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고스펙’의 기준이 뭡니까?”
얼마 전 서울의 한 고등학교 강당. 2019학년도 진학 실적(?)을 설명하는 교사에게, 학부모 ㄱ이 돌직구 질문을 던졌다. 교사가 학종(학생부종합전형)으로 합격한 사례를 설명하며 추임새처럼 계속 집어넣는 ‘고스펙’이란 말이 거슬렸던 모양이다. “아… 그게 일단 학생부에 적힌 교내대회 수상 실적부터 보고요.” 기습 질문에 당황한 ‘진진샘’(진로진학 담당교사) ㄴ의 궁색한 답변이 이어졌다. 결국 질문을 한 ㄱ도, 다른 학부모도 궁금증을 풀지 못한 채 설명회는 끝났다(원래 입시 설명회라는 것이 ‘혹시나’ 하고 와서 ‘역시나’ 하고 돌아가는 일이긴 하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깜깜이 통과하려면 무조건 빼곡해야</font></font>해마다 2월이면 학교에선 ‘소리 없는’ 전쟁이 벌어진다. 해당 학년의 학생부 기재가 마무리되는 시점이기 때문이다. 합격 기준이 아리송한 ‘깜깜이’ 학종을 통과하려면, 학생부에 기재하는 모든 항목이 ‘번듯해야’ 한다. 내신과 수상 실적처럼 점수를 매기기 좋은 항목뿐 아니라 ‘세특’(세부능력 및 특기사항)과 ‘자동봉진’(자율활동·동아리활동·봉사활동·진로활동), 독서 활동까지 빼곡히 적혀 있어야 한다.
‘종이로 출력한 학생부가 30장을 넘기느냐 마느냐가 뭣이 중헌디?’라고 생각했다면 마음을 고쳐먹어야 할지도 모른다. 곧 ‘고사미’(고3) 되는 2학년들의 심경은 더 절절하다. ‘한 줄만 더~!’를 갈망하는 마음이 워낙 크다보니, 2월까지도 ‘나이스’(NEIS·교육행정정보시스템)에서 핵심 항목을 열람하지 못하도록 막아놓는 학교가 많다. 학생과 학부모의 요청이 쏟아지리란 우려 때문이겠지.
“우리 때는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어요. 지금 학종은 완전 ‘공장식’인 것 같더라고요.” 2012년 대학에 입학한 취업준비생 ㄷ은 자신의 수험생 시절을 떠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의미심장한 말이다. 초기만 해도 발명·어학 등 특정 분야에 덕후 기질이 있는 학생이 유리했는데, 지금은 마치 공장에서 찍어내는 것처럼 일정 수준의 자격을 갖추도록 요구하는 것 같다는 얘기였다. ㄷ의 일갈은 학종이 정성평가가 아니라 정량평가로 변질되어 간다는 비판과 일맥상통한다.
답답한 현실은 또 있다. 시간을 쪼개고 쪼개 학생부가 요구하는 미션을 완수하더라도, 어떤 교사를 만나느냐에 따라 학생부의 ‘때깔’이 확 달라진다는 점이다. 입시를 함께 치러야 할 고3 담임이 정해지면, 발표 직후 교실 곳곳에서 환호와 좌절이 엇갈린다. 덕분에 고사미맘의 단톡방도 시끌시끌하다. “OO은 1년 지나도 애들 이름을 못 외우는 샘이 담임이 됐대요. 첫인사 때 자기도 ‘고3 담임 맡기 싫었다’고 하더라는군요. 뭐라고 위로해야 할지….” (비운(?)의 주인공 OO은 그날 대성통곡을 하고 말았다) 아이들에 대한 애착이 부족하고 성실하지 않은 교사가 작성한 학생부는 ‘한 줄만 더’가 통하기는커녕, 누락사항이 생기기 일쑤고 중복 문장이 보이는 등 무성의함이 그대로 드러나기도 한다. 그야말로 ‘복불복’이다. 입시가 운빨에 좌우될수도 있다니, 기가 찰 노릇이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셀프’가 많은 세특</font></font>담임만 잘 만나야 하는 건 아니다. 입학사정관이 열심히 챙겨본다는 ‘세특’은 각 과목별 교사들이 직접 써주는 항목이다. 성실한 교사들은 세특을 써주기 전에 학생들에게 수업 내용 관련 심화보고서를 내도록 권하는 등 빈칸을 알차게 채우느라 분주하다. 물론 이런 교사는 대체로 수업시간에 아이들을 관찰하는 태도도 남다르다.
