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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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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나카 저격수의 탈옥

‘황포탄 의거’ 오성륜…

맹수 우리 같던 감옥을 어떻게 탈출했나
등록 2019-02-23 14:11 수정 2020-05-03 04:29
히고노카미 주머니칼의 크기. 임경석 제공

히고노카미 주머니칼의 크기. 임경석 제공

1922년 3월28일 다나카 일본군대장 저격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을 ‘황포탄 의거’라고 한다. 사건 직후 이 의거의 주역 가운데 두 사람이 체포됐다. 김익상(28)과 오성륜(23)이었다. 이들을 체포한 사람들은 일본군이나 경찰이 아니었다. 권총을 소지한 ‘괴한’을 그냥 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상하이 거주 시민들과 교통순경이었다. 한낮에 총을 쏘면서 대로를 뛰어다니지 않았는가. 그들 눈에는 갑작스러운 총격과 위험천만한 난동으로 보였을 뿐이다. 제국주의 침략자에 맞서 싸우는 피억압 민족의 해방투쟁이라고는 미처 생각할 여지가 없었다.

두 사람은 일본총영사관이 아니라 상하이 공동조계 경무청에 인계됐다. 사건 장소도 그렇고, 두 사람이 체포된 곳도 공동조계 관할 구역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영국인 경찰이 취조했다. 범인들의 태도는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자신들이 누구이며 왜 그런 일을 했는지 거침없이 진술했다. 그리하여 두 명 모두 한국인이고, 한국 독립을 위해 투쟁하는 혁명단체 소속이란 것이 밝혀졌다. 그들은 자기 행위를 전혀 후회하지 않았다. 김익상은 “나는 단지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것을 후회할 뿐”이라고 했다. 오성륜도 “우리 조국이 고통받는 현실을 우리 손으로 세계에 알리기 위해서” 다나카 대장을 저격했노라고 토로했다.1

감옥에 가둔 것은 맹수였다
중국 상하이 일본총영사관 건물. 현재 중국 해군 군사시설로 쓰이고 있다. 임경석 제공

중국 상하이 일본총영사관 건물. 현재 중국 해군 군사시설로 쓰이고 있다. 임경석 제공

이틀 뒤, 두 사람은 상하이 일본총영사관 경찰서에 인계됐다. 사건 수사 기록과 증거물도 함께였다. 바로 그날부터 일본인 경찰의 문초가 시작됐다. 범죄 동기, 범행 경로, 공범자 관계 등을 집요하게 신문했다.

두 사람이 갇힌 곳은 높은 담을 둘러친 총영사관 구내의 부속 감옥이었다. 총영사관은 상하이 일본인 지구를 관할하는 일종의 정부와 같았다. 자체 경찰기관이 있을 뿐 아니라 검찰, 재판부, 감옥 시설까지 갖추고 있었다. 이 감옥은 정식 재판에 회부되기 이전의 미결수들을 주로 수용했다. 예심을 마치고 공판에 넘겨진 죄수는 본국 나가사키 감옥으로 송치하는 것이 관례였다. 두 사람은 분리 수용됐다. 김익상은 1번 방, 오성륜은 5번 방에 갇혔다. 마땅히 독방에 가둬야 했겠지만 그럴 수 없었다. 감방 수는 6개에 불과한데 수감 중인 범죄자가 이미 25명이나 됐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잡범’들과 같은 방에 수용됐다. 각각 3명의 다른 죄수와 함께 혼거방에서 지내게 됐다.2

오성륜이 갇힌 5번 방은 감금 설비가 이중으로 돼 있었다. 실내 한쪽에 철봉을 일정한 간격을 두고 박아, 따로 철제 우리를 설치한 특수 감방이었다. 맹수를 수용하는 동물원의 철제 우리와 다름이 없었다. 철제 우리 출입문에는 빗장이 걸렸고, 거기에는 다시 쇠자물쇠가 채워졌다. 오성륜은 5번 방 속에서도 철제 우리 안에 갇혔다. 그뿐인가. 팔목에는 수갑이, 발목에는 족쇄가 채워졌다. 중범죄자인지라 엄중하게 다루었다.

수감 열흘쯤 되던 때 작은 변화가 있었다. 감방 내부에 철제 우리를 따로 둔 구조는 간수들에겐 무척 성가신 시스템이었다. 무엇보다 용변이 문제였다. 변기는 철제 우리 밖에 있었다. 수감자가 용변을 요청할 때마다 간수들은 똑같은 동작을 반복해야 했다. 5번 방 문을 따고 들어와서, 다시 철제 우리 차단문에 달린 빗장과 쇠자물쇠를 열어줘야 했다. 수갑과 족쇄도 풀어줘야 했다. 그러고는 얼마쯤 용변이 끝나기를 기다려야 했으며, 용변이 끝난 뒤에는 이제 역순이었다. 다시 수갑과 족쇄를 채워 철제 우리 속에 집어넣고 빗장과 자물쇠를 닫아야 했다. 이렇게 열흘이 지났다. 경찰과 검사의 신문이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피의자가 범죄행위를 감추지 않고 진술했기 때문에 혐의 사실은 모두 판명된 상태였다. 머잖아 사건은 예심으로 넘어갈 터였다. 중죄인에 대한 긴장감이 조금씩 옅어졌다. 간수들은 철제 우리 차단문에 걸린 빗장과 잠금장치를 일일이 열고 닫던 행위를 생략했다. 용변 처리를 범죄인 스스로 해결할 수 있도록 했다. 그 덕분에 오성륜은 철제 우리 안팎으로 넘나들 수 있게 됐다. 손발에 수갑과 족쇄는 달렸지만. 4월7일부터였다.3

