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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극장] 송계월, 여학생 만세 사건을 주도하다

1930년 2차 ‘경성 연합시위 사건’ 주도 혐의로 옥고… 폐결핵으로 23살에 요절
등록 2020-10-05 14:02 수정 2020-10-09 01:12
옥고를 겪고 출옥한 ‘여학생 만세 사건’의 지도자 6인. 왼쪽 셋째가 송계월이다. 임경석 제공

옥고를 겪고 출옥한 ‘여학생 만세 사건’의 지도자 6인. 왼쪽 셋째가 송계월이다. 임경석 제공

검사가 피의자에게 물었다. 식민지 조선 최초의 사상검사로 유명한 이토 노리오 검사였다. 왜 여학교 학생 대표들이 너를 다 알고 있느냐고. 예리한 추궁이었다. 경성 시내에 있는 13개 여학교 대표들이 어떻게 네 하숙집을 다 알고 찾아왔느냐는 질문이기도 했다. 무슨 단체라도 가입한 때문이냐고 물었다. 송계월은 부인했다. 단체에 가입한 일은 없다고. 다만 2년 전 경성여자상업학교 동맹휴학을 주도한 까닭에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고 신문에도 관련 기사가 나고 그랬는데, 아마 그 영향인 것 같다고 답했다.1 무난한 대답이었다. 아귀가 딱 들어맞지는 않지만 심문은 다른 문제로 넘어갔다.


임경석 제공

임경석 제공


3·1운동 이후 최대 규모 대중투쟁

송계월의 혐의는 시위 주동이었다. 1930년 1월 제2차 경성 연합시위 사건을 주도적으로 모의한 혐의로 붙잡혔다. 제2차 연합시위란 1월15일부터 16일까지 여러 중등학교 학생들이 교내 만세운동 범위를 넘어 거리시위에 진출한 사건을 말한다. 이때 6개 남녀 중등학교 학생들이 거리시위에 나섰고, 거리 진출이 막혀 교내에서 만세를 고창한 학교가 경성 시내에서만 18개 학교 7천여 명에 이르렀다. 1929년 11월부터 1930년 2월까지 전개된, 광주에서 시작해 전 조선으로 확대된 항일 학생운동의 절정이라 표현할 만했다. 3·1운동 이후 최대 규모의 대중투쟁이었다.

송계월은 디데이 전야에 열린 ‘여자중등학교 대표자 회합’에 참석했다. 모교 경성여자상업학교의 대표 자격이었다. 이 회합에는 13개 여학교 대표 학생 30명 안팎의 학생이 모였다. 참가자들은 다음날 오전 9시30분에 각 학교에서 일제히 만세를 부르고, 종로 네거리에 집결해 거리시위를 벌이기로 약속했다. 구호로는 ‘광주학생 석방 만세’ ‘약소민족 해방 만세’를 쓰기로 했다. 눈길을 끄는 점이 있다. 회합 장소였다. 다름 아닌 송계월의 처소였다. 그가 사전 모의 과정에 얼마나 깊숙이 개입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함경남도 북청군 출신인 송계월은 하숙하고 있었다. 가회동 48번지, 경성 북촌의 전통 주택가 골목 깊숙한 곳에 있는 평범한 민가였다. 회합이 끝나자 밤 9시였다. 참가자들은 인근의 주목을 끌까 염려해 두세 사람씩 떨어져서 어둠 속으로 흩어졌다.

경찰 당국은 이 시위운동을 ‘여학생 만세 사건’ 또는 ‘여학생 사건’이라고 불렀다. 남녀 학생이 함께 들고일어난 사안인데도 이렇게 호명했다. 정세가 급박했기 때문이다. 광주학생운동 이래 전국에 걸쳐 항일시위가 급증한 까닭에 체포자가 날마다 늘고 있었다. 유치장과 형무소가 사람들로 차고 넘쳤다. 엄벌만이 능사가 아니었다. 총독부는 관대한 태도를 보여 민심을 위무하는 모습을 연출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제2차 연합시위 사건 피의자들을 성별로 나눈 것은 이 때문이었다. 여학생만 떼어내 사법절차를 따로 진행했다. ‘여학생 만세 사건’이라는 호칭이 나온 이유였다. 경찰은 체포한 여학생 가운데 89명만 문제 삼았다. 그중 27명은 구속, 62명은 불구속 상태로 검사국에 송치했다. 송계월은 당연히 구속자 명단에 포함됐다. 그는 다른 구속자들과 함께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다.


