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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극장] 반항아, 조선 청년들 가슴에 불을 지르다

광주 학생운동에서 전국 학생운동, 노동운동으로 나아간 반항아 장석천
등록 2020-09-01 06:04 수정 2020-09-03 07:17
적색노조 사건으로 체포된 뒤 형무소에서 찍은 장석천(30살), 앙다문 입꼬리가 반달처럼 아래로 휘었다. 애써 감정을 숨기고 있지만 반항기가 느껴진다. 임경석 제공

적색노조 사건으로 체포된 뒤 형무소에서 찍은 장석천(30살), 앙다문 입꼬리가 반달처럼 아래로 휘었다. 애써 감정을 숨기고 있지만 반항기가 느껴진다. 임경석 제공

1929년 12월3일 새벽이었다. 경성 시내가 발칵 뒤집어졌다. ‘불온’ 격문이 대량 살포됐기 때문이다. ‘조선 학생청년 대중아 궐기하라’라는 제목의 전단을 비롯해 6종의 등사판 유인물이 발견됐다. “검거된 광주의 조선 학생을 즉시 탈환하라” “식민지 노예교육에 반대한다”는 내용이었다. 전날 밤부터 시작해 새벽에 먼동이 틀 때까지 누군가가 그 격문들을 경성 시내에 있는 거의 모든 고등·중등 교육기관에 은밀하게 뿌렸다. 십수 개 대학, 전문학교와 고등보통학교 교정에 동시에 살포한 것을 보면 한두 명의 소행이 아니었다.1

경성 시내는 물론이고 전 조선 각지에도 발송됐다. 도중에 발각되기도 했다. 광화문우편국과 경성우편국에선 지방 배송 직전에 8천 장 분량의 격문을 압수했다. 경찰은 제작·살포된 유인물을 모두 2만 장으로 추산했다. 등사판 인쇄만으로 그 분량을 제작하기란 쉽지 않다. 등사원지 한 장을 등사판에 걸고서 최대 500장을 뽑을 수 있었다. 그나마 숙련된 등사 기능공이라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따라서 2만 장을 인쇄하려면 최소한 등사원지만 40장을 제작해야 했다. 소수 인원이 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섰다.

2만 장 유인물 전국 청년학생에게 발송되다

일본 경찰은 긴장했다. 경기도경찰부가 지휘를 맡고 시내 각 경찰서가 분주하게 활동을 개시했다. 아침 일찍 모리 종로경찰서장이 오토바이를 몰아서 도경찰부를 방문하는 것이 목격됐고, 다나카 도경찰부장을 비롯한 경찰 고위 간부들이 집결해 장시간 밀의를 계속한다는 기사가 언론에 보도됐다. 마침내 전격적으로 일제 검거가 이뤄졌다. 신간회, 근우회, 조선청년총동맹, 중앙청년동맹 같은 공개 사회단체 임원진이 속속 체포됐고 그 사무실과 자택을 압수수색했다. 중등학교 학생들도 잡아갔다. 그리하여 사건 발발 이틀 뒤인 5일 오전, 이미 혐의자 127명이 마구잡이로 끌려갔다.

마침내 5일 오후, 종로경찰서 요시노 도조 경부보가 이끄는 고등계 경찰이 단서를 잡았다. 고등계란 ‘대일본제국’의 치안을 위태롭게 할 정치범죄와 사상범죄를 전담하는 특수 부서였다. 20대 젊은이 10여 명이 보름 전부터 밀의를 거듭한 끝에 저지른 ‘범죄’임을 밝혀냈다. 신문기사 표현에 따르면 ‘견딜 수 없는 취조’로 인해 얻은 정보였다.2

가혹한 고문과 악행이 자행된 끝에 알게 된 정보임을 말해주는 은유였다. 하지만 주모자로 지목된 장석천, 차재정 등은 어디론가 종적을 감춘 상태였다. 경찰은 사방에 경계망을 풀어서 그들의 행적을 쫓았다. 수은동, 당주동, 간동, 적선동, 청운동 등 경성 시내 오래된 주택가 일대에 정사복 경찰이 조밀하게 깔렸다. “골목골목과 산과 개천 등 사람들이 통행할 만한 곳은 전부 파수를 세우고” 수색했다. 그 결과, 주택가 두 곳에 나눠 보관하던 등사판 6대가 압수됐다. 명백한 물증이었다.

