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 1교시를 부담이 적은 ‘한국사’ 과목으로 조정할 것을 청원합니다!”
지난해 ‘불수능’, 좀더 정확히는 ‘불국어’ 시험이 끝난 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올라온 글이다. 요지인즉, 수능 1교시 과목인 국어 난이도가 갈수록 높아져 너무 일찍 ‘멘붕’(멘탈 붕괴)이 찾아온다는 것이다. 국어 시험지의 길고도 난해한 지문과 전투를 치른 뒤, 2교시 이후 시험도 망쳤다는 사연이 쏟아지던 무렵이다. 한 재수생은 1교시 이후 멘붕이 심하게 와서 (시험을 완주하지 못한 채) 쉬는 시간에 자리를 박차고 나와버렸다고 한다. 다음 과목 시험을 풀 수 없을 정도로 심리 상태가 무너져버린 것이다.
대안은 상대적으로 쉬운 한국사를 1교시로 옮기자는 것이었다. 청와대가 답변에 나서야 할 정도로 지지를 얻진 못했지만 비슷한 청원이 몇 개 더 이어졌다. 상황 파악이 잘 안 되는 ‘꼰대’ 어른들이 보기엔 ‘해프닝’ 같아 보이지만, 고사미들에겐 나름 절실한 얘기였다. 오죽하면 고사미가 되는 준비는 ‘멘탈 관리’부터라는 말이 나왔겠나.
바야흐로 ‘멘탈갑’이 원하는 대학을 간다는 말이 나오는 시대다. 그만큼 ‘유리 멘탈’(‘두부 멘탈’ 혹은 ‘쿠크다스 멘탈’이라고도 한다)이 된 고사미가 많다는 얘기기도 하다. 갈수록 치열해지는 입시 경쟁에서 아이들이 평정심을 잃기 쉬운 탓이다. 서점에선 ‘공부 멘탈’을 최상 상태로 유지하는 비법을 담은 책들이 인기를 끈다. 공부는 머리로 하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 하는 것이라는 논리로 수험생의 마음을 공략한다. 공교육 학교에서도 고사미들에게 이제는 ‘지덕체’가 아니라 ‘체덕지’의 시대라고 강조할 정도다.
‘고3스러운’ 뇌의 주파수?드라마 의 입시 코디네이터 김주영의 대사 중에 이런 게 있다. “예서는 멘탈이 약해 이 고비를 잘못 넘기면 걷잡을 수 없이 성적이 떨어질 수 있습니다.” 이 대사를 듣고 가슴을 쓸어내린 고사미맘이 한둘이 아닐 것이다. 크고 작은 시험을 치를 때마다 스트레스와 불안증을 호소하는 아이를 종종 눈앞에서 지켜보는 탓이다. 시험을 앞두고 원인을 알 수 없는 ‘배앓이’를 하는 아이가 많지만 병원을 찾아도 딱히 치료법이 없다. 급기야 일부 병원에선 ‘시험불안 클리닉’을 개설하기도 했다. 뇌파 훈련과 근육이완법 등으로 시험을 앞두고 빈번하게 불안증을 겪는 아이들을 치료한다는 것이다.
“어머님, 입시 준비는 멘탈 관리가 50%입니다. 한 해 동안 ‘고3스러운 뇌의 주파수’를 잘 맞춰주는 것이 중요하지요.” 지난 연말 찾았던 한 입시학원 선생의 말이었다. 마케팅에 민감한 사교육이 놓칠 리 없는 포인트다. 도대체 고3스러운 뇌의 주파수란 무엇일까. 그는 1월부터 12월까지, 고사미들이 대체로 겪는 심리 상태의 곡선을 그려주고 학부모가 시기마다 대처해야 할 방법을 일러줬다.
내가 치렀던 입시는 이미 까맣게 잊어버린 탓일까. 학원 선생이 들려준 고사미의 연간 심리 곡선은 모르고 있던 세계다. 3월까지만 해도 자신의 위치에 ‘매우 주관적’인 자신감이 치솟아 있던 고사미들은 대체로 4월부터는 고2 때로 돌아간 것처럼 풀어진다고 한다. 그러다 6월이 되면 목표와 현실의 괴리 속에 불안감이 증폭되고 8월쯤 되면 귓가에서 ‘재수하자’는 악마의 속삭임이 들리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이런 불안감은 9월에 최고조로 상승하고 그 여파로 멍 때리고 앉아 있는 고사미가 늘어나, 고사미맘에게도 최대 고비가 될 것이라고 한다. 물론 현실적인 목표 설정과 효율적인 시간표 관리 등을 강조하기 위한 이야기지만 듣는 내내 머리가 하얘졌다.
