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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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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경력 낚시꾼들 화려한 떡밥 기술

진화하는 K드라마의 공식…집중도와 보상감 주지만 상상할 자유는 떨어져
등록 2022-03-06 14:16 수정 2022-03-07 08:32
드라마 <스물다섯 스물하나> 팬카페는 <응답하라 1988>처럼 ‘미래의 남편’ 이야기로 달궈지고 있다.

드라마 <스물다섯 스물하나> 팬카페는 <응답하라 1988>처럼 ‘미래의 남편’ 이야기로 달궈지고 있다.

두 개의 리플레이 첫 번째. 드라마 <서른, 아홉>(JTBC 수·목 밤 10시30분)은 마흔을 목전에 둔 오랜 친구 차미조(손예진), 정찬영(전미도), 장주희(김지현)의 사랑과 일 이야기다. 1회에서 주인공 여성 3명의 소개와 타이틀롤 뒤 장례식장이 나온다. “우리 중에 누군가 30대의 끝자락에 장례식을 하게 될 줄은 미처 몰랐다.”(내레이션) 드라마의 주요 남자 등장인물이 슬프고 상심한 얼굴로 등장한다. 주인공 여성 3명은 보이지 않는다. 이 장면은 2회 마지막에 정찬영이 암 진단을 받은 것을 차미조가 알고 울부짖으면서 리플레이된다. 리플레이 장면에서는 카메라에 장례식장 중앙 정찬영의 얼굴이 있는 사진이 잡힌다(<서른, 아홉> ① ②).

두 번째. <기상청 사람들: 사내연애 잔혹사 편>(JTBC 토·일 밤 10시30분) 4회. 사내연애가 실패로 끝난 뒤 사내연애 앞에서 진퇴양난의 처지가 된 진하경 기상청 총괄특보관(박민영). 기상청 특보관 이시우(송강)와 하룻밤을 지냈지만 ‘사귈래요’라는 말에 거절 의사를 표시한다. 다음날 사무실에서 진하경은 이시우에게 과도한 업무를 부과하는 등 부하 직원을 괴롭히는 모양새다. 둘은 업무를 해결하기 위해 같이 밤을 지내고 아침을 맞는다. 이어지는 리플레이에서 진하경이 사귀자는 이시우의 말을 거절한 뒤 다시 돌아갔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리플레이에선 진하경이 사무실에서 이시우에게 업무 지시를 하는 중간에 그를 향해 한 번씩 웃어준다(<기상청 사람들> ① ②).

<서른, 아홉> ①

<서른, 아홉> ①

<서른, 아홉> ②

<서른, 아홉> ②

시청자는 창작자 손바닥 안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독자를 속여서는 안 됐다. ‘수수께끼를 해결할 때 독자는 작중의 탐정과 동등한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 반 다인의 20칙(‘탐정소설 작법 20법칙’) 중 첫 번째다. 두 번째는 ‘작중의 범인이 탐정에 대해서 적당히 행하는 속임수나 술책이 아니고 독자를 속이는 기술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 탐정소설에서 작가는 독자와의 공정한 지적 게임을 가정해야 한다는 엄준한 경고다. 이제는 옛날이야기다.

탐정소설뿐이랴. 21세기 케이(K)드라마에서 창작자와 독자의 게임은 베이징겨울올림픽의 피겨스케이팅같이 공정하지 못하다. K드라마 창작자는 영상 속 과거는 편집된 진실일 뿐이라며 다시 편집할 수 있는 권리를 마음껏 누린다. 장면 사이사이에 보지 못했던 것을 슬쩍슬쩍 넣는다. ‘이건 몰랐지’라면서 시청자가 자신의 손바닥 안에 있음을 역설한다.

원래 반 다인이 독자와의 게임을 강조한 것은 ‘플롯상의 일관성’을 위해서였고, 독자가 번번이 지는 게임에서 흥미를 잃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도 독자와의 게임이 지속되는 건 창작자가 ‘흥미를 유지하는 방법’을 개발해내서다. 바로 복선을 의미하는 낚시 용어 ‘떡밥’이다. 떡밥에는 집어용과 미끼가 있다고 한다(네이버 백과사전). 집어용이 물 전체에 뿌린다면 미끼는 낚싯대에 매단다.

<기상청 사람들> ①

<기상청 사람들> ①

기상청 사람들> ②

기상청 사람들> ②

원조 떡밥 공장은 ‘응답하라’·‘슬기로운’ 시리즈

적어도 K드라마에서 원조 ‘떡밥’ 공장은 확실하다. 신원호 피디·이우정 작가 커플은 ‘응답하라’ 시리즈, ‘슬기로운 ○○생활’ 시리즈(모두 tvN) 등을 통해 깻묵, 감자, 지렁이, 다시마, 어분에서 형광 미끼까지 온갖 종류의 미끼를 실험하고 창조해냈다. <슬기로운 의사생활> 시즌1(2020)의 첫 장면. 율제병원장이 숨진 뒤 등장인물 중에 누가 후계자가 되느냐에 관심이 집중되었을 때 신부 둘과 수녀 둘의 자녀 관계를 차례차례 밝혀 웃음을 주면서 흥미를 돋운다. 이때 드라마에 기상천외한 장면이 등장한다. 큰아들 동일(성동일)이 오른쪽 화면 끝에서 누군가와 대화하고 있다(<슬기로운 의사생활> ①). 후계자를 오른쪽에 꼭꼭 숨겨둔 것. 후계자가 누구인지는 몇 장면 뒤에 밝혀지고(20분용 떡밥, <슬기로운 의사생활> ②) 수술비가 없는 환자를 돕는 키다리 아저씨가 누구인지는 1회 끝에 밝혀진다(1회용 떡밥).