장석천(27)은 결국 붙잡혔다. 차재정 등 동료 10여 명도 함께였다. 격문 2만 장 살포 사건이 일어나고 사흘째인 12월5일 밤이었다. 그날 밤부터 종로경찰서에서 시작된 취조는 이듬해 1월5일까지 한 달간 계속됐다. 이 기간에 작성된 경찰 ‘신문조서’ 5회 분량이 남아 있다. 이 문서들이 실제 취조 상황을 보여주는 건 아니다. ‘견딜 수 없는 취조’와 극한적인 고통이 불꽃을 튀었겠지만, 이 문서들에는 평면적인 문답만 기재돼 있다.

취조 현장이 얼마나 격렬하고 극단적이었는지를 시사해주는 사건이 있다. 취조실에 갇힌 장석천이 몰래 예리한 단도를 지니고 있다가 발각됐다. 체포된 지 20여 일이 지난 시점이었다. 신문 보도에 따르면, ‘격문 사건의 주모자로 의심받는’ 그의 몸을 검사한 결과 “왼쪽 양쪽 바지 정강이에다가 보기에도 끔찍스러운 단도를 숨겨넣은 것”이 드러났다.3

취조 상황이 밖으로 흘러나온 이례적인 기사였다. 언제 어떤 경로로 흉기를 구했는지, 어떤 목적으로 그것을 몸에 지녔는지 추궁당했겠지만, 후속 보도는 더 없었다. 아마 탈출을 꾀했거나, 막다른 상황에 몰려 자해를 결심했거나 하지 않았을까 추정된다. 그가 얼마나 담대하고 신념에 찼는지를 잘 말해준다.

장석천이 사망한 자택. 광주군 누문리 93번지의 현 위치. 광주 학생운동의 발상지 광주고보 정문 앞에 있다. 네이버 지도 갈무리

장석천이 사망한 자택. 광주군 누문리 93번지의 현 위치. 광주 학생운동의 발상지 광주고보 정문 앞에 있다. 네이버 지도 갈무리

20일 동안 바지 안쪽에 단도를 숨기고

경찰이 물었다. 언제 무슨 목적으로 상경했느냐고. 광주에서 운동권 간부로 활동하는 자가 상경한 데는 불순한 의도가 있으리라고 예상했기 때문이다. 장석천은 터놓고 얘기했다. 11월17일 아침 경성에 도착했고, 목적은 광주에서 일어난 학생시위운동의 진실을 경성에 전하는 데 있다고 말했다. 경성에서도 학생들을 선동해 일대 시위운동을 일으켜야 한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취조의 초점은 경성에서 누구와 만났고, 12월3일 격문 2만 장 사건에 어떻게 관련됐는지 확인하는 데 있었다. 장석천은 합법 공개단체의 간부들과 만난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신간회 중앙검사위원(이항발), 조선청년총동맹 중앙집행위원(차재정·황태성), 중앙청년동맹 집행위원(곽현) 등과 협의했음을 인정했다. 장석천 자신도 청총 중앙집행위원이었다. 의견이 같은 사람들끼리 업무를 나눠 맡았다고 한다. 시내 학생들의 연합시위가 필요하다고 본 자신과 황태성은 학교별로 적임자를 물색하기로 했고, 그에 반해 차재정과 곽현은 군중을 선동하는 대량의 격문 살포가 필요하다고 보았다는 것이다.

요컨대 장석천은 격문 2만 장 사건에는 관계한 적이 없다는 주장을 내세웠다. 취조가 거듭됐지만 그 진술을 지켰다. 다만 각 고등보통학교에 연락해 연합시위를 준비한 사실은 시인했다. 접촉한 학교는 경성제2고보, 경신학교, 중동학교였노라고 토로했다. 하지만 어느 경우도 성공하지 못했다. 자신은 연합시위의 필요성을 설득했지만, 상대방은 교내 문제에 집중해야 한다거나 역량 부족 등의 이유로 소극적이었다는 것이다. 그 결과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흐지부지됐다는 것이 장석천의 진술 전략이었다.