자물쇠반, 쇠사슬반… 윈터스물의 반 이름마음의 흔들림 없이 공부에 직진하려는 고사미들의 ‘처절한’ 몸부림은 이런저런 방식으로 표출된다. 노트에 가고 싶은 대학의 로고를 오려서 붙이고 책상머리에는 ‘결기’를 다지는 포스트잇을 잔뜩 붙여두는 것은 ‘귀여운’ 수준이다. 스톱워치를 눌러가며 집중력을 올리기 위해 공부 시간을 재고, 집안에 들인 ‘독서실 책상’(양옆으로 칸막이가 있는 책상)에 틀어박혀 공부하는 경험도 한두 번쯤 시도해보는 일이다.
(이 연재의 첫 회에서 언급한) ‘윈터스쿨’도 이런 유리 멘탈 고사미를 공략하며 유행처럼 번진 경우다. 방학만 되면, 적잖은 아이들이 연락이 두절된 채 사라진다. 더러 방학식에도 참석 안 하고 입소하는 아이들도 있다. 애지중지하던 스마트폰도 친구도 끊고, 격리된 학원에 갇혀 ‘합숙’을 하며 아침부터 밤까지 수업과 자습을 반복하기 위해서다. 윈터스쿨은 때때로 ‘자물쇠반’ ‘쇠사슬반’이라는 더 험악한 이름으로 ‘정신무장’을 강조하는 시스템으로 돌변한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부모가 억지로 집어넣는다고 생각하지만 스스로 멘탈이 허약하다고 생각하는 아이들이 손을 들고 가는 경우도 적잖다.
이쯤 되면 과거에도 ‘정신승리’는 중요했다고 말하는 꼰대들이 나오기 마련이다. 물론 예나 지금이나 감정의 증폭이 심한 나이에 인생에서 가장 격렬한 경쟁을 경험하는 것이 입시다. 하지만 바로 옆에서 지켜보는 고사미맘들은 안다. 지금이 훨씬 더 고단해졌다는 걸. 개인의 ‘노오오력’이 갈수록 강조되는 시대, 더 일찍 시작됐지만 끝이 보이지 않는 경쟁의 굴레, 웬만한 직장인도 감당 못할 고도의 효율을 요구하는 입시제도…. 왜 ‘정신승리’를 외치며 살아야 하는지도 공감이 잘 되지 않는 아이들에게 어른들은 앞만 보며 달려가라고 주문할 뿐이다. 현실은 더 열악해졌고, 세대적 감수성은 이전보다 훨씬 더 예민하다. 마음이 아픈 아이들이 늘어나기 쉬운 구조다.
덕분에 고사미맘도 종종 살얼음판을 걷는다. 내 아이도 우울증에 빠질 수 있다는 걸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다. 공부에 지쳐 멘탈까지 흔들리는 아이를 위해 엄마는 뭘해야 할까. 의 김주영이나 예서 엄마처럼, 집중력을 끌어올리기 위해 공부방의 책상 위치와 조명·습도를 최적의 상태로 맞추고 라이벌을 페이스메이커로 곁에 둔다는 어설픈 처방은 드라마로만 보자. 아이를 ‘강철 멘탈’로 만들겠다는 욕심부터 버려야 하지 않을까. 아이 입시를 내가 조정할 수 있다는 생각을 내려놓고 ‘응원 모드’로 주파수를 맞추자 다짐해본다. (이것도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때론 ‘무심한 척’ 있는 것이 더 큰 응원많이들 실수하는 장면이 대략 이런 거다. “엄마, 나 이번 시험 1개 틀렸어.” “그래? 다 맞은 애는 몇 명이니?” 스스로 경쟁에 익숙해진 의식과 언어로 아이의 자존감을 무너뜨리는 경우가 의외로 빈번하게 일어난다. 대화의 타이밍도 중요하다. 때론 ‘무심한 척’ 있는 것이 더 큰 응원이 된다. 입시제도 개편이 이슈로 떠오를 때마다 너도나도 교육 전문가인 양 목소리를 높이지만, 사실 고사미맘들은 딱 한 가지 생각밖에 없다. 더 복잡하고, 더 어렵게 바뀐 제도를 잘 파악해서 내 아이가 무탈하게 적응할 수 있도록 돕는 것. 아이가 입시 때문에 마음을 다치지 않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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