‘여자중등학교 대표자 회합’이 열린 송계월의 하숙집, 서울 종로구 가회동 48번지. 임경석 제공

‘여자중등학교 대표자 회합’이 열린 송계월의 하숙집, 서울 종로구 가회동 48번지. 임경석 제공


사상과 이론 투쟁에선 비타협적인 투사

경찰과 검사 취조의 핵심 문제 가운데 하나는 각 학교 연대가 어떻게 가능했는지 밝히는 데 있었다. ‘배후 세력에 의한 계획적인 책동’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총독부 경무국장은 ‘배후 책동의 악분자를 철저히 밝히겠다’고 천명했다.2 이토 검사가 여학교 학생 대표들이 송계월의 하숙집 위치를 다 알고 있는 이유를 궁금하게 여겼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여느 때 같으면 이 지점에서 가혹한 고문 수단을 동원해 비밀결사 연루자를 밝히려고 노력했겠지만, 때는 바야흐로 비상시국이었다. 게다가 총독부는 관대한 처분이 가져올 정책적 이익을 계산했다. 배후 문제는 뜻밖에도 쉽사리 낙착됐다. 공개 여성단체 근우회가 수사망에 포착됐다. 근우회 집행부 자체는 여학생 만세운동에 관계하지 않았지만, 두세 임원이 개인 자격으로 여학생들과 접촉해왔음이 드러났다. 특히 근우회 상무위원 허정숙이 지목됐다. 경찰 최종 보고서에 따르면, 허정숙이 이화여고보 학생 최복순, 김진현 등과 정기적으로 모여 여학생 만세 사건을 주도했다고 한다.3

그래도 의문이 남는다. ‘여자중등학교 대표자 회합’에는 여학생만이 아니라 남학생도 참석했다. 휘문고보 학생 3명이 출석했고, 남학생이 회합의 진행 사회를 보았음에 유의해야 한다. 그들은 행동 계획 합의를 도출하는 데도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그뿐이랴. 남자 중등학교 학생 대표자들의 독자적인 협의체가 작동했다는 점도 중요하다. 여학생들보다 앞서 1월13일부터 여러 차례 모여 연합시위운동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 사실은 허정숙의 지휘와 별도로 독립적인 네트워크가 작동했을 수 있음을 말해준다. 특정하기는 어렵지만, 비밀결사를 매개로 비공개 움직임이 잠재해 있었다고 판단된다.

송계월은 이제 막 20살이었다. 어린 나이인데도 그는 고등경찰과 사상검사의 날카로운 심문을 이겨내고 비공개 네트워크의 노출을 방어했던 것으로 보인다. 송계월이 비밀활동에 익숙했다는 증거는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그는 사상과 이론 문제에 관해서는 비타협적인 투사가 되곤 했다. 송계월과 교유하던 남녀 문인들은 말했다. “계월이는 그렇게 얌전하다가도 이론 투쟁에만 들어서면 열화가 솟아오르는 기개가 있어 건드리기가 어렵다”고 평했다. 한 걸음도 사양하지 않는 조리 있는 언변과 불길을 일으키는 듯한 열정으로 무리 가운데 우뚝 섰다고 한다.4

학생 비밀결사에 참여했다고 보는 가장 두드러진 증거는, 문단에 데뷔한 뒤 송계월이 쓴 작품 속에서 찾을 수 있다. 그가 쓴 작품에 ‘가두연락의 첫날’이라는 글이 있다. 이채로운 작품이다. 비밀활동에 참여한 연락원의 내면 심리를 섬세하게 묘사했다. 일제하 비밀결사의 활동상을 그처럼 생생하게 재현한 문학을, 과문한 탓인지 일찍이 본 기억이 없다. 당대 한 평론가도 인정했다. 소재가 신선해 매우 새로운 맛이 나고 감동까지 준다고.5


송계월의 하숙집, 오늘날 모습. 임경석 제공

송계월의 하숙집, 오늘날 모습. 임경석 제공

비밀 연락원의 내면 담긴 소설도 써

비밀활동의 긴장감을 어떻게 묘사했는지 그 부분을 축약해보자. 점심시간에 짬 내어 거리 연락 임무에 나선 젊은 여성이 주인공이었다. 여성은 손목시계를 들여다봤다. 12시13분. 아직 약속 시각까지는 꼭 7분이 남아 있었다. 행여나 시계가 오작동하지 않을까, 불안했다. 다행히 종로 거리에는 가게마다 귀퉁이에 벽시계가 걸려 있었다. 두 번, 세 번 시간을 확인한 다음에야 마음이 놓였다. 종로 네거리에서 황금정(을지로) 네거리의 중간, 이곳이 연락 장소였다. 여성은 마음을 침착하게 하려고 노력하면서 발길을 옮겼다. 복장과 손동작이 중요했다. 그는 “검은 두루마기에 검은 양말, 흰 고무신, 그리고 왼편 손으로 두루마기 옆구리에 팔짱을 지르고” 있어야 했다. 상대편은 남자라고 들었다. “검은 중절모자에 검은 대모테 안경, 키는 보통보다는 작은 키, 구두는 황색, 왼편 팔에 남색 책보를 끼고 있는” 사람일 것이다. 약속 장소에 가까이 접근하면서 걱정이 들었다. 그 사람을 몰라보고 지나치면 어찌하나. 저편에서도 나를 몰라보면 어찌하나. 오가는 사람들의 옷차림과 행동을 눈여겨봤다. 혹시 벌써 지나쳐버리지나 않았을까 싶어서 두 번이나 뒤를 돌아보았다. 도중에 상대방이 붙잡히지나 않았나. 만나는 장소에 밀정이 있으면 어찌하나. 공포심이 제어할 수 없이 솟아올랐다.6

