의거해 얻어진 자백은 증거능력이 없다는 주장이었다. 그는 방대한 조서 기록 안에 앞뒤 모순된 사실이 기재됐음을 지적했다. 위조지폐 인쇄 횟수, 발행 금액, 참가 인원 등과 같은 사실관계를 둘러싸고 여러 피고인의 진술 내용이 다 다른데 특정 시점 이후 일치하는 경향을 보인다는 것이다. 각 피고인의 진술도 조서 작성 회차마다 달라졌음을 지적했다. 고문이 이뤄지지 않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피고인들도 호응했다. 경찰의 고문 사실을 법정에서 과감하게 폭로했다. 고문 장소는 서울 본정(중부)경찰서였고, 고문 행위는 그해 5월7일부터 11일까지 닷새 동안 집중적으로 이뤄졌다. 위조지폐 수사를 공산당에 연루시키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집단 폭행, 물고문, 비행기 태우기, 장시간 무릎 꿇고 의자 들기, 협박과 유도심문 등이 이뤄졌다. 피고인들은 혹독한 고문 양상을 구체적으로 증언했다. 김창선은 “긴 널판의자에 눕힌 후 포승으로 포박하고 장시간에 걸쳐 약 두 되가량 드는 주전자에 채운 물을 코와 입으로 부어” 넣는 고문을 겪었다. 또 “포승줄로 두 어깨를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묶어 약 30분 내지 한 시간 동안 매달아서 손끝의 혈액순환이 정지되어 시퍼렇게” 탈색되기도 했다. 피고인 신광범은 “나는 일제시대에도 고문을 당해본 경험이 있으나, 이렇게 계속적으로 혹독한 고문은 못 보았다”고 술회했고, 박상근은 “기가 막히고 억울하오. 경찰서에서 죽을 줄 알았는데 이와 같이 살아나온 것은 기적”이라고 말했다. 송언필은 “5월7일 검거당한 이래 10일 밤까지 만 4일 동안 밥 한술 안 먹고 계속적으로 고문당하였다”고 고발했다.2
김 변호사가 제기한 또 하나 역점 사항은 검찰 쪽 증거의 증명효력 문제였다. 검찰이 제시한 위조지폐 제작의 물증은 열 가지였다.(증거 제1, 2, 3, 35, 40, 41, 42, 43, 45, 47호) 김용암 변호사는 그 증명효력을 낱낱이 분석했다. 이 중 네 가지(제41, 42, 43, 47호)는 종이와 잉크류인데, 어느 인쇄소에서든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것으로 서울 시내에만도 20여 곳에서 구할 수 있었다. 그것은 정판사가 인쇄소임을 증명하는 데만 유용했을 뿐이다. 다음으로 크고 작은 징크판이 문제였다. 징크판이란 화폐를 찍어내는 아연 재질의 인쇄기 부품을 가리키는데, 이 징크판 12개로 이뤄진 다섯 가지(제1, 2, 3, 35, 40호) 증거는 별건의 범죄사실인 ‘뚝섬 위폐 사건’의 증거품이지, 정판사와는 무관했다. 마지막으로 증거 제45호(백원권 위조지폐 33장)는 정판사가 아닌 다른 곳에서 인쇄됐음을 입증하는 것으로, 당시 서울에서 유통되던 9개의 상이한 원판으로 찍은 40종류의 백원권 위조지폐 가운데 일부였다. 이 물증은 피고인들의 유죄를 확증하는 것이 아니라, 수사와 재판이 증거주의를 심각히 위배함을 보여줬다.3
김용암 변호사의 변론 중 세 번째 요점은, 공산당이 과연 위조지폐를 실제로 사용했는가 하는 문제였다. 검찰이 제시한 증거 중에는 미군 방첩대(CIC)가 조선공산당 본부를 압수수색할 때 적발한, 1945년 11월24일에서 1946년 5월14일까지의 재정 장부가 포함됐다. 여기에는 재정부장 이관술 명의로 차입된 28회의 수입 내역이 적혀 있었다. 검사는 이 28회의 입금 내역을 유죄의 증거라고 간주했다. 그러나 김용암은 이 주장도 효과적으로 논박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입금 합계액이 수백원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검찰이 주장하는 위폐 총액 1200만원과 너무 거리가 멀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28회 입금액은 대다수 기부금이었다. 기부자들은 자신의 실명이 알려지는 것을 꺼렸으므로, 그들의 명의는 당연히 기록되지 않았을 뿐이다.
