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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지배민족 위한 인터내셔널리즘

한국 독립운동에 510억원어치 금괴 지원한 레닌

활발한 활동으로 지원 끌어낸 주체는 한인사회당
등록 2018-04-24 09:13 수정 2020-05-02 19:28
코민테른 제2차 대회 민족·식민지 분과에서 토의 중인 박진순과 레닌. 임경석 제공

코민테른 제2차 대회 민족·식민지 분과에서 토의 중인 박진순과 레닌. 임경석 제공

모스크바 자금은 도대체 어떤 돈인가. 김립이 독립운동계 동료들의 손에 목숨을 잃은 비극적 사건의 한가운데에 이 문제가 놓여 있었다. 이 돈의 출처에 대해서는 아무런 이견도 없다. 코민테른(국제공산당)과 소비에트러시아 정부가 이 자금을 제공했다. 이것에는 누구나 다 동의한다.

자금 규모는 어느 정도였나. 도대체 얼마이기에 비극적인 사건을 초래했을까. 당연히 적은 돈이 아니었다. 자금 운송에 직접 참여했던 한형권의 증언에 따르면, 3·1운동 이듬해인 1920년에 레닌 정부가 한국 혁명 사업에 주기로 약속한 자금 규모는 200만루블이었다. 지폐가 아니라 금화였다. 순금 덩어리였다.

성인 5명 체중과 같은 327kg 금괴

왜 금화로 계량했을까. 당시 혁명과 내란에 휩쓸린 러시아 사회의 화폐제도가 불안정했기 때문이다. 통용되는 화폐가 여러 가지였다. 제정러시아 시절에 발행된 로마노프 루블, 1917년 2월 혁명 이후 발행된 케렌스키 루블, 10월 혁명 이후 소비에트 정부가 발행한 소비에트 루블, 백위파 세묘노프 정부가 발행한 세묘노프 루블 등이 혼용됐다. 어느 것이나 다 안정성이 의심스러웠다. 순금 보유고에 의거한 태환을 보장하지 않은 채 마구 찍어낸 화폐들이었다. 극심한 인플레이션이 초래됐고, 화폐가치가 급락했다. 예컨대 세묘노프 루블은 미국 돈 1달러당 무려 25만루블 비율로 환전됐다. 지역에 따라서는 통용이 불가능한 돈도 있었다. 케렌스키 루블과 소비에트 루블은 아무르 강변의 블라고베셴스크 일대에서는 유통 자체가 되지 않았다.

이런 형편이었으므로 지폐는 부적당했다. 국제 금융거래를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유럽의 유력한 은행에 계좌를 개설하는 것이 당시엔 불가능했다. 신생 혁명 정부를 적대시하는 제국주의 열강은 소비에트러시아에 경제 봉쇄 정책을 취했다. 오직 실물 자산만이 유용했다. 제정러시아 때 발행한 금화만이 공신력을 갖춘 결제 수단으로 쓰일 수 있었다.

러시아 정부는 한국 쪽의 필요에 따라 자금을 얼마씩 나눠 지급하기로 약속했다. 1차 지급액은 1920년 9월에 집행된 금화 40만루블이었다. 이 돈은 어느 정도의 금덩어리인가. 한형권의 회상에 따르면, 20푸드(러시아의 무게 단위로, 1푸드는 약 16.38kg)의 금괴를 궤짝 7개에 나눠 담았는데, 모두 합하면 성인 5명의 몸무게를 합한 것과 같았다.① 20푸드의 금괴는 약 327.6kg이다. 성인 5명의 몸무게와 같았다는 회고담이 사실에 부합함을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을 궤짝 7개에 나눠 담았으니, 한 궤짝의 무게는 약 47kg이다. 한 사람이 들기에는 너무 무겁고, 둘이서 양 끝을 맞잡는다면 무난히 운반할 수 있었다.

금화 40만루블은 오늘날 화폐 구매력으로 얼마나 될까. 1920년 런던 현물시장 거래가에 따르면, 금 1온스(28.349g)당 가격이 20.68달러였다.② 미터법으로 환산하면 금 1g당 약 0.729달러로, 금화 40만루블에 해당하는 순금 327.6kg은 23만8820달러였다. 1924년 1월 현재 1달러에 대한 일본 화폐의 교환가는 2원16∼2원17전이었다.③ 금화 40만루블은 미국 돈으로는 23만8820달러, 일본 돈으로는 51만5852엔이었다. 그즈음 식민지 조선 신문기자의 월급이 40~50엔이고, 일용노동자 하루 일당이 1엔쯤 했다. 금화 40만루블은 오늘날 화폐 구매력으로 환산하면 510억원쯤 되는 큰돈이었다.

