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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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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둘기 마음은 콩밭에 산토끼 마음은 산에

강아지 워리가 물어온 토끼, 온 가족이 풀을 바치며 잘해주었는데…
등록 2019-10-04 11:40 수정 2020-05-03 04:29

오빠들은 산토끼가 많은 뒷산으로 나무하러 가고 풀을 베러 다닙니다. 산에 놀러 다니는 것은 아니지만 오빠들은 나무하고 풀 베는 동안 틈틈이 나무타기도 하고 토끼몰이도 하는 것을 재미있어합니다. 나도 오빠들 틈에 끼고 싶습니다. 어머니는 여자가 험한 일을 하면 팔자가 세진다고 집안에 붙잡아두었습니다. 그래도 다행한 것은 어머니가 나물을 좋아하시기 때문에 나는 자주 뒷산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손도 찢고 다리도 훌치며 놀던 토끼

나물을 뜯으러 갈 때마다 예쁜 잿빛 토끼도 만나고 옅은 갈색 토끼도 만납니다. 토끼들은 빨간 눈에 털 관리를 어떻게 하는지 뽀송뽀송한 것이 안아보고 싶습니다. 긴 귀를 쫑긋거리며 두 발을 비비기도 하고 무엇을 오물오물 먹으면서 무심하게 놀고 있습니다. 내가 숨죽이고 다가가도 전혀 모르고 놀다가 손을 뻗어 확 덮치려는 순간 화들짝 도망가버립니다. 내가 조금만 빨랐으면 잡을 수 있을 텐데 안타깝습니다. 토끼몰이를 하다가 나물을 조금밖에 못 뜯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평소 산에서 오르막길을 뛰는 것은 엄두도 못 낼 일입니다. 토끼가 앞에서 뛰어가면 오르막 산비탈도 엄청 빨리 뛰어 따라갈 수 있습니다. 앞서가는 토끼만 바라보고 뛰어가다가 몸뻬 자락이 나무 그루터기에 걸려 무릎 위까지 쭉 찢어졌습니다. 산에 갈 때는 누더기 바지를 입어야 하는데 바지 갈아입는 걸 잊어버리고 그냥 갔다가 새 바지를 찢어먹었습니다.

어머니한테 많이 혼날 것 같습니다. 어머니 몰래 들어오려고 담을 넘었는데 담 안에서 일하시는 어머니와 딱 마주쳤습니다. “이놈의 간나가 새 무명 바지를 찢어먹으면 어떡하나!” 벼락같이 소리소리 지르십니다. 할머니가 보시고 “야야, 어디 다친 데는 없나” 하시며 얼른 나를 끌어안고 집 안으로 들어가서 별로 혼나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갈 때마다 부지런히 나물부터 뜯어놓고 토끼몰이를 합니다. 토끼몰이를 할 때마다 손도 찢어지고 다리를 훌쳐 피멍이 안 든 날이 없습니다. 그래도 자꾸만 토끼와 놀다보니 점점 빨리 뛸 수 있습니다.

토끼는 똥도 동글동글하게 예쁘게 쌉니다. 토끼똥을 보면 토끼 길을 쉽게 따라갈 수 있습니다. 토끼 길을 따라 올라가자 잿빛 토끼는 한가롭게 앉아 놀고 있습니다. 토끼는 내가 있는 걸 전혀 무서워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토끼는 앞다리가 짧아 비탈길로 내려가는 것을 잘 못합니다. 나는 토끼를 산 아래쪽으로 몰아서 잡을 생각입니다. 내가 “이놈!” 하고 소리치자 화들짝 놀라 아래로 뛰어 내려갑니다. 오늘은 토끼를 잡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한참을 내리 달리다가 손을 뻗어 토끼를 덮치려는 순간 무엇이 내 모가지를 획 낚아챘습니다. 바로 앞에 가늘고 긴 칭물개덩굴(이른 봄에 나는, 잎은 나물로 먹고 쫀드기라는 열매가 달리는 가시덩굴)이 있는 것을 몰랐습니다. 목에서 귀밑까지 가시덩굴 자국이 시뻘겋게 나고 피가 맺혔습니다. 토끼는 나 잡아보란 듯이 산 위로 뛰어 올라갔습니다.