장석천의 진술에는 일정한 특징이 발견된다. 경찰이 이미 인지한 사실은 시인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안에는 단호히 부인하는 태도를 취했다. 물증이 제시되거나 자신의 주장 근거가 무너지는 상황이 됐을 때, 그제야 슬그머니 말을 바꿨다.

그는 비밀결사 존재를 노출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격문 사건이나 연합시위 계획과 비밀결사 사이의 연계를 극구 부인했다. 설령 관계가 있더라도 비밀결사 구성원 일부가 개인적인 결단으로 참여했던 거라고 진술했다.

장석천의 진술 투쟁은 유효했다. 그는 광주에서 학생운동을 선동했다는 이유로 제1심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6개월형을, 제2심 대구복심법원에서 1년형을 언도받았다. 광주 학생운동의 또 한 명의 지도자 장재성의 제2심 선고형량이 4년인 점과 비교하면 매우 낮다. 하지만 판결 이유 중에는 격문 2만 장 살포 사건도, 서울 지역 연합시위운동도, 비밀결사 조선공산청년회 가담 사실도 포함되지 않았다. 그는 노출되지 않은 비밀결사 동료들의 안위를 지켰고, 자신의 법정 형량도 최소화하는 데 성공했다.

전국 194개 학교로 시위 확산되다

12월3일 격문 2만 장 살포 사건의 의의는 컸다. 당시 경성의 학생운동은 교내 문제에 국한됐다. 광주 학생운동이 1929년 11월3일과 11월12일 두 차례 거리시위 형태로 폭발했는데도 그랬다. 식민지 통치 당국은 이 폭발의 재연과 확산을 막으려 총력을 기울였다. 총독부는 언론 보도를 틀어막았고, 경찰은 닥치는 대로 체포·구금했다. 일본인 이주민들은 갖은 흉기로 무장한 채 위력 시위를 벌였다. 그 때문에 대중투쟁이 광주 일원에 고립될 위기에 처했다. 3·1운동 이후 처음 있는 대중적 거리시위 투쟁이 그대로 잦아들지도 몰랐다.

이때 장석천이 나섰다. 11월17일 긴급 상경한 그가 추구한 것은 식민지 수도 경성에서 학생들의 연합거리시위를 이끌어내는 것이었다. 그의 노력은 주효했다. 12월3일 격문 2만 장 살포 사건이 터졌고, 그것이 징검다리가 됐다. 교내 문제에 얽매여 학교 울타리 안에 갇혀 있던 운동 수준을 일거에 한 단계 올리는 역할을 했다. 12월9일 제1차 연합거리시위가 터졌고, 다음달인 1월15∼16일 제2차 연합거리시위가 벌어졌다. 대폭발이었다. 그리하여 전 조선에서 광주 학생운동을 지지하는 연대투쟁이 전개됐다. 전국 194개 학교에서 5만4천여 명이 거리시위, 동맹파업, 격문 살포 등의 형태로 행동에 나섰다. 그로 인해 1462명이 피검됐고, 2330명이 무기정학, 582명이 퇴학 처분을 받았다.

장석천은 광주 학생운동을 전 조선 학생운동으로 바꾼, 놀라운 성취를 거둔 지도자였다. 도대체 전 조선 학생운동으로 전환시킨 동력이 어디서 나왔을까? 뒷날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은 고립되고 말았는데, 1929년엔 어떻게 그 고립을 극복할 수 있었을까? 무엇보다 전국 규모의 비밀결사 네트워크 효과를 들어야겠다. 장석천은 비밀결사 조선공산청년회(공청)의 전라도 책임자였다.4 그 덕분에 그는 상경하자마자 공청 중앙집행위원회 멤버들과 회합할 수 있었고, 신속히 광주 학생운동의 전 조선 확산을 가져올 조처를 준비할 수 있었다.