흉작으로 수많은 민중 고통받던 때

소비에트러시아 정부가 한국의 독립혁명을 위해 무상 원조하기로 약속한 200만루블은 약 2550억원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놀랄 만한 액수였다. 레닌 정부는 무상 원조 총액 가운데 5분의 1에 해당하는 510억원을 1차분으로 지급했다. 혁명과 내전으로 고통을 겪던 소비에트러시아 정부였다. 서구 열강에 의해 경제가 봉쇄되고, 도처에서 백위파 세력이 외국의 후원을 얻어 군사 반란을 일으키던 중이었다. 그뿐인가. 볼가강과 돈강 유역의 농업지대에서 흉작으로 기근이 생겨 수많은 민중이 고통받던 때였다. 그럼에도 러시아 정부는 멀리 떨어진 한국 혁명의 승리를 돕기 위해 거액의 지원금을 쾌척했다. 식민지 피억압민족의 해방을 지원하는 국제주의 정신의 발로였다. 코민테른 창립대회에서 채택된 구호, ‘만국의 노동자와 피억압민족은 단결하라’는 정신을 실천에 옮겼던 것이다.

이제 가장 중요한 문제를 풀어야 한다. 소비에트러시아 정부는 도대체 누구에게 자금을 주었는가. 표현을 달리해보자. ‘수령 주체는 누구인가’ ‘누가 모스크바 자금을 관할하는가’ ‘자금을 운용·배분하는 권한과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가’ 하는 문제였다. 이것을 해명하려면 두 방법이 있다. 하나는 모스크바 외교를 성사시킨 행위 주체, 다른 하나는 자금 제공자인 코민테른과 러시아 정부의 견해를 확인하는 것이다.

모스크바 외교를 처음 실행에 옮긴 주체는, 한국 최초의 사회주의 단체인 한인사회당이었다. 박진순·박애·이한영, 세 사람으로 이뤄진 대표단이 블라디보스토크를 출발한 것은 3·1혁명이 일어난 1919년 7월이었다. 이들은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이용했다. 모스크바에 도착한 것은 그해 11월이었다. 평시라면 10여 일 만에 끝날 여정이 무려 120일이나 걸린 것은 러시아 내전 때문이었다. 적위군과 백위군이 엎치락뒤치락 번갈아 집권하는 탓에 교통과 통신이 평시와는 전혀 달랐다. 그들이 지나야 했던 경유지는 마치 적색과 백색이 어지럽게 뒤섞인 모자이크 같았다.

대표단은 코민테른과 러시아 정부를 상대로 맹렬한 외교전에 임했다. 특히 박진순의 활약상이 두드러졌다. 그는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회의에 참석해 한국 혁명운동을 설명하고, 한인사회당의 코민테른 가입 의사를 밝혔다. 그의 연설은 국제공산당 기관지 1919년 7~8호(11~12월 합병호)에 ‘한국의 사회주의 운동’이라는 제목으로 실렸다. 국외 정기간행물에 한국 독립운동에 대한 기고문이 실린 것은 처음이었다.

러시아 정부기관을 상대하는 외교활동도 활발했다. 그해 12월9일에 열린, 러시아 최상급 의결기관인 제7차 전러시아소비에트대회에 출석한 박진순에게 한국을 대표해 연설할 기회가 주어졌다. 한인사회당 대표단이 러시아 정부 당국에 얼마나 융숭한 대접을 받았는지 잘 보여준다.

소련, 한형권 임정 대사 깍듯이 예우
모스크바에 파견된 한인사회당 대표단 3명(왼쪽부터 박진순, 박애, 이한영). 모스크바 자금의 수령자를 명시한 ‘얀손 보고서’(오른쪽). 임경석 제공/ 임경석 제공

모스크바에 파견된 한인사회당 대표단 3명(왼쪽부터 박진순, 박애, 이한영). 모스크바 자금의 수령자를 명시한 ‘얀손 보고서’(오른쪽). 임경석 제공/ 임경석 제공