그렇지만 세특은 유독 ‘셀프 학생부’가 많이 나오는 항목이기도 하다. ‘셀프 학생부’란 교사가 학생에게 직접 학생부에 기재할 내용을 써오라고 하는 것을 말한다. 세특은 교사의 관점에서 학생의 수업 태도와 역량을 관찰해서 쓰는 것인데, 학생이 교사가 된양 자기를 바라보며 작성해야 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써줘야 할 학생이 많아서라고 백번 양보해서 보더라도, 학생 대신 학부모나 사교육 업체가 써주는 건 어떻게 할 건가? 학생과 학부모의 손에 들어오게 되면, 불공정 시비가 이는 건 순식간이다.
‘교사 재량’이라는 이유로 내신 1~2등급을 대상으로만 써주는 경우도 적잖다. 세특이 세부능력과 ‘특기사항’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지난해 학생부 개선 논의가 이루어질 때 세특을 모든 학생을 대상으로 쓰도록 의무화하자는 제안도 나왔으나 통과되진 못했다. 그래서 세특은 학생부가 몇 장인지 좌우하는 주된 항목 가운데 하나다.
학교가 상위 10% 학생들의 학생부를 ‘빛내기 위해’ 애쓰는 것은 이뿐이 아니다. 학교마다 이름은 다르지만 내신 성적이 높은 학생 위주로 꾸려놓은 심화반. 그 안에선 학교 공부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인문학 등 교양 강의와 세미나, 각종 융합교육 프로그램, 기관 탐방 등이 이루어지며, 그 내용이 고스란히 학생부에 기재된다. 학교는 때때로 심화반 학생만을 위한 교내 봉사활동 프로그램을 마련하며, 전공적합성에 맞는 동아리를 새로 만들거나 소논문 쓰기를 훈련하기도 한다. 전체 공지가 나가지 않기 때문에 심화반에 포함되지 못한 학생과 학부모들은 알 길이 없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외려 다양한 잠재력을 차단해”</font></font>“학생부를 교사가 기록한다고 해서 객관적이고 공정하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상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해당 학생의 내신 성적이 어느 정도인지, 학종으로 대학에 붙을 가능성이 있는지 등에 따라 학생부가 달라지기 마련이거든요. 어떤 면에서 보면 학종이 외려 학생들의 다양한 잠재력을 차단하는 부작용을 낳고 있습니다.” 서울의 한 고등학교 교사 ㄹ의 고백이다. 대학에 붙을 만한 학생부를 만드느라, 오히려 다양한 잠재력을 사장시키는 결과가 나오기도 한다는 얘기다. 여론을 잠재우려 때만 되면 나오는 ‘땜질식’ 처방은 이제 피로도만 높일 뿐이다. 아프지만 좀더 현실적인 질문을 던질 때다. 좋은 취지에 기댄 입시제도가 교실을 어떻게 망가뜨리고 있는지.
고3 엄마 Y <font color="#00847C">입시제도가 제대로 고쳐지지 못하는 이유는 뭘까. 내 아이의 입시가 닥치면 어떤 ‘변화’도 원하지 않고, 내 아이의 입시가 끝나면 ‘무심’해지기 때문이라는 속설이 있다. 결국 아무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면 맞는 말이다. 지금처럼 입시제도가 너무 복잡해져버린 상황에선 경험 없이는 판단하기조차 어렵다. 공교롭게도 드라마 이 전국을 강타할 때 이 글을 썼다. 드라마는 많은 이들에게 잔상을 깊게 남겼지만, 누가 무엇을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를 떠올리면 갑갑하기만 하다. 요즘 입시 커뮤니티에선 ‘내 아이의 입시’가 끝났지만 그곳을 나가지 못한 채, ‘귀신이 구천을 떠돌 듯’ 맴도는 전직 고사미맘들이 적잖다. 누군가는 억울함을 쏟아내고, 다른 누군가는 입시 가이드를 자처하고, 또 다른 이는 정부 정책에 비판과 지적을 이어간다. 여기엔 정치와 정책이 현실을 직시하지 못한다는 염려가 깔려 있다. 이 글도 그런 마음으로 썼다. 좀 들어보시라고! 그동안 고사미맘의 이야기를 들어주신 모든 분께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f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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