‘1회용 떡밥’은 이런 식으로 진화했다. <그해 우리는>(SBS, 2021~2022)에서 극 전개의 궁금증이 매회 마지막 장면에서 풀린다. ‘에필로그’가 화면 왼쪽 위에 뜨면 기억이 엇갈리던 장면, 마음이 변한 이유 등 ‘진실’이 밝혀진다. 4회, 전교 1등생 국연수(김다미)와 꼴찌생 최웅(최우식)의 짝꿍 생활을 그리는 다큐멘터리의 마지막 촬영을 회상하는 둘은 서로의 기억이 엉터리라고 티격태격한다(<그해 우리는> ①). 에필로그로 가면 그날 마음을 고백했던 사실이 밝혀진다(<그해 우리는> ②).

<응답하라 1994>(2013)와 <응답하라 1988>(2015)은 누가 누구랑 결혼식장에 들어가는 문제로 전 국민을 ‘갈라치기’할 수 있음을 통해 ‘정치적 각성’을 시켰다. 역사적인 ‘저인망식 고기잡이’였다. ‘어남택’(어차피 남편은 최택, 박보검 분)과 ‘어남류’(류정환, 류준열 분)는 두 주인공 남자의 등장부터 드라마 끝까지 갈등했다. <응답하라> 시리즈의 신원호 피디는 작품 누리집의 등장인물 소개를 방영 시작 뒤 업데이트했고, 촬영현장 소식에 따르면 덕선(혜리)조차 누가 자신의 남편이 될지 몰랐다고 한다.

<그해 우리는> ①

<그해 우리는> ①

<그해 우리는> ②

<그해 우리는> ②

“1분 1초도 지루해선 안 된다”

<스물다섯 스물하나>(tvN, 토·일 저녁 9시10분)도 이런 떡밥 기술을 시전한다. 팬카페는 ‘남편이 누구냐’ ‘백이진(남주혁) 아니면 아예 나오지 마라’ 등으로 달궈지고 있다. 드라마에는 20세기 말의 주요 무대가 나희도(김태리)의 딸이 외갓집에서 발견한 엄마의 일기장을 읽는 것과 교차편집된다. (딸은 시청자와 달리 뒤의 이야기가 궁금하지 않은지 일기장을 건너뛰지 않고 성실하게 한 장씩 넘기며 읽어나간다.) 이 드라마는 제목 자체가 ‘낚시’다. 나희도와 백이진은 열일곱, 스물한 살에 만났다. 자우림의 노래처럼 ‘스물다섯 스물하나’가 되면 사랑할 텐데, 시청자는 그때까지 꼼짝없이 지켜보는 수밖에 없다.

신원호 피디는 <응답하라 1994>가 끝난 뒤 한 인터뷰(2014년 <미디어오늘>)에서 “대본 작업부터 구성·대본 회의·편집·촬영에 최종편까지 예능 프로그램의 제작 메커니즘대로, 우리 마음대로 연출했다”고 밝혔다. 이 동력은 “예능은 1분 1초도 지루해선 안 된다”였다. 다음 스토리에 대한 궁금증으로 시청자를 붙드는 드라마에, 스토리 없이 시청자의 채널이 돌아가는 것을 막기 위해 개발한 예능 프로그램의 ‘테크닉’을 추가한 것이다.

10년을 진화해온 기술이 K드라마의 공식으로 자리잡은 이유는 또다시 명확하다. 텔레비전을 통한 시청률이 의미 없어진 순간이지만, 드라마의 집중도는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로 높아졌다. 시청자는 언제 어느 때나 틀어도 이해되는 단순한 스토리 대신 고도의 집중도에 대한 보상이 필요해졌다. 처음부터 끝까지 본 사람이라면 뭔가를 더 얻어가는 게 있어야 한다. 그것은 <기상청 사람들>에서 박민영의 숨겨진 미소와도 같은 ‘득템’이다.

<슬기로운 의사생활> ②

<슬기로운 의사생활> ②

<슬기로운 의사생활> ①

<슬기로운 의사생활> ①

오락적인 단선적 이야기 전개

그러나 고도의 ‘떡밥’ 낚시질은 오락적이지 드라마적이지 않다. <슬기로운 의사생활>에서 누가 후계자인지 밝혀지는 장면에서 누가 드라마의 미장센에 주목할까. 장면과 장면의 미학적 효과가 쌓이는 변증법적 결합은 제작자의 단선적인 이야기 전개로 대체된다. 모든 이야기는 제작자가 원하는 단 하나의 ‘진실’ 속으로 깔때기처럼 빨려들어간다.

드라마가 낚시질을 즐기면서, 드라마는 ‘프레임’에 갇힌다. <슬기로운 감빵생활>(2017)의 교도소 운동마당에는 사각지대가 있다. 카메라 사각지대를 잘 아는 교도관(성동일)은 안 보인다는 것을 이용해 수감자에게 뇌물을 받는다. 창작자들은 프레임의 의미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리플레이로 프레임 밖에서 벌어지는 일을 다시 보여주니 상상력을 부추긴다고 반론할 수 있을까. 오히려 프레임 밖에서 일어나는 일조차 제작자의 손바닥 안으로 들어온다. 상상할 자유가 없는 시청자는 물고기가 돼가고 있다.

구둘래 기자 anyo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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