동료인 박애와 이한영이 1920년 4월 극동으로 귀환한 뒤에도 박진순은 홀로 남아 계속 외교활동을 했다. 그의 활동은 7∼8월 절정에 이르렀다. 그 기간에 모스크바와 페트로그라드에서 열린 코민테른 제2차 대회에 의결권을 지닌 정식 대표 자격으로 참석했다. 그는 레닌이나 마나벤드라 나트 로이처럼 국제적으로 유명한 사회주의자들이 즐비한 민족·식민지 분과에 소속돼 위원으로 활동했다. 식민지 해방운동 이론과 정책을 수립하는 과정에 머리를 맞대고 참여했던 것이다. 그 분과에서 박진순이 취했던 이론적 견해를 보여주는 글이 있다. ‘위대한 진보’라는 제목으로 민족·식민지 문제에 대한 그의 논리가 드러나 있다.④ 그뿐인가. 대회가 종료된 뒤에는 코민테른 최상급 집행기구인 집행위원회 위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출됐다. 코민테른 역사상 한국인으로 최고위직에 진출한 것이었다.

박진순의 외교활동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또 다른 유력한 외교활동가가 모스크바에 모습을 나타냈다.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파견한 전권대사 한형권이었다. 그가 모스크바에 온 시점은 1920년 5월 말이었다.

상하이 임시정부 국무원에서 모스크바 대사 선임을 논의할 때 애초에 거론된 사람은 한형권, 여운형, 안공근이었다. 이들은 러시아말에 능통하거나, 영어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국무총리 이동휘는 여러 대사를 파견해서는 안 된다고 판단했다. 왜냐하면 세 사람은 임시정부에 참여하는 3대 정치세력의 입장을 각각 반영했기 때문이다. 1919년 10월 통합 임시정부 출범 이후 내각은 3대 정치세력의 연립정부라는 성격을 띠었다. 흥사단이 중심인 안창호 그룹, 임시정부 내 최대 지분을 가진 이승만 그룹, 국무총리 이동휘가 대표하는 한인사회당 그룹이다.

이동휘 국무총리는 외교관 파견이 정치적 안배로 이뤄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3인의 대사를 선임했다가는 외교활동의 단일성을 보장하지 못하고 혼선을 초래할 우려가 있었다. 이동휘 국무총리는 한 사람만 보내기로 했다. 한형권에게만 전권대사 신임장을 부여했다. 한형권이 한인사회당 당원이라는 사실도 판단의 기준이 됐을 것이다. 이미 파견된 한인사회당 대표단과 호흡을 맞춰 일하려면 한형권밖에 적임자가 없었다.

한형권은 러시아 정부의 깍듯한 예우를 받았다. 독립국 대사나 다름없는 대우였다. 러시아 국경을 넘어 들어가자마자 특별차량과 호위병을 제공받았다. 모스크바에 도착했을 때는 역두에서 외무차관 카라한을 필두로 하는 외무 담당 관료들의 영접을 받았다.

러시아공산당의 자금 특별감사

박진순과 한형권, 두 사람은 긴밀히 협력했다. 한 사람은 당 레벨에서 코민테른과 러시아 공산당의 요로를 뚫었고, 또 한 사람은 정부 레벨에서 러시아 외무인민위원부의 관료들과 빈번히 접촉했다. 한인사회당 대표와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표의 ‘콤비 플레이’는 1920년 9월에 마침내 거대한 성과를 거뒀다. 모스크바 자금 1차분 금화 40만루블을 받은 것이다.

두 사람은 궤짝 7개에 나눠 담은 327.6kg의 황금을 갖고서 극동으로 향하는 열차에 올랐다. 제국주의 열강의 봉쇄를 뚫으려면 몽골을 거쳐 북중국 쪽으로 가는 것이 가장 유리했다. 몽골 국경까지 순금 궤짝을 운반한다면 그곳에서 순금 덩어리를 금융자산으로 전환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두 사람이 모스크바를 떠날 때, 정거장에는 카라한을 비롯해 여러 외교관들이 배웅했다. 귀중품 수송을 위해 무장 호위병 4명이 배속된 특별차량을 보냈다.

그렇다면 김립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금화 40만루블의 관할권은 누구에게 있는가? 코민테른 기록에 이 문제를 명시적으로 언급한 문서가 여기저기서 발견된다.