또 하나의 요인은 합법과 비합법 활동을 유기적으로 결합한 데서 찾을 수 있다. 그는 1927년부터 광주에서 합법 공개 영역의 사회운동에 뛰어들었다. 광주청년회, 광주청년동맹, 전남청년연맹, 신간회 광주지회 등 단체에 가입해 집행위원·조사연구부장·상임간사 등의 중책을 맡았다. 1929년 말까지 3년간 헌신해 광주 지역 운동권의 핵심으로 떠올랐다. 그뿐만이 아니다. 경성에 본부를 둔 전국 규모 단체에도 진출했다. 신간회 본부대회 출석 대표, 조선청년총동맹 중앙집행위원직에 취임했다. 이처럼 광주와 경성에 걸쳐 합법과 비합법 영역을 넘나드는 전업적인 활동 경력이 그에게 대중투쟁의 전국 확산 가능성을 부여했다.

장석천의 서대문형무소 수형자카드. 출소 예정일이 1934년 12월28일이라고 쓰여 있으나, 중병에 걸려 1933년 11월7일 병보석으로 출감했다. 임경석 제공

장석천의 서대문형무소 수형자카드. 출소 예정일이 1934년 12월28일이라고 쓰여 있으나, 중병에 걸려 1933년 11월7일 병보석으로 출감했다. 임경석 제공


불꽃 같은 혁명가의 삶과 갑작스러운 죽음

장석천은 학생운동 현장에서 노동운동 현장으로 이전한, 지식계급 출신의 전형적인 혁명가였다. 1931년 12월 형기를 마치고 출옥한 그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적색노동조합운동 현장으로 달려갔다. 무대는 경성이었다. 조선제사회사, 인쇄소 인쇄직공, 지물회사 직공과 사무원들 속에서 노동조합 조직 계획을 추진했다.

그러나 성과가 채 무르익기도 전에 경찰에 적발됐다. 장석천은 다시 투옥됐다. 1932년 11월12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찍은, 제21007호 사진 원판이 남아 있다. 검사국으로 송치되고 한 달쯤 지난 시점이다. 벽돌 담장을 배경으로 찍은 수형자 사진이다. 무명으로 지은 하얀 한복을 입었는데, 확정판결을 받기 전 미결수 신분의 옷차림인 것 같다. 때가 묻어 꼬질꼬질하다. ‘장석천 4511’이라고 적힌 어깨띠를 매고 있다. 식별을 위해 형무소 쪽에서 강제로 착용하게 했을 것이다. 숫자는 수인번호일 터이다. 네모진 얼굴에 광대뼈가 도드라져 있어 다부진 느낌을 준다. 코밑과 턱에 다듬지 못한 수염이 덥수룩이 자랐다. 무감각하고 음울한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턱을 치켜든 채 눈을 게슴츠레 떴다. 앙다문 입꼬리가 반달처럼 아래로 휘었다. 애써 감정을 숨기지만 반항기가 느껴진다.

이 억누르지 못하는 반항기 때문일까? 경성지법에서 징역 2년형을 선고받은 그는 형기를 다 채우지 못했다. 중병에 걸린 채 보석으로 출옥했다. 고문 후유증이라고 판단된다. 1935년 10월18일, 광주 학생운동의 발상지 광주고보 정문 맞은편에 있는 자택에서 숨을 거뒀다. 새파란 나이 33살이었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참고 문헌
1. ‘6종 격문을 인쇄, 전 조선 각지에 배부’, <동아일보> 1929년 12월28일치 호외.
2. ‘격문사건 逐日확대, 今曉에 40여명 검거’, <동아일보> 1929년 12월6일치.
3. ‘張錫天 懷中에 단도를 발견’, <동아일보> 1930년 1월1일치.
4. 朝鮮總督府 警務局長, ‘朝保秘第465號 朝鮮共産靑年會竝朝鮮學生前衛同盟檢擧ニ關スル件’, 1930년 4월15일. 현자29, 37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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