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광흠은 서울 한복판에서 체포됐다. 1926년 8월19일 오전 10시쯤이었다. 6·10 만세운동이 일어난 지 두 달 남짓 지난 시점이었다. 그는 관철동 길거리에서 종로경찰서 고등계 형사대에 붙들렸다.1 그 사람만이 아니었다. 시내 각처에서 활동을 개시한 형사들 때문에 다수의 피검자가 나왔다. 이튿날 일간신문 지면에 ‘종로 고등계, 또 검거 개시’라는 굵은 활자로 표제를 단 기사가 실렸다. 이번에도 대검거가 있을 것 같다는 논평이 뒤따랐다.
뜻밖이었다. 6·10 만세운동에 관련된 일제 검거의 파도가 세 차례나 몰아친 뒤였기 때문이다. 그 운동 뒤 종로경찰서에서 취조받던 숱한 사상범이 몇 차례 나뉘어 검사국으로 넘겨졌다. 맨 마지막으로 형사 피의자 42명이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에 송치된 게 8월10일이었다. 경찰 수사는 이제 거의 끝났다는 관측이 설득력을 얻던 참이다.
검거 선풍은 지방에도 불었다. 각지에서 속속 체포된 사람들이 나왔다. 함경남도 함흥과 홍원, 경상남도 마산, 경상북도 대구, 전라남도 광양과 순천 등지에서 혐의자들이 줄지어 서울로 압송됐다. 지방에서 체포돼 종로경찰서로 압송된 자만 해도 30~40명에 이르렀다.
종로경찰서로 끌려간 백광흠은 곧바로 강도 높은 취조를 받았다. 체포된 이튿날에 ‘경찰신문조서’ 제1회분과 제2회분이 한꺼번에 작성된 것을 보면 말이다. 같은 날에 작성됐는데도 취조 책임자가 달랐다. 제1회분은 오모리 히데오 순사와 조선인 유승운 순사가 담당했고, 제2회분은 악명 높은 고등계 간부 요시노 도조 경부보와 조선인 박영원 순사가 맡았다. 두 팀이 번갈아가며 이제 막 붙잡아온 피의자를 정신 차릴 수 없도록 혹독하게 다뤘음을 짐작게 한다.
왜 끌려왔을까? 경찰이 무엇을 알고 바라는지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중요했다. 백광흠은 내심 판단을 내렸던 것 같다. 합법적 공간에서의 공개 활동 이력을 낱낱이 진술하는 태도를 취했다. 합법 활동상을 드러내는 대신 비합법 영역을 은폐하려는 일종의 진술 전략이었다. 그의 진술에 따르면 1894년에 태어났으니 당시 33살이었고, 대한제국 말기에 고향인 경상남도 동래군에 설립된 동명학교 고등과에서 근대교육을 받았다. 그는 사회운동 관련 정보를 숨기지 않았다. 조선노동공제회 상무위원, 조선노농총동맹 집행위원, 동래청년회 집행위원장, 마산노동동우회 집행위원, 삼산노농연합회 집행위원, 화요회 회원 등을 했다고 토로했다.2
관련된 사회단체가 다수라는 점이 놀랍다. 청년단체, 노동자·농민단체, 사상단체 세 영역을 망라하고, 단체 소재지가 서울·동래·마산 세 곳에 걸쳐 있음도 이채롭다. 조선노동공제회와 노농총동맹 같은 전국 단위 대규모 단체에서 간부를 맡았고, 경상남도 동래와 마산에 있는 사회단체에서 임원으로 재임했음이 눈에 띈다. 그는 지방에 활동 기반을 둔 중앙 지도자급 유형의 사회운동가였다.
그러나 경찰이 노리는 것은 그게 아니었다. 비밀결사 가담 여부와 그 활동상이었다. 비밀결사 조선공산당에 입당했음을 자백받는 것이 그들의 목표였다. 경찰이 작성한 ‘백광흠 소행조서’에 따르면, 그자는 “표면상으로는 순종하는 척하지만 매우 교활”한 자였다. 사회주의사상에 ‘광분’하고, 평소 행동이 ‘불량’해 개전의 가능성이 없는 자라고 적혀 있었다.3
경찰은 단편적이나마 물증이 있었다. 백광흠이 휴대한 수첩이다. 거기에는 비밀통신용 약품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 약품을 사용해 종이에 글씨를 쓰면 건조 이후에는 마치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것처럼 백지상태를 만들 수 있었다. 비밀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적합했다. 경찰은 이 약품의 용도를 비밀결사 구성원 사이에 은밀한 메시지를 주고받기 위한 것이라고 판단했다.
