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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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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악한 고문에도 2주간 입을 다문 전홍섭

현금 호송 정보 넘겨주고 고문 견뎌내며 동료들 도피 시간 마련…
감옥에서 모범수로 지내며 10여 년 치밀한 계획
등록 2022-04-29 01:27 수정 2022-04-29 10:54
전홍섭. 드물게 남아 있는 흐릿한 증명사진이다. 임경석 제공

전홍섭. 드물게 남아 있는 흐릿한 증명사진이다. 임경석 제공

현금 호송대가 습격당했다는 급보를 접하자마자 용정 주재 일본총영사관 경찰부는 즉각 수사에 착수했다. 1920년 1월4일 밤 10시에 11명의 경관대를 현장으로 급파했다.1 사건이 일어난 지 4시간이 지난 뒤였다.

현장 조사 결과, 도로에서 10m가량 벗어난 두 곳에 핏물이 낭자하게 고인 자국이 있음을 발견했다. 현장에서 즉사한 호송 경관 나가토모 순사부장과 하복부 관통상을 입고 이튿날 숨진 회령의 조선 상인 진길풍이 조난당한 자리였다. 그곳에서 90m 떨어진 밭 속에서 범행에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구식 엽총의 부러진 총신 34㎝짜리가 버려져 있었다. 핏자국이 있었다. 현금 행낭과 함께 수송 중이던 우편물 행낭 4개도 그곳에서 109m 지점 산등성이에 내팽개쳐진 것이 발견됐다. 어느 것이나 다 봉인된 채였다. 범인들은 현금 행낭 외에 관심이 없었음이 분명했다.

사라진 현금 행낭, 교란책에 휘말린 일본 경찰

그날 밤부터 현장 주변 농촌지대에 광범위한 수색 작업이 이뤄졌다. 경찰은 피습 지점인 용정 남쪽 6㎞ 지점, 승지촌을 중심으로 다중 동심원을 그리면서 수색 범위를 넓혔다. 수색은 이틀간 밤낮없이 계속됐다.

이튿날인 1월5일 저녁 8시, 용정에서 서남방 12㎞ 지점의 골짜기에 말 두 마리가 방치돼 있다는 제보가 접수됐다. 현금과 우편물 수송에 사용한 말이었다. 현장에는 말 외에 일본식 남성용 상의인 하오리 2벌, 현금 포장용 녹색 보자기 2장, 고액권 다발 묶음용 띠지 등이 흩어져 있었다. 경찰은 그곳에서 범인들이 현금을 분배해 어딘가로 도주한 것으로 이해했다. 범인의 종적을 찾기 위해 부근 마을을 샅샅이 수색했다. 범인들의 도주로는 오도구(五道溝)를 거쳐서 세린하(細麟河) 방면으로 이어졌으리라고 추정했다. 용정에서 서남쪽 방향이었다. 그곳에 수사력을 집중했다.

경찰은 초동수사를 그르쳤다. 범인들이 도주할 시간을 벌기 위해 세운 교란책에 휘말린 탓이었다. 범인 가운데 한 사람인 임국정은 일행과 떨어져서 단독으로 서남쪽 12㎞ 지점까지 말들을 몰고 갔다. 현장을 검증할 일본 경찰에게 혼선을 초래할 목적으로, 일부러 눈밭 위에 찍히는 말발굽 자국을 서남쪽 백두산 산중 방향으로 향하게 했다.

경찰이 수사 방향을 전환한 것은 1월9일부터였다. 사건이 터진 지 닷새가 지난 뒤였다. 범인들의 도주로는 용정 서남쪽이 아니라 북동쪽 방향임을 비로소 인지했다. 그동안 정반대되는 곳을 뒤졌던 것이다. 이때부터 수사는 급물살을 탔다. 습격자들의 연고가 있는 명동 장재촌, 와룡동, 소영자 등지에서 대대적인 일제 수색이 이뤄졌다. 와룡동의 경우를 보자. 일본영사관 경찰 37명과 협조 요청을 받은 중국 쪽 군경 53명이 1월10일 이른 아침, 전격적으로 와룡동을 포위했다. 목표는 습격자 최봉설의 집이었다. 하지만 범인들이 이미 그곳을 거쳐간 뒤였다. 일본 경찰은 100여 민가를 낱낱이 수색했다. 야만적인 폭행이 자행됐다. 혐의자의 행방을 추궁하는 거침없는 폭행과 윽박질이 마을 사람들에게 가해졌다.

경찰은 범인들의 도주 방향이 러시아 연해주라고 판단했다. 중국·러시아 국경으로 통하는 도로와 교통 요지에 겹겹이 비상선을 설치했다. 도로와 고갯길에서는 오가는 사람들을 검문하고 죄 없이 구타하느라고 통행이 두절될 정도였다.