일러스트레이션 방현일

일러스트레이션 방현일

토끼장 앞에 산더미 같은 풀

집으로 오자 어른들은 나물 뜯으러 갔다가 아가 큰일 날 뻔했다고 그래도 얼굴을 안 훌쳐서 다행이라고 약을 바르고 난리가 났습니다. 며칠이 지나서 워리(우리 집 영리한 개 이름)가 토끼 새끼 한 마리를 살포시 물어다 내 앞에다 놓았습니다. 워리가 침이 함초롬히 묻은 토끼 새끼를 내려놓고 나를 쳐다보고 꼬리를 살래살래 흔듭니다. 아마도 잘 키워보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워리야, 어디서 애기 토끼를 다 구했나? 아이구 장해라!”

산토끼는 어디서 새끼를 낳아 키우는지 아버지도 토끼 새끼를 본 적이 없다고 하십니다. 우리 가족은 어미 없는 어린 새끼를 많이 키워봐서 잘 키울 자신이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송판 죽데기를 모아다 톱으로 자르고 못을 박아 큼직한 직사각형 상자를 만들었습니다. 앞면은 닭장에서 쓰던 철망을 대었습니다.

주먹보다 작은 토끼 새끼 한 마린데 온 가족이 풀을 뜯어 나릅니다. 동생은 토끼는 토끼풀을 먹어야 한다고 클로버만 골라 뜯어다 줍니다. 작은오빠는 산에 가서 칡덩굴을 한 짐 베어다 놓습니다. 할머니는 질경이만 뜯어다 주고 밭에서 일하시던 아버지는 사코리를 뜯어다 주십니다. 조그만 토끼 한 마리 사는 토끼장 앞에는 산더미같이 다양한 풀이 쌓였습니다. 조그만 토끼는 귀를 쫑긋거리며 오물오물 여러 가지 풀을 고루 잘 먹습니다. 우리 가족은 토끼가 너무 귀여워 귀염둥이 귀염둥이 하고 부르다가 그냥 둥둥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작은 토끼를 보며 우리 가족은 행복했습니다. 보름쯤 되던 어느 날 토끼 먹이를 주고 문을 잘못 닫았던 것 같습니다. 아침에 보니 토끼장은 비어 있었습니다. 온 가족이 이슬 내린 이른 아침 아기 토끼를 찾아나섰습니다.

작은오빠는 왼쪽 강냉이 밭 속으로 “토끼야, 둥둥아~” 부르며 갑니다. 나는 콩밭 속을 “둥둥아, 둥둥아~” 부르며 콩 포기를 일일이 들춰보며 다녀봅니다. 온 밭을 다 돌아다닌 가족들이 비 맞은 것처럼 옷이 후줄근히 젖어서 그냥 돌아왔습니다.

이슬에 젖은 워리가 어디서 찾았는지 토끼를 살포시 물고 왔습니다. “야, 둥둥이 이 새끼. 세상에 누가 이렇게 잘해주나, 다시는 집 나가지 말그라.” 더 맛있는 콩잎이나 새똥지 같은 나물을 넣어주고 문단속을 잘 하였습니다.

둥둥이는 눈에 보이는 것처럼 쑥쑥 자랍니다. 머지않아 새끼도 낳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새끼도 많이 낳으면 집을 늘리고 더 행복해질 것 같습니다.

워리야 다시 토끼를 물어오지 마라

어느 날 토끼장 문도 안 열려 있는데 토끼가 보이지 않습니다. 잘 살펴보니 송판 사이를 이빨로 갈아 틈을 넓혀나갔습니다. 풀에 가려 빠져나갈 만큼 틈을 넓히는 것을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아버지가 비둘기 마음은 항상 콩밭에 가 있다고 산토끼 마음은 항상 산에 가 있으니 그냥 산으로 가서 잘 살게 내버려두라고 하셨습니다. 워리도 불러 다시는 토끼를 찾아오지 말라고 당부하셨습니다.

보통은 어미를 모르는 새끼는 키우면 사람을 어미인 줄 알고 잘 따랐습니다. 둥둥이는 맛있는 풀만 골라 먹이고, 사람이 들여다보며 귀엽다 귀엽다 해도 곧 산으로만 가고 싶어 했습니다. 어미 없이 혼자서도 잘 사는 것을 그동안 가두어 징역살이를 시켰다고 아기 토끼한테 많이 미안했습니다.

전순예 1945년생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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