또 있었다. 경찰은 ‘당원 명부’를 확보했다. 조선공산당 책임비서 강달영이 은밀히 보관해둔 비밀문서 뭉치를 가방째 압수했다. 경찰이 작성한 ‘압수 증거물건 목록’에는 모두 47종의 크고 작은 기록이 담겼는데, 그중 제6번과 제7번이 ‘당원 명부’였다. 가장 엄격한 기밀을 요하는 기록이라 암호문으로 쓰였다. 한글 한 음절을 음소 단위로 해체하고, 음소마다 해당 음가를 담은 한자를 하나씩 대응시키는 방식이었다. 선택된 한자는 <주역>에서 주로 쓰는 것이라, 얼핏 주역 해설서이거나 미래를 예언하는 점복 관련 서적으로 오인하기 쉬웠다. 예를 들면 ‘지여인(支女寅), 화어각(火於角)’이라는 한자는 ‘전혁’을 뜻했다. ‘전정관’이란 유명한 사회주의자의 가명이었다.
경찰의 추궁은 매서웠다. “책임비서 강달영은 네가 입당했다고 말했는데 어떤가?”라든가, “공산당 명부에 네 성명이 기재되어 있어서 네가 당원임은 확실하다고 보이는데 어떤가?”라고 치고 들어왔다.4
백광흠은 당황했던 것 같다. 비밀 통신용 약품이야 둘러댈 수 있었지만, 입당 물증을 들이대는 앞에서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그는 제1회 신문조서 때는 입당 사실을 인정하지만, 이후에는 모친의 병환 때문에 아무런 활동도 할 수 없었다고 진술했다. 제2회 신문조서 때는 달랐다. 입당을 권유받은 적은 있지만 결코 승낙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가정 사정으로 입당을 거절했다는 입장이었다.
혼선을 정리해야 했다. 백광흠은 굳은 결심을 한 것 같다. 전후 진술에 모순이 있고 물증이 있음에도 후자를 견지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지 않고서는 후속 취조를 감당하기 어렵다고 본 듯하다. 입당 이후 활동상이나 당내 사정 등을 파고들 것이 분명했다. 백광흠은 일관되게 입당 사실을 부인했다. 수차례에 걸친 검사의 피의자 신문조서와 예심판사의 피고인 신문조서에서도 그러했다.
조선공산당 검거 사건 전체를 진두에서 지휘한 경찰 간부 미와 와사부로 경부가 있다. 그가 작성한 의견서에 따르면, 피의자 백광흠은 “공산당 입당을 권유받고 흔쾌히 승낙한 자”이고, 통신 비밀 누출을 막기 위해 약품명을 기재한 수첩을 소지한 자였다. 요컨대 “보통 당원이 아니라 중요한 지위를 점한 자임이 분명”했다.5 그럼에도 그자는 입당 사실마저 부인하고 있다. 굳게 다문 그의 입을 열게 해야 했다.
경찰은 도대체 백광흠에게 무슨 짓을 가했던 것일까? 30대 초반의 팔팔한 젊은이는 죽을병에 걸리고 말았다. 체포된 이듬해 9월, 백광흠은 재판정에 나오는 것조차 어려울 정도로 중병에 걸렸음이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조선공산당 사건 공판 제1일인 1927년 9월13일, “목하 병중에 있어서 출정치 못하고 있는 사람” 6명 가운데 백광흠의 이름이 맨 첫자리에 올랐다.