밀고자는 황량한 밭에서 주검으로 발견

일본인들은 의문을 느꼈다. 범인들이 도대체 어떻게 현금 호송 정보를 정확히 알 수 있었을까? 조선은행 회령출장소에서 국경 너머 용정출장소까지 무장 기마 경찰의 호위하에 현금을 수송한다는 정보는 외부에서는 쉽게 알 수 없었다. 은행 내부의 협력자와 내통하지 않고서는 현금 호송대를 습격하는 일은 불가능했다.

조선은행 회령출장소 이시이 소장이 혐의자를 지목했다. 용정출장소 은행원 전홍섭(全洪燮)이었다. 나이는 31살, 수원고등농림학교를 졸업하고 조선은행에 입사해 1918년 6월부터 용정출장소에 근무하는 자였다. 회령경찰서는 1월4일 밤에 그를 체포했다. 습격 사건이 벌어진 바로 그날 밤이었다.

필자는 한때 오해했다. 일본 관헌 쪽의 범인 추적이 급진전을 보인 것은 전홍섭이 체포된 직후였다고 봤다. 그를 취조하는 과정에서 일본 경찰이 궁금하게 여기던 정보를 확보했다고 오인했다. 경찰이 조선은행권 15만원 탈취 사건 범인들의 이름과 신상을 인지하고, 1월9일부터 수사 방향을 전환한 것은 전홍섭의 체포 이후에 나타난 현상이라고 파악했다.2 하지만 이 판단은 잘못됐다.

일본 경찰의 내부 기록에 따르면, 전홍섭이 범행을 자백한 시점은 체포된 뒤 무려 2주나 지난 다음이었다. 그가 범행 내용을 진술하기 시작한 때는 1월20일이었다.3 전홍섭이 체포되자마자 곧바로 공모자들의 신상을 자백한 게 아니었음이 판명됐다. 얼마나 고초를 겪었을까. 그는 무려 2주 동안이나 취조 경찰의 고문을 견뎌냈다. 요컨대 동료들이 경찰의 추적을 피해 무사히 국경을 넘을 수 있었던 것은 거의 전적으로 전홍섭의 심문 투쟁 덕분이었다. 사건 발생일로부터 국경선을 넘는 데 필요한 4~5일간의 시간 말미를 보장해줬다.

그러면 1월9일 이후 경찰의 수사 방향이 전환된 계기는 무엇이었을까? 어떤 경로로 범인들의 이름과 거주지를 알게 됐을까. 이 의문을 풀 단서는 경찰의 정보문서에 암시돼 있다. “과거에 내탐했던 각종 사항을 종합하여 판단”한 결과 범인들의 성명을 인지하게 됐다고 한다.4 밀정의 거듭된 제보가 있었음을 시사한다. 총독부 기관지의 보도 기사에는 좀더 뚜렷이 표현돼 있다. 영사관에 ‘사환’으로 고용된 조선인 김아무개가 “공모자의 주소명 및 범죄의 행위를 하려고 사들인 흉기 등에 대하여 자세한 밀고”를 해왔다고 한다. 밀고한 ‘김아무개’가 누구인지 보여주는 자료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 사람의 신상은 알려진 게 없다. 하지만 당대인들에게는 그가 누구인지 잘 알려졌던 것 같다. 그는 사건 발발 2개월여 뒤 주검으로 발견됐다. 누군가에게 죽임을 당해 황량한 밭 가운데에 버려졌다고 한다. 일본 언론은 그의 죽음이 밀고에 대한 보복살인이라고 보도했다.5

서울 서대문형무소 사형장. 1921년 8월25일 ‘15만원 사건’에 관련된 3명(임국정, 윤준희, 한상호)이 이곳에서 처형당했다. 임경석 제공

서울 서대문형무소 사형장. 1921년 8월25일 ‘15만원 사건’에 관련된 3명(임국정, 윤준희, 한상호)이 이곳에서 처형당했다. 임경석 제공

급성폐렴으로 병보석 허가 얻어

재판이 시작됐다. 함경북도 청진지방법원에서 제1심이 이뤄졌고, 경성복심법원에서 제2심이, 경성고등법원 형사부에서 제3심 재판이 진행됐다. 1921년 4월4일, ‘15만원 사건’의 공동 피고인 4명에 대한 선고가 있었다. 현금 호송대 습격에 가담한 세 사람(임국정, 윤준희, 한상호)은 사형, 기밀을 누설한 혐의를 받는 전홍섭은 무기징역형을 받았다. 체포를 면한 또 한 사람의 습격 가담자 최봉설에게도 궐석 사형이 선고됐다.6

사형선고를 받은 피고인들의 처형은 예상보다 이르게 이뤄졌다. 1921년 8월25일 서울 서대문형무소 사형장에서 임국정, 윤준희, 한상호 세 사람에 대한 사형이 집행됐다. 그날 날씨는 흐렸고, 한낮 기온이 28도였다고 한다. 무더위는 한풀 꺾였지만, 여전히 덥고 음울한 날이었다. 사형장에 나가면서 피고인들이 남겼다는 말이 전해진다.