실제 겪지 않고서는 표현하기 어려운 구체성과 세밀함이 있었다. 접선을 앞둔 사람의 흥분과 긴장감, 의복과 태도, 약속 시각과 장소에 대한 묘사가 생생하다. 송계월이 비밀결사 참가 경험이 있음을 시사한다. 더 눈여겨볼 만한 대목이 있다. 비밀활동을 바라보는 송계월의 시선이다. 무사히 소임을 다했다는 성취감과 자긍심이 작품에 가득 차 있다. 마치 나치 치하 프랑스에서 비밀리에 저항운동에 나선 레지스탕스의 활동상을 보는 듯한 독후감을 준다.

“싹터나는 반도 여류문단의 빛나는 별”

송계월은 인물도 고왔다. “높은 코, 뚜렷한 눈동자, 날씬한 키, 가다듬은 듯한 두 다리”로 인해 “보는 사람마다 눈을 바로 뜨지 못할 만한” 미모를 갖추었다. 송계월이 거리에 나서면, 마주치는 사람들이 “한 번 더 바라보기를 주저할 수 없을” 정도였다. 평론가 이서구는 늦은 봄날 명동 길에서 그녀를 처음 보았을 때, “얼굴이 참 좋구나 했을 뿐인데, 걸음 걷는 뒷맵시가 물 찬 제비같이 새뜻한 양이 참으로 황홀하”더란다. 자기도 모르게 안국동 네거리까지 뒤따라 걸은 적이 있다고 고백했다.7

송계월은 문장이 뛰어났다. 형무소 출옥 뒤 잡지사 개벽사의 기자로 뽑힌 이유는 그 때문이었다. 그는 기자로 재직하는 한편 문단에 데뷔했다. 그리하여 “싹터나는 반도의 여류문단의 빛나는 별”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문학평론가 백철은 1933년 조선 문단을 전망하는 글에서 송계월을 가리켜 신흥문단 작가 20여 명 가운데 하나로 지목했다. ‘신흥문단’은 기성문단에 대칭되는 말로서 프롤레타리아트문학을 가리킨다. 노동계급 문학의 거대한 약진과 성장을 이끌어낼 작가군의 한 명으로 손꼽았다.

그러나 건강이 문제였다. 송계월은 폐결핵을 앓았다. 고향인 함남 북청으로 요양차 귀향한 송계월은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1933년 5월31일 사망했다. 나이 23살이었다. 그의 요절 소식을 들은 기자 송봉우는 평했다. “글 쓴 것을 보아도 논지가 분명하고, 말하는 것을 보아도 조리가 있고, 좀더 자라면 여류 운동객으로 장성할 분”이었는데 정말 아깝다고 말했다.8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참고 문헌
1. 조선총독부 검사 伊藤憲郞, ‘송계월 신문조서’ 1930년 1월30일.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51(동맹휴교사건 재판기록 3), 국사편찬위원회, 2002년.
2. 김성민, ‘광주학생운동연구’, 국민대 박사학위 논문, 206쪽, 2007년.
3. 서대문경찰서, ‘의견서’, 1930년 1월30일.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51(동맹휴교사건 재판기록 3), 국사편찬위원회, 2002년.
4. 紅衣童子, ‘美人薄命哀史, 早逝한 文壇의 名花 宋桂月孃’, <삼천리> 제7권 제3호, 142쪽, 1935년 3월.
5. 洪九, ‘1933年 女流作家群像(續)’, <삼천리> 제5권 제3호, 1933년 3월.
6. 송계월, ‘가두연락의 첫날’, <삼천리> 제4권 제3호, 110~112쪽, 1932년 3월.
7. 白樂仙人, “現代 ‘長安豪傑’ 찾는(座談會)”, <삼천리> 제7권 제10호, 88쪽, 1935년 11월.
8. ‘천하 대소 인물 평론회’, <삼천리> 제8권 제1호, 44쪽, 193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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