어떤 병인가? 서대문형무소 보건기사 우치다 덴조가 작성한 진단서에 따르면, 병의 명칭은 ‘좌측 건성 늑막염 겸 폐삼윤증(肺滲潤症) 및 결핵성복막염’이었다. 건성 늑막염이란 늑막강에 염증성 분비물이 없거나 아주 적은 상태의 늑막염을 말한다. 몸에 미열이 있고 가슴 통증과 압박감, 호흡 곤란 등의 증상이 나타나는 질병이었다. 특히 숨을 깊이 들이쉴 때나 기침·재채기를 할 때 바늘로 찌르는 듯한 가슴 통증을 느낀다고 한다. 폐삼윤증이란 결핵균 작용으로 염증이 근원지에서 주위 조직으로 퍼져나가는 증상을 말한다. 폐조직 내에 고름과 체액, 혈액 등이 비정상적으로 축적되는 병증을 보인다. 백광흠의 경우에는 “폐삼윤이 더욱 진행되어 오른쪽 폐 상엽(上葉)을 침범하고, 골중엽부(骨中葉部)도 여러 곳에서 산재성(散在性) 병변이 나타”났다고 한다. 최근에는 “복부 일반에 근육 수축이 일어나, 만지면 약간 판자 형상의 저항을 나타내고” 고통이 수반된다고 한다. 복막 여러 곳에 소규모 종양 모양의 물체가 감지되고 있었다. 보건기사는 비관적인 문장으로 보고서를 마무리했다. “이미 생명이 아침이나 저녁 사이에 걸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했다.6
한 달 뒤 백광흠의 병보석이 허용됐다. 10월13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출감할 때 그는 한 걸음도 제 발로 걷지 못했다. 그래서 “부득이 형무소 안에서부터 자동차를 타게” 하도록 조치했다. 전례 없는 이채로운 일이었다. 그는 수척하기 짝이 없었고, 말도 제대로 못하는 형편이었다. “말할 수 없는 중태”였다고 신문기자는 보도했다.7
출감 뒤 고작 두 달을 버텼을 뿐이다. 백광흠은 1927년 12월13일에 영면했다. 고향인 경상남도 동래군 동래면 칠산동 어느 친구의 집에서 영영 눈을 감았다. 영전에는 16살, 12살 난 두 아들이 있었다. 물려준 재산이라고는 돈 한 푼, 땅 한 뙈기도 없었다. 아내와는 10년 전에 이혼했고, 하나밖에 없는 여동생이 궁색한 살림을 돌봐왔다고 한다. “장차 그 아들들을 어찌할까요. 기가 막히고 가슴이 찢어질 듯합니다”라고 가까운 친구가 한탄하더라 한다.8
생전에 ‘영남지방의 사회운동 선구자’라고 평가받던 백광흠은 일본 경찰의 무자비한 고문으로 생을 마감했다. 야만적인 식민지 국가폭력의 희생자였다. 고문의 희생자와 남겨진 가족은 목숨을 말살당하고 평생토록 상실과 부재의 고통을 겪었다. 그럼에도 그 진상은 드러나지 않았다. 누가 가해했는지, 희생자가 어떤 경위로 죽음에 이르렀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고문으로 인한 희생은 한국 근현대사에서 계속 되풀이됐다. 뒷날 58년이 흘러, 포승줄에 묶인 채 고문사했던 또 한 사람을 기려 김남주 시인은 이렇게 노래했다. 시구의 행간에서 백광흠의 그림자를 본다.
“일상 생활에서 그는/ 조용한 사람이었다/ 이름 빛내지 않았고 모양 꾸며/ 얼굴 내밀지도 않았다// …// 조직 생활에서 그는 사생활을 희생시켰다/ 조직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모든 일을 기꺼이 해냈다/ 큰일이건 작은 일이건 좋은 일이건 궂은 일이건 가리지 않았다// …// 이윽고 공격의 때는 와/ 진격의 나팔 소리 드높아지고/ 그가 무장하고 일어서면/ 바위로 험한 산과 같았다”(‘ 전사 1’)
참고 문헌
1. 경성종로경찰서장 모리 로쿠지, ‘白光欽 卽決言渡書’, 1926년 8월19일. <鄭晋武 外 22명 사건기록>, 경성지방법원검사국문서, 국편 한국사DB https://db.history.go.kr (이하 사료 소재지 동일함)
2. 경성종로경찰서 순사 오모리 히데오, ‘白光欽被疑者訊問調書’, 1926년 8월20일.
3. 경성종로경찰서 순사 스미타 데쓰오(住田鐵男), ‘白光欽 被疑者素行調書’, 1926년 8월30일.
4. 경성지방법원 예심판사 五井節藏, ‘白光欽 被告人訊問調書’, 1926년 12월14일.
5. 경성종로경찰서 경부 미와 와사부로(三輪和三郞), ‘意見書’, 1926년 9월8일.
6. 西大門刑務所保健技師 우치다 덴조(內田銓藏), ‘診斷書, 피고인 白光欽’, 1927년 10월12일. <高允相外100名 사건기록>, 경성지방법원검사국문서, 국편 한국사DB https://db.history.go.kr
7. ‘피골상접한 백광흠, 13일에 보석입원’, <조선일보> 1927년 10월15일.
8. ‘공산당 피고 백광흠 영면’, <동아일보> 1927년 12월14일.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독립운동 열전> 저자
*임경석의 역사극장은 한국 사회주의 운동사의 권위자인 저자가 한국 근현대사 사료를 토대로 지배자와 저항자의 희비극적 서사를 풀어내는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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