히고노카미 주머니칼이 어떻게
탈옥을 허용한 원인을 설명하는 상하이 일본총영사관의 보고서. 히고노카미 주머니칼을 언급한 게 보인다. 임경석 제공

탈옥을 허용한 원인을 설명하는 상하이 일본총영사관의 보고서. 히고노카미 주머니칼을 언급한 게 보인다. 임경석 제공

오성륜은 다른 수감자들과 잘 지냈다. 모두 일본인이었다. 다무라 추이치는 사기 범죄로 징역 1년6개월형을 선고받은, 전과 2범의 누범자였다. 다른 두 수감자는 고가의 밀수품을 밀매하는 암시장 상인들이었다. 고미야 시카조는 권총 밀매와 공갈죄로 징역 3개월을 받았고, 후지타 가메노스케도 총기 밀매 혐의로 구류 25일을 선고받은 상태였다. 오성륜은 이 수감자들에게서 따뜻한 대우를 받았다. 왜 그랬을까?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아마 고문으로 고통받는 이에 대한 연민이 그들 마음속에 일었던 것 같다. 사형이 예정된 중죄인에 대한 동정일 수도 있었다. 또 오성륜의 개인적인 성품과 태도에 수감자들의 호감을 이끌어내는 것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4월15일 경찰과 검사 신문이 끝났다. 사건은 총영사관 판사의 예심에 회부됐다. 10여 일이 지났다. 김익상에 관한 예심 사무는 종료됐고, 오성륜 심리도 완결을 앞두고 있었다. 며칠 뒤 일본 나가사키로 압송이 예정된 상황이었다.

오성륜은 ‘소도’(작은 칼)를 손에 넣었다. 뒷날 경찰 조사에 따르면, ‘히고노카미’(肥後守) 브랜드가 새겨진 접이식 주머니칼이었다고 한다. 어떻게 입수했는지는 경찰도 끝내 확인하지 못했다. 감옥 외부에서 조력자들이 암약했거나, 경계 소홀을 틈타 어디선가 훔쳤을 거라고 추정할 뿐이었다.

4월27일이었다. 오성륜은 식기 뚜껑의 작은 금속 부위를 주머니칼로 잘라냈다. 창문 틈에서 뽑아낸 철사 한 줄을 그것에 감았다. 수갑과 족쇄를 풀 열쇠로 쓰기 위해서였다. 실패를 거듭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성공했다. 4월28일, 수갑과 족쇄가 열렸다. 이날부터 오성륜은 병에 걸렸다고 가장하며 세수와 목욕 등 감방 밖 출입을 중단했다.

사기범 다무라는 오성륜과 행동을 같이하기로 했다. 동반 탈옥을 결심했다. 다른 두 수감자는 형기가 얼마 남지 않았으므로 동참하지 않았다. 그러나 마음으로는 같은 편이었다. 탈옥 계획을 이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조력을 마다하지 않았다. 탈옥이 성공한 뒤에는, 살해 위협 때문에 부득이 지켜볼 수밖에 없었노라고 진술하기로 입을 맞췄다.

5번 방은 건물 2층에 있었다. 원래 영사관 직원 숙소로 쓰던 곳을 감옥으로 개조한 시설이었다. 한쪽 벽면에 작은 창문이 하나 있었다. 도로에 접한 창이었다. 창문 밖으로 거리 풍경이 엿보였다. 당연히 거기에는 탈주 방지 시설이 굳게 세워져 있었다. 철망이 둘러쳐지고, 철봉 4개가 조밀하게 박혀 있었다. 하지만 철망을 뜯어내고 철봉을 한두 개 제거하면 몸을 빼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오성륜과 다무라는 시간 날 때마다 철망 절단 작업에 매달렸다. 오랜 시간을 들인 끝에 겨우 가로세로 10㎝씩 절단할 수 있었다.4

탈옥을 위한 한일 연대
상하이 일본총영사관이 있던 위치, 현재 황푸로 106번지. 아래 붉은 별 찍힌 곳. 임경석 제공

상하이 일본총영사관이 있던 위치, 현재 황푸로 106번지. 아래 붉은 별 찍힌 곳. 임경석 제공

좀더 시간을 들이면 철망은 뜯어낼 수 있겠지만, 철봉 제거는 가능할까 의심스러웠다. 밀수품 밀매범 고미야는 목수 경험이 있었다. 차라리 감방 출입문을 공략하는 것이 좋겠다고 조언했다. 감방 출입문 아래쪽 일부는 나무로 돼 있으므로, 그것을 깎아내자는 제안이었다. 맞는 말이었다.