먼저, ‘얀손 보고서’를 보자. 김립 암살 사건으로 모스크바 자금을 둘러싼 분규가 더할 나위 없이 격화되자, 결국 코민테른이 나섰다. 코민테른은 실상을 조사하고 해결책을 입안할 수 있는 특별한 조처를 했다. 특별감사관을 임명한 것이다. 1922년 5월 초순 한국자금문제 감사관으로 선임된 이는 러시아공산당 극동국 간부 ‘얀손’이었다.⑤ 그는 내전 시기에 극동 지역의 안정을 위해 일시적으로 설립됐던 극동공화국 외무부 장관이기도 했다. 그에게는 모스크바 자금에 대한 막강한 권한이 위임됐다. 자금을 받은 한국의 사회주의 단체들을 감찰하고, 잔여금이 있을 때는 몰수할 권한이 부여됐다.

얀손은 자신의 권한을 활용해 폭넓은 조사에 착수했다. 자금의 수령과 집행에 관련된 인사들에게 서면 결산보고서 제출을 요구했고, 필요하면 직접 대면 조사도 병행했다. 예를 들어 얀손은 동료 ‘유린’을 상하이에 파견해 한인사회당 재정 담당자 김철수를 대면 조사하게 했다. 다른 관련자들도 조사 범위에 넣었다. 자금 운용에 흑막이 있다고 의혹을 제기한 사람들도 만났다. 그들을 불러들여 청문회를 열었다. 모스크바의 옛 코민테른 문서보관소에는 당시 작성된 청문 기록 가운데 5종이 남아 있다. 그중에는 한인사회당 책임비서이자 임시정부 국무총리를 지낸 이동휘를 비롯해 외교 대표단 일원이었던 박애의 진술도 있다.

마침내 얀손 보고서가 작성됐다. 얀손의 지휘하에 실무위원회가 3개월간 조사활동을 한 뒤 1922년 8월18일치로 작성한 감사보고서였다.⑥ 문서에는 모스크바 자금 문제에 대한 코민테른의 견해가 담겼다. 그에 따르면 1920년 9월 금화 40만루블의 수령자는 ‘박진순’이었다. 다시 말하면 코민테른 제2차 대회에 출석한 한인사회당 대표자이자, 코민테른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임된 박진순에게 자금이 갔던 것이다. 이는 모스크바 자금의 관할권이 한인사회당과 그 후계 조직인 고려공산당 상하이파에 있었음을 뜻한다.

자금 관할권 가졌던 한인사회당

금화 40만루블의 관리 책임자가 박진순이라는 정보는 또 다른 문서에도 실려 있다. 러시아 외무인민위원부 공문서다. 외무차관 카라한이 작성한 한 전보를 보면, 1920년 9월 러시아 외무인민위원부가 박진순에게 금화 40만루블을 인도했다는 기사가 쓰여 있다.⑦

이제 모스크바 자금 40만루블의 관할권이 누구에게 있는지 명확해졌다. 그것은 논란의 여지 없이 한인사회당과 그 후계 단체인 고려공산당에 있었다. 이는 논란 당사자들의 설왕설래에 의존하지 않고 객관적 기록으로 입증할 수 있다. 코민테른 쪽의 얀손 보고서, 러시아 외무인민위원부의 공문서 등은 한 가지 사실을 지목한다. 바로 한인사회당이었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참고 문헌
① 한형권, ‘혁명가의 회상록: 레닌과 담판, 독립자금 20억원 획득’, 6, 10쪽, 1948년 10월
http://www.kitco.com/scripts/hist_charts/yearly_graphs.plx
③ ‘외국우편위체’, 1924년 1월22일치
④ Пак Диншунь(박진순), Великий Сдвиг(위대한 진보), 1920년 8월, с.1-4, РГАСПИ, ф.495 оп.135 д.22 л.57-60
⑤ Секретарь ИККИ Куусинен(코민테른집행위 비서 쿠시넨), тов Янсону(얀손 동무에게), 1922년 5월11일, с.2, РГАСПИ ф.495 оп.135 д.57 л.13об
⑥ Доклад о результатах работ комиссии по выяснению финансовых расчетов Кор.Ком.Партии / Шанх.организации(고려공산당 상하이파 자금결산규명위원회 결과 보고서), 1922년 8월18일, с.9, РГАСПИ ф.495 оп.135 д.59 л.59-67
⑦ Телеграмма Чита Янсону из Москвы Карахана(모스크바에서 카라한이 치따의 얀손에게 보내는 전보), 1922년 6월2일, с.1, РГАСПИ ф.495 оп.135 д.59 л.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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