“일본 강도들이 자그마한 우리 육체는 죽이지마는 우리의 조선 독립할 정신과 강경한 마음은 점점 살아 있다. 조선은 해방될 것이오, 일본은 멸망하고야 말 것이다.”  7

동료들의 사형이 집행된 뒤 전홍섭은 큰 충격을 받았다. 삶의 의욕을 잃고 식음을 끊었다. 일주일 동안 계속 그랬다. 다행히 청진 감옥으로 이감된 뒤 그는 기력을 되찾았다. 그는 탈출을 꿈꾸기 시작했다. 탈출을 위해 먼저 모범수가 되기로 결심했다. 감옥 내 규율에 한 치도 어김없이 복종했으며, 온순하고 성실한 태도를 보였다. 3년 동안 줄곧 흐트러짐 없이 그 자세를 견지했다. 그 결과 간수들의 신임을 얻었고, 다소나마 운신의 폭을 넓혔다. 아내가 면회를 왔을 때 간수의 주의를 따돌린 채 비밀스러운 대화를 나눌 수 있었던 것은 그 덕분이었다.

전홍섭의 1단계 목표는 병보석으로 감옥 문을 나서는 것이었다. 그는 몸이 아프다고 자주 눕고, 식사량도 극한적으로 줄였다. 잇몸을 깨뜨리거나 구강 내에 피를 내어 토혈했노라고 주장했다. 겉모습이 폐병 환자나 다름없었다. 삐쩍 말라서 피골이 상접하고, 기력이 쇠잔해졌다. 어느 때 아내가 면회 오는 날에 맞춰 면회실에서 피를 토하고 졸도하는 모습을 보였다. 아내가 눈물로 호소했다. “우리는 늙은 어머니, 철모르는 딸 이렇게 세 식구가 저 남편을 하늘같이 믿고 사는데, 이제 옥 속에서 다 죽게 되었으니 우리도 함께 죽여달라”고 통곡했다. 결국 간수부장, 계호주임, 교무주임 등이 동정한 덕분에 급성폐렴으로 인한 병보석 허가를 받아낼 수 있었다.

안락한 미래를 희생한 의지의 사나이

2단계 목표는 밀항이었다. 국경을 넘어서 일본 통치 구역을 벗어나는 일이었다. 거처를 접경 항구도시로 옮기는 데 성공했다. 웅기의 북만양행에 근무하는 당질이 살림이 넉넉하므로 그에게 의지해 병을 치료한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다행히 거주 이전이 허용됐다. 밀항을 위해서는 은밀하게 배를 구하고, 병보석 죄수의 동태를 감시하는 경관들의 시선을 따돌리는 게 필요했다. 마침내 기회가 왔다. 그는 노모와 작별하고 아내와 딸을 데리고 한 어선을 빌려 탔다. 목적지는 블라디보스토크였다.8 정확한 시기는 특정하기 어려운데, 징역형을 받은 지 12년쯤 되는 때에 그러했다니, 아마도 1932년께의 일이었다고 추정된다.

전홍섭의 삶은 기억할 만한 값어치가 있다. 조선 독립의 대의를 위해 소시민으로서 안락한 미래를 희생하고서 현금 수송의 비밀을 넘겨준 용기가 그렇다. 또 동료들의 안전을 위해서 2주 동안이나 혹독한 고문을 견뎌낸 그의 고투가 그렇다. 그뿐인가. 10여 년간의 긴 인내 끝에 억압의 땅에서 탈출하는 데 성공한 그의 지혜와 노력이 더욱 그렇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참고 문헌
1. 재간도총영사대리, ‘長友巡査 조난급 조선은행권 약탈사건’, <外務省警察史, 間島の部 第2>, 290~291쪽, 1920년 1월8일.
2. 임경석, ‘일제의 돈을 갖고 튀어라’, <한겨레21> 제1177호, 2017년 9월4일.
3. ‘會憲機제64호, 공금약탈범인에 관한 건’, 1920년 1월31일.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38, 종교운동 편>, 국사편찬위원회, 322쪽, 2002년.
4. 재간도총영사대리, ‘長友巡査 조난급 조선은행권 탈취범인 수사의 건’, <外務省警察史, 間島の部 第2>, 298쪽, 1920년 1월17일.
5. ‘15만원 사건 밀고자를 참살’, <매일신보> 1920년 3월31일.
6. 고등법원 형사부, ‘大正10年刑上第42,43號 判決(全洪燮 등 4인)’, 1921년 4월4일. <독립군의 수기: 해외의 한국독립운동사료 XII, 러시아 편 (2)>, 국가보훈처, 358쪽, 1995년.
7. 崔溪立, ‘간도 15만원 사건에 대한 40주년을 맞으면서’, 1959년 1월. <독립군의 수기: 해외의 한국독립운동사료 XII, 러시아 편 (2)>, 국가보훈처, 322~323쪽, 1995년.
8. 林炳哲, ‘朝銀 15만원 탈취 사건’, <신천지> 1-3, 1946년 4월.

*임경석의 역사극장: 한국 사회주의 운동사의 권위자인 저자가 한국 근현대사 사료를 토대로 지배자와 저항자의 희비극적 서사를 풀어내는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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