5월1일 아침이었다. 세면 시간에 누군가가 간수 사무실에서 조그만 숫돌 하나를 몰래 갖고 나오는 데 성공했다. 주머니칼은 다시 날카롭게 벼려졌다. 수감자들은 출입문 널판을 교대로 베어냈다. 숙직 순사의 이목과 간수들의 순시를 피해 소리 없이 해야 했다. 한 사람은 망을 보고, 다른 사람들이 교대로 나무를 깎았다. 온종일 그렇게 했다. 마침내 가로 48㎝, 세로 30㎝ 직사각형 구멍이 뚫렸다. 성인 남성 한 사람이 충분히 빠져나갈 만한 크기였다. 밤이 깊기를 기다렸다. 떼낸 자국이 드러나지 않게 원래 상태처럼 꾸몄다.5

밖으로 나가자면 옷과 신발을 갖춰야 했다. 오성륜은 체포될 때처럼 다갈색 혼방 모직으로 된 중국 옷을 입고 있었다. 다무라가 문제였다. 그는 수의에 맨발 차림이었다. 그를 위해 낡은 양복을 입고 있던 후지타가 자기 옷을 내놨다. 바닥에 깔고 자던 이부자리를 뜯어서 신발 비슷하게 만들었다. 또 준비할 게 있었다. 남은 사람들의 알리바이를 만들어주는 일이었다. 나갈 사람들은 남은 두 사람의 수족을 감방 속 철봉에 묶고, 수건으로 입에 재갈을 물렸다.

새벽 1시30분이었다. 숙직 순사들의 순시가 끝난 지 30분이 지났다. 오성륜과 다무라는 행동에 들어갔다. 모든 게 순조로웠다. 뒷날 에 실린 기사에 따르면, 두 사람은 자른 문짝으로 감방을 빠져나왔고, 층계로 1층에 내려가는 데 성공했다. 영사관 마당을 가로질러 담장으로 갔고, 출입자가 드문 영사관 뒷문을 타고 넘는 데 성공했다고 한다. 그들은 깊은 밤중이었지만 영사관 건물 앞 황푸로 거리에서 두 대의 인력거를 불러 탈 수 있었다. 인력거는 프랑스 조계로 향했다. 탈옥자들의 피신을 돕는 동지들이 거주하는 곳이었다.6

흔적도 없이 사라진 탈옥수
오성륜 탈옥 소식을 전하는 <독립신문> 1922년 12월13일치 기사. 임경석 제공

오성륜 탈옥 소식을 전하는 <독립신문> 1922년 12월13일치 기사. 임경석 제공

두 사람이 옥문을 뚫고 나간 지 30분쯤 지나, 옥중에 남은 이들이 비로소 고함을 질렀다. 간수와 숙직 순사들이 달려왔다. 그제야 총영사관 쪽은 탈옥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비상이 걸렸다. 탈옥만으로도 놀랄 일인데, 그 행위자가 다나카 대장 저격범이지 않은가. 총영사관은 수배령을 내렸다. 모든 경찰력과 밀정 조직을 가동해 탈출범들의 동선을 추적했다. 범인들의 이동이나 잠복 장소로 쓰일 가능성이 있는 정거장, 부두, 여관 등은 특별 감시 대상이 됐다. 또 상하이 여러 구역을 관장하는 다른 경찰 조직에도 협조를 구했다. 공동조계 공부국 경찰, 프랑스 조계 경찰, 중국 경찰기관에 통첩을 보내 비상경계를 요청했다. 효과는 없었다. 오성륜이 어디로 갔는지, 종적을 전혀 알 수 없었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했다. 총영사관은 다나카 대장을 저격한 또 하나의 저격범 김익상을 부랴부랴 일본으로 이송했다. 오성륜이 탈옥한 바로 이튿날, 5월3일 자로 김익상은 산조마루 여객선 편으로 나가사키 지방재판소로 압송됐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참고 문헌
1. ‘일본 다나카 장군 폭탄 세례, 광신자들의 표적’, 1922년 3월29일치. , 국사편찬위원회 편, 241쪽, 1991.
2. 在上海船津總領事, 「田中大將狙擊犯人吳成崙逃走ニ關スル件」, 大正11年 5月3日. 日本外務省 編, 『外務省警察史 - 朝鮮民族運動史(未定稿)』 2, 高麗書林影印, 678~679쪽, 1991.
3. 在上海船津總領事, 「田中大將狙擊犯人吳成崙逃走ニ關スル件」, 大正11年 7月12日. 日本外務省 編, 앞의 책, 698쪽.
4. 在上海船津總領事, 앞의 글, 大正11年 5月3日. 日本外務省 編, 앞의 책, 683쪽.
5. ‘吳壯士脫獄顚末’, 1922년 12월13일치.
6. 위와 같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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