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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경석의 역사극장

“자녀 셋과 아내, 어디 사는지 모릅니다”

사회주의자 방준표가 입산하기 전 거쳐간 서울·부산·모스크바… 노동조합운동, 반탁 진영과의 싸움, 10월 항쟁 속으로

제1370호
등록 : 2021-07-07 00:48 수정 : 2021-07-08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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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필로 작성한 방준표의 ‘간부이력서’ 첫 페이지. 임경석 제공

1945년 8월15일 해방되던 날, 방준표는 경상남도 밀양에서 살고 있었다. 어느덧 나이 40살이었다. 읍내 ‘밀양의원’이라는 이름의 병원에서 ‘고용인’으로 일했다. 의료 부문 종사자는 아니었던 것 같다. 그의 전력이 인쇄소 직공, 정미회사 사무원 등이었음을 고려하면 원무 행정을 맡은 사무직이나 관리직 노동자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해방 뒤 서울, 운동 현장으로 되돌아가
해방되자 그는 즉시 상경했다. 익숙한 운동 현장으로 되돌아가기 위해서였다. 서울에 도착한 때는 해방된 지 이틀밖에 지나지 않은 8월17일이었다. 그는 곧 30대 전반기를 불태우던 서울지역 노동조합운동에 복귀했다. 29~35살 용산과 영등포 일대의 인쇄소, 서적회사, 맥주공장, 철도공장 노동자들 속에서 사회주의 비밀결사 활동을 한 경험이 있지 않았던가.

그가 전념한 부문은 철도였다. 용산철도공장을 비롯해 서울 철도노동자의 모든 직장이 그의 활동 무대가 됐다. 용산철도공장은 26만㎡(약 7만9천 평)의 드넓은 면적에 들어선 중공업 기지였다. 기관차와 객차, 화차를 제작하고 수리하는 곳이었다. 종업원이 1500명에 이르는 대규모 공장이었다. 그중 현장노동자는 1300명인데 선반, 조립, 마무리, 쇠불림, 원통 제조, 주물, 객차, 도색, 전기, 강판 등 11개 제조공정별로 나뉘어 일했다.1 철도노동자를 조직하고 의식화하는 일이 그의 주력 활동 분야였다. 사업장 속에서 노동조합 조직을 짜고 노동자를 대중투쟁으로 이끌었다.

비밀결사운동에도 가담했다. 그해 10월15일 조선공산당 용산·마포 지구당에 입당했다. 줄여서 ‘용마구’라고 부르던 이 지구당은 영등포지구당과 더불어 노동자 밀집 지구로 손꼽히는, 당내 요충지였다. 그는 평당원이 아니라 지구당 상임 간부로 일했다. 당증 번호도 부여받았다. 1275번이었다.2

노동조합과 비밀결사, 두 분야에서 행한 맹렬한 활동 탓일까. 그는 감옥살이를 겪어야 했다. 해방 뒤 첫 투옥은 1946년 1월23일에 일어났다. 이날 미소공동위원회 개회에 즈음해 ‘미소대표환영시민대회’가 서울운동장에서 열렸다. 서울시인민위원회가 주도하는 이 대회에 거대한 군중이 모였다. <조선일보> 기사에는 10만 명, <해방일보>에는 30만 명이 모였다고 적혔다. 서울 인구가 120만 명으로 추산되던 때의 일이었다.

군중집회는 거리행진으로 이어졌다. 서울운동장을 기점으로 종로, 안국동, 광화문 앞 대로, 신문로, 남대문으로 이어진 거리행진은 해 질 녘에야 끝났다.3 이 시위 행렬은 도중에 신탁통치 반대 세력의 습격을 받았다. 종로2가 종각 사거리에 숨어 있던 ‘반탁전국학생연맹’의 극우 청년 약 300명이 벽돌, 돌멩이, 기왓장 등을 집어던졌다. 그때 방준표는 시위 대열 속에 있었다. 그는 철도노동자를 동원해 반탁 진영의 테러에 맞섰다. ‘반동분자들과 격투’를 불사했다. 결국 그는 미군에 체포돼 군사재판에 넘겨졌다. 마침내 유죄 판결을 받았다. 징역 1년에 벌금 6만원형이 선고됐다.

첫 투옥 기간은 오래 계속되지 않았다. 서대문형무소를 거쳐 마포형무소에 수감 중이던 방준표는 그해 4월18일에 석방됐다. 수감 기간이 3개월이 채 안 됐다. 형기를 채우지 않았는데도 풀려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미소공동위원회 제5호 공동성명 덕분이었다. 미소공동위원회는 4월17일 합의문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에 지지를 서명하는 한국 쪽 정당과 단체는 모두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케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 합의가 곧 제5호 공동성명이었다. 이 성명 때문에 정세가 일시적으로 호전됐다. 적대적 대치 국면이 부드럽게 이완됐고, 투옥된 사상범들은 석방됐다. 방준표는 그 덕을 봤다.

