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서울의 한 고등학교에서 열린 학부모 대상 ‘진학 설명회’. 학생부종합전형(학종)에 능통한 것으로 유명한 강사가 학부모들을 대상으로 자기소개서 쓰는 법을 일러준다. 고사미 여름방학을 전후해 꼬박 두 달 가까이 혼신의 힘을 쏟아야 한다는 바로 그 ‘자소서’다. “전공적합성, 안 되면 계열적합성이라도 살려야 합니다.” “활동을 단순 나열하기보다는 뭘 배웠는지를 써야 합니다.” “자소서와 학생부가 일관성을 가져야겠죠?” “상투적 표현은 삼가주세요.” 기본 설명이 얼추 끝나자, 본론에 들어간다. ‘엔지(NG) 자소서’ 파악하기와 ‘합격생 자소서’ 분석하기.
반장보다 더 나은 부반장?“어머님들, 학급에서 부반장을 한 친구가 있어요. 이 친구가 자소서에다 ‘매사에 열심히 한 결과 반장보다 더 나은 부반장이란 말을 들을 수 있었다’라고 쓰면 어떨까요? 입학사정관이 좋게 볼 리가 없겠죠! ‘반장이 되지 못했다는 점이 서운하기도 했지만, 반장을 도와서 학급 친구들에게 도움이 되는 역할을 하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친구들끼리 하루에 한 번씩 칭찬하기를 시도했고 친구들의 반응도 좋았다’는 식으로 바꾸셔야 합니다.”
이렇게 ‘포장’의 기술을 하나둘 익혀가니, ‘심화 학습’이 이어진다. “어떤 학생이 3년 내내 경제학과를 가려고 비교과 활동을 해왔는데, 내신이 삐끗하는 바람에 커트라인이 더 낮은 사학과로 진로를 급변경했다면 말입니다. 자소서를 어떻게 써야 할까요?” 질문이 솔깃하다. 많은 고사미가 맞닥뜨릴 법한 일이기 때문이다. 강사는 ‘평소 수학과 과학을 좋아해 화폐를 주제로 한 융합인재 교육과정에 참여하다가 각국의 환율 제도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앞으로 환율의 변동이 역사에 미친 영향에 대해 공부하고 싶다’는 식으로 써서 합격한 지원자의 사례를 조목조목 짚어준다. 좀더 고도화된 포장술이다.
자소서는 다양한 적성과 잠재력을 가진 인재를 선발한다는 학종의 취지가 현실에서 어떻게 굴절되는지를 보여주는 한 단면이다. 이미 자소서는 ‘폐지 요구’가 끊이지 않아 청와대 국민청원의 단골 소재로 등장한 지 오래다. 자소서는 어쩌다 애물단지로 전락했을까?
실제로 고3 여름방학 기간에 고사미들의 가장 큰 고통은 ‘자소서 쓰기’다. 학종을 포함한 수시 전형의 원서 접수는 9월 초다. 1학기 기말고사가 끝나자마자 원서를 낼 때까지 자소서에 매달려야 한다. 수능 준비에만 전력을 다하는 재수생과 격차가 벌어지는 것도 바로 이 시기라는 말이 나온다. 수시 전형에서 주어지는 지원 기회는 모두 여섯 번. 자소서도 각각 따로 여섯 번을 써야 한다는 뜻이다. 수험생의 부담을 덜어준다고 몇 해 전부터 한국대학교육협의회가 ‘공통질문 3문항+자율질문 1문항’으로 바꿨지만 별무소용이다. 어차피 대학마다 원하는 인재상이 조금씩 다르고 선호하는 답변의 유형이 다르기 때문에 부담은 그대로인 탓이다.