이 외에 검찰의 주장을 논박하는 세부적인 논점이 더 있었다. 위조지폐 인쇄일로 지목된 6개 날짜에는 야간 인쇄가 불가능했다거나, 위조지폐 제작을 모의했다는 정판사 사장 박낙종의 알리바이를 입증할 수 있다는 등의 논점이 그것이다.
김용암은 검사의 유죄 소견이 전부 논파됐다고 자부했다. 이제 검사가 해야 할 일은 ‘공소’를 모두 취소하는 것이었다. 만약 취소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곧 검사가 “논리의 지배를 받는 게 아니고, 한 가지 목적의 지배를 받는 것”이라 볼 수밖에 없다고 단언했다.4
정판사 사건은 한반도에서 냉전이 시작됐음을 알리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승리를 이끌어낸 힘은 파시즘에 반대하는 국제적 연대였고, 8·15 해방은 그 소산이었다. 이 국제적 연대는 해방 이후에도 한동안 지속됐으나 존속 시기가 너무 짧았다. 불과 9개월에 지나지 않았다. 제1차 미·소 공동위원회가 결렬되고 정판사 사건이 일어난 1946년 5월은 냉전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김용암은 정판사 사건을 수임한 9인 변호인단 가운데 선두에 섰다. 그는 유능한 변호사였다. 그의 변론은 검찰의 유죄 소견 근거를 완전히 뒤엎었다. 순수하게 법리적 관점에서 본다면 정판사 사건은 무죄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변론의 대가는 컸다. 공산당의 위신을 추락시키려는 음모에 앞장서 맞선 까닭에 그는 합법적 생활을 포기해야 했다. 미군정 경찰의 체포망을 피해 1946년 12월부터 지하생활로 숨어들었다. 도피 생활은 근 1년간 계속됐다. 경찰의 추적은 갈수록 집요해졌다. 1947년 8월에는 ‘남로당 계열의 8·15 폭동 음모 사건’의 7인 지도부 가운데 한 사람으로 지목되기까지 했다.5
김용암은 결국 비합법적 도피 생활을 접고 38선 이북으로 올라갔다. 자필 이력서에는 그가 맡았던 직위와 책임에서 벗어난 때가 한결같이 ‘1947년 11월’이라고 적혀 있다. 보기를 들면 법학자 동맹 조직부장 재임 기간은 1946년 1월에서 1947년 11월까지이고, 남로당 중앙위원회 중앙위원, 상무위원, 정치위원 재임 기간은 1946년 12월부터 1947년 11월까지였다. 민주주의민족전선 지방선거강령실천대책위원회 지도책임을 맡은 기간도 1947년 2월부터 11월까지였다. 월북 시점이 바로 그때였음을 보여준다.
홀로 월북했던 것 같다. 가족으로는 아내 윤명숙과 12살, 5살 난 어린 딸들이 있었다. 이들 ‘서울시 중학동 41의 1번지’, 광화문 의정부터 뒤편에 있는 도심 속 주택가에 살고 있었다. 가족을 두고 단신으로 월북한 배경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소련 모스크바에 있는 중앙당학교 유학생으로 추천됐기 때문이다. 당시 그의 나이는 39살로, 이미 대학 교육을 마친 인텔리였다. 더욱이 이미 당 중앙의 상무위원이자 정치위원에 재임 중인 핵심 간부였다. 그럼에도 유학생에 선발된 것을 보면 그에게 거는 당의 중망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수 있다. 최상층 지도자로 성장할 가능성이 있는 당내 미래 인재로 지목됐던 것 같다.