북한 주재 소련민정청 간부부장 아바세예프가 발급한 1948년 10월20일자 유학 대상자 신원 증명서. 방준표의 사진이 첨부돼 있다. 임경석 제공

‘반동분자들과 격투’ 반탁 진영과 싸우다 투옥
석방된 방준표는 지체 없이 운동 현장으로 복귀했다. 이때 그의 당내 소속이 변경됐다. 용마구 당부에서 서울 철도구 당부로 옮겨갔다. 직급은 상임위원이었다. 용산과 마포 지구에 국한되지 않고 서울 전역의 철도노동자 사업을 총괄하는 위치로 바뀐 셈이다. 그의 책임과 권한 수준이 더 높아졌다. 그해 메이데이에는 ‘철도노동자 투쟁 열성자’로 선정돼 표창장까지 받았다.4 그는 해방공간에서 철도노동자 투쟁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부산은 방준표의 삶에서 적잖은 인연을 맺은 곳이다. 그가 부산과 첫 인연을 맺은 시기는 20대 초반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경성사범학교를 졸업한 23살 때 부산보통학교 교원으로 발령이 나서 1년간 근무했다. 부산 영주동에 있는 초등교육기관이었다. 그러나 일본인 교장과 갈등을 겪었고, 좌익으로 지목받은데다 호흡기 질환을 앓은 탓에 그만두고 말았다.

41살 되던 1946년 8월, 그는 다시 한번 부산에 옮겨가 살았다. 경남도당 간부로 발령 났기 때문이다. 도당위원회 상임위원으로서 노동부장직을 맡았다. 8월4일자로 임기가 시작됐다.

경남도당에서 그가 역점을 둔 활동 분야는 <자서전>에 쓰인 바에 따르면, ‘철도노동자들 사이의 당조직 견고화’ ‘반당분자와의 투쟁’이었다. 철도 부문에서 당조직을 강화하는 일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서울에서 줄곧 해온 일이고 노동부장이라는 그의 소임에 비춰봐도 그렇다.

흥미로운 점은 반당분자와의 투쟁이다. 반당분자란 누구를 가리키는가? 그즈음 삼당 합당이 현안이었다. 공산당과 인민당, 신민당이 합해 근로대중의 단일정당을 표방하는 남조선노동당을 수립하는 문제였다. 삼당 내에서 합당을 추진하는 열기가 뜨거웠지만, 그와 동시에 합당 추진 방법을 둘러싸고 반대파가 형성됐다. 공산당 내에서는 이정윤과 김철수를 중심으로 하는 6인 반간부파가 만들어졌다. 경남도당에서도 그를 지지하는 흐름이 강력했다. 경남 출신의 당내 중진인 윤일 등이 앞장서서 각 도의 대표 40여 명을 규합해 당대회 소집을 요구했다. 이른바 대회파가 만들어졌다. 방준표는 경남도당 간부의 입장에서 이 흐름에 맞섰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반당분자와의 무자비한 투쟁을 전개”했다.

부산에서의 10월 항쟁 뒤 ‘야수적 고문’
방준표가 부산에서 직면한 최대 사건은 9월 총파업과 그에 뒤이은 ‘10월 항쟁’이었다. 9월 총파업이란 조선공산당이 주도한 전국적인 노동자 파업투쟁을 가리킨다. 1946년 9월23일 부산지역 철도노동자 7천여 명의 파업이 출발점이었다. 경남도당 노동부장인 방준표의 역할이 중요했을 것이다. 그 자신의 표현으로도 “9월의 철도 파업을 부산서 조직 지도함에 전적으로 가담하였다”고 한다. 그가 맞섰던 대상은 대한노총, 무장 경찰, 미군 헌병 ‘3자의 합작적 공세’였다. 9~10월 “장렬한 피투성이 반항 투쟁에 직접 참가 지도하였다”고 기록했다.5

9월 총파업은 10월1일 대구 경찰의 발포로 사망자가 난 사건을 계기로 해서 전국적 군중봉기로 확산됐다. 방준표는 이 와중에 또다시 투옥됐다. 해방 뒤 두 번째 겪는 불운이었다. 그해 10월7일 경찰에 체포된 그는 ‘야수적 고문’을 당했다고 한다. 고문 피해를 더 자세히 기록하지는 않았지만 ‘야수적’이란 표현이 그가 겪은 육체적, 정신적 고통의 깊이를 짐작하게 한다. 그는 재판에 넘겨져 3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해방 뒤 겪은 두 번째 징역살이는 10개월가량 계속됐다. 이듬해인 1947년 7월14일 부산형무소에서 출옥했다. 이번에도 형기를 다 채우지 않고 석방됐던 이유는 미소공동위원회 덕분이었다. 그해 5월21일 재개된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는 6월 말, 7월 초에 이르러 서울과 평양에서 본회의를 거치며 큰 진전을 보이는 듯싶었다. 그에 힘입어 정치범 석방 요구를 미군정 쪽이 수용했다.