적극적 포장의 기술을 넘어 ‘작은 거짓말’까지 한두 개 보태지면, 자소서는 ‘자소설’(자기소개 소설)이 되고 만다. 지난해 말 자소서 폐지를 촉구한 어느 국민청원자의 이야기는 의미심장하다. “시험에서 문제지가 한 장만 유출되어도 재시험을 보는데, 자소서의 경우 문제가 유출된 상황에서 학생들이 답안을 작성하는 형식입니다. …자소서 쓰는 기간이 되면, 부모들은 한 글자라도 더 미사여구를 만들려고 혈안이 됩니다. 아이들의 전형이 아니라, 부모의 전형이고, 그래서 학생들의 냉소적인 시각도 적지 않습니다. …부모들이 입시를 위해, 아이의 소질을 창조해내는 전 과정이 자소서에 묻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표절 불합격 처리자만 1406명부모나 입시컨설팅 업체의 힘을 빌려 대필·첨삭·가필을 거친 ‘자소설’이 난무한다는 얘기다. 모든 아이의 자소서를 세심히 살펴주는 담임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느 분야든 사교육이 발달하는 영역일수록, 정답도 매뉴얼화돼간다. ‘학교에서 ○○ 공부를 하다가 의문이 들어서 선생님한테 질문을 했고 그 결과 더 심화된 내용을 알아보게 됐다’는 스토리를 담으라는 것은 이제 자소서 쓰기의 ‘바이블’이 됐다. 지난해 자소서 표절로 불합격된 이들만 1406명에 이른다고 한다. 유사도 분석 결과, 표절 판정을 받은 자소서가 이만큼이나 된다는 것인데 더 이상 놀랍지도 않은 현실이다.
그런데 자소서만 폐지하면 되는 걸까? 자소서 폐지 논쟁의 이면에는 더 중요한 문제가 있다. 고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아이들에게 과도하게 ‘진로 스토리’를 짜내도록 부담을 안긴다는 점이다. 아이들은 입학 직후인 3월부터 진로를 단단히 정해두지 않으면 학종에서 불리해진다는 생각에 부담 백배다. 진로·적성에 따라 봉사활동과 동아리, 독서, 소논문 등의 비교과 포트폴리오를 일관성 있게 만들려면 목표부터 명확히 해야 한다. “난 좀 천천히 생각해볼 테야!”라고 하는 순간, 경쟁에서 밀리는 걸 감수해야 한다. “난 공부를 하다보니 생각이 바뀌었는걸!” 이런 경우라면 논리정연하고도 매끄러운 변경 사유를 대야 한다. 질풍노도의 시기에 ‘좌충우돌’하는 모습은 학생부에 해롭다고 배운다. 학교는 아이들에게 미래를 자유롭게 그려볼 시간과 여유를 절대 주지 않는다. 자소서는 2년6개월여에 걸친 고단한 경주의 끄트머리에서 넘어야 할 마지막 장애물인지도 모른다.
그럼 진로교육은 이전보다 나아졌을까? 단연코 ‘글쎄’다. 30년 전보다는 개선됐다고 하지만 대한민국 교실이 근본적으로 바뀌었다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다. 초등학교, 중학교 때부터 진로와 적성을 찾아준다는 프로그램이 이전보다 많아졌지만 정작 내실 있는 진로교육이 이뤄지는지도 의문이다. 이른바 ‘잘나가는’ 직업을 가진 학부모(의사, 변호사, 방송사 프로듀서 등)를 불러 특강을 여는 데 의존하는 교사도 적지 않다. 고등학교로 올라와서도 진로진학을 담당하는 교사가 있지만 다른 과목 수업을 병행하는 경우가 많고, 전담 교사가 있더라도 ‘인서울’에 좀더 많은 아이를 보내는 데 주력하는 경우가 많다.
‘묻지마 이과’ 심화되기도‘묻지마 이과’로 쏠리는 현상이 심화돼온 것도 이런 맥락과 무관하지 않다. 적성과 무관하게 문과를 기피하는 현상은 최근 몇 년간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이제 여고에서도 이과와 문과의 비율이 반반에 이를 정도다. 법대가 로스쿨로 전환되고 의학전문대학원도 없어지면서 이과 선호 현상이 더 커진 측면도 있다. 상위권으로 갈수록 이과로 정렬하는 현상은 훨씬 더 심하다. “전교 20등까지가 모두 이과를 지원했더라”는 이야기가 심심찮게 들린다. ‘문송’(문과라서 죄송)한 젊은이들을 꺼리는 사회에서, 제대로 진로·적성 찾기가 이루어질 리 만무하다. 지난 1월 청와대 관리(김현철 전 경제보좌관)까지 “국문과(전공 학생들) 취직 안 되지 않느냐. 그런 학생들 왕창 뽑아서 태국·인도네시아에 한글 선생님으로 보내고 싶다”는 말을 서슴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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