평양에 도착한 김용암은 모스크바 유학을 위한 예비학교에 입교했다. 용강군에 있는 ‘평양학교’에서 6개월간 러시아어를 배웠고, 뒤이어 평원군의 ‘송석학원’으로 자리를 옮겨 러시아어 학습을 계속했다. 그즈음 그의 러시아어 구사 능력은 높지 않았던 것 같다. 자신의 외국어 능력을 묻는 설문에 답하기를 ‘일본어 강, 영어 중, 러시아어 약’이라고 적었다.
모스크바 유학은 1948년 8월부터 1950년 6월까지 계속됐다. 원래 4년 예정의 대학교 교육과정이었는데, 6·25전쟁이 일어나 중단된 것으로 판단된다. 중앙당학교의 성적표가 남아 있다. 김용암의 학업 성취는 눈부셨다. 2년의 수학 기간 중 도합 14개 과목을 수강했는데, 그중에서 시험 점수가 명시된 12개 과목에서 5점 만점을 받았다. 오늘날과 비교하면 ‘올 A+’를 맞은 셈이다. 교과목 제목을 훑어보자. 자본주의 정치경제학, 사회주의 정치경제학, 변증법적 유물론, 역사적 유물론, 소련사, 현대사, 소련 국제관계와 대외정책의 역사, 법과 소비에트 건설, 소련경제론, 소련공산당사, 당건설론, 러시아문학, 러시아어 등이었다. 혁명운동의 이론과 정책을 다각적으로 연구하며, 러시아어를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는 유능한 사회주의자를 양성하는 데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1951년 ‘사망’ 전언 메모를 마지막으로모스크바 중앙당학교의 교무행정을 맡은 소련공산당 조사관 니콜라예프는 김용암의 유학 생활을 호의적으로 평가했다. “유능한 수강생임을 보여줬고,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론을 터득하기 위해 열심히 공부했다”고 한다. 특히 소련공산당의 경험을 연구하는 데 큰 관심을 보였다고 적었다.6
모스크바 유학 이후 김용암의 행적에 대해서는 정보를 구할 수 없다. 그도 다른 유학생들과 마찬가지로 전쟁에 휩싸인 고국으로 되돌아왔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어떤 역할을 했는지, 어떻게 살았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다.
유학 시절 김용암의 개인 기록을 보관하는 러시아국립사회정치사문서보관소에 눈길을 끄는 메모가 있다. 중앙당학교 교무행정을 맡았던 니콜라예프의 필적이다.
1951년 8월25일 조선민주청년동맹 중앙위원장 김욱진 동무가 니콜라예프와 행한 개인적인 담화에서 전한 소식에 따르면, Ким Ен Ам(김용암) 동무는 1951년에 조선에서 사망했다고 한다.7
앞뒤 맥락에 관한 정보는 전혀 기재돼 있지 않다. 아마도 전쟁 중에 액운을 만났던 것 같다. 반일 학생운동의 지도자이고, 냉전에 맞서 정판사 사건의 진실을 향해 고투하던 법률가 김용암, 그 사람에 대해 좀더 깊이 알 기회가 또 오리라 기대한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참고 문헌
1. ‘변호사 변론 개시, 정판사위폐 건’, <조선일보> 1946년 10월25일
2. 임성욱, ‘미군정기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연구’, 한국외국어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67~169쪽, 2015년
3. 고지훈, ‘자료소개, 정판사사건 재심청구를 위한 석명서’, <역사문제연구> 20, 360~369쪽, 2008년 10월
4. ‘피고의 무죄를 주장’, <동아일보> 1946년 10월25일
5. ‘전율! 국제적 대폭동 계획’, <동아일보> 1947년 10월14일
6. Учебная характеристика на слушателя Корейсокой партийной школы Ким Ен Ам(중앙 당학교 학생 김용암 성적표), РГАСПИ ф.495 оп.228 д.808 л.5
7. Реферант Д.Николаев. Справка(확인서), 1951년 9월25일. РГАСПИ ф.495 оп.228 д.808 л.2
*임경석의 역사극장: 한국 사회주의 운동사의 권위자인 저자가 한국 근현대사 사료를 토대로 지배자와 저항자의 희비극적 서사를 풀어내는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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