1947년 12월, 방준표는 38선을 넘어 월북했다. 러시아 모스크바 당간부학교 입학 대상자로 선정된 까닭이었다. 당 집행부는 중견 간부 양성 기지를 모스크바에 세웠다. 장래가 촉망되는 신진·중견 간부를 유학시켜 당의 근간을 튼튼히 하려 했다. 남로당 부위원장 박헌영이 작성한 추천서에는 “방준표 동무는 노동조합 운동조직에 열성적으로 참여했고, 민주조선 건설 사업에 충실하다”고 적혀 있다.6

방준표는 1948년 2월1일부터 8월1일까지 평양에 개설된 러시아어 예비과정에 재학했다. 이 기간에 러시아공산당사와 러시아어를 배웠다. 이어서 1948년 9월15일부터 1950년 7월1일까지 모스크바 당간부학교에서 수학했다. 이 기간에 사회주의 이론과 정책에 관한 14개 과목을 수강했다.

뜻밖의 현상이 눈에 띈다. 당학교 성적표가 남았는데, 다른 유학생들보다 성적이 그리 좋지 않다. 5개 과목에서 5점 만점을 받았고, 4개 과목에서 4점을 받았다. 1개 과목은 과락이었다. 동료 유학생 박종근이 12개 전 과목에서 5점인 것에 비하면 상당히 뒤처졌음을 알 수 있다. 젊어서 경성사범학교 입학생으로서 ‘진정한 수재’라는 지목을 받던 방준표가 아닌가?

방준표가 해방 직후 철도노동운동의 거점으로 삼았던 서울 용산철도공장 전경. 임경석 제공

모스크바 당간부학교, 고질병 폐질환
이 의문을 당학교 교무 담당자 니콜라예프의 의견서를 통해 풀 수 있다. 그는 방준표에 대해 평가하기를, “인내심이 강하고 열심히 공부한다. 오래 병을 앓아서 장기간 결석했는데도, 학업 성적에서 뒤처지지 않았다. 근면함과 노력 덕분이다”라고 썼다.7 원인은 질병이었다. 방준표는 모스크바에서도 병을 앓았다. 장기 결석이 불가피할 정도였다. 폐질환은 그의 고질이었다. 23살 때 호흡기병에 걸려서 6개월간 정양했고, 35~37살 때는 폐디스토마로 각혈이 심해 2년간 치료에 전념해야 했다. 그의 폐질환은 10년에 한 번꼴로 재발했다. 43~45살 모스크바 유학 중에도 질병으로 장기 결석한 것을 보면 말이다.

방준표에게도 가족이 있었다. <자서전>에는 가족에 대해 이렇게 쓰였다.

“가정 형편은 대단히 곤란하다. 부양가족으로서 처와 아이가 셋이 있으나 지금은 어디 있는지 알 수 없고, 특히 처는 여성운동에 참가한 관계로 경찰의 추궁을 받고 있다.”8

놀랍게도 가족이 지금 어디 있는지 모른다고 말한다. 전혀 가사를 돌보지 않고 운동에만 전념했음을 알 수 있다. 아내 ‘김정’은 32살, 11년 연하의 젊은 여성이었다. 그도 당원이었고 합법적 공개 영역에서 부녀총동맹 일을 맡은 까닭에 경찰의 사찰을 받는 형편이었다. 자녀는 2녀1남이었다. ‘○○, △△, □□’라는 이름을 가진 10살 미만의 어린아이였다. 이들은 아버지가 부재하고 어머니가 경찰의 시달림을 받는 불안정한 가정에서 자라야 했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참고 문헌

1. ‘용산철도공장, 일반에 縱覽’, <조선일보> 1934년 6월28일치

2. 방준표, ‘간부리력서’, 1쪽, 3쪽, 1948년 8월10일, РГАСПИ ф.495 оп.228 д.794 л.12-13об

3. ‘환영의 깃발을 고양, 미소대표환영 시민대회’, <조선일보> 1946년 1월24일치

4. ‘간부리력서’, 3쪽

5. 김준(방준표), <자서전>, 3쪽, 1948년 8월10일, РГАСПИ ф.495 оп.228 д.794 л.14-16об

6. Зам.Председатель ЦК Трудовой партии Южной Корея Пак Хенен(남조선노동당 부위원장 박헌영), Характеристика на зав.отделом труда провинциального комитета Трудовой Паприи Южной Кореи, Пан Дюн Пе(남조선노동당 경남도당 노동부장 방준표에 대한 평가서), 1948년 7월31일, РГАСПИ ф.495 оп.228 д.794 л.9

7. Учевная характеристика на слушателя Корейской партийной школы Пан Дюн Пе(조선당학교 수강생 방준표의 학업 평가서), 1950년 7월25일, РГАСПИ ф.495 оп.228 д.794 л.4

8. <자서전> 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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