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비 내리는 10월의 밤. 경주 배반동의 아담한 동산을 따라 ‘왕의 길’을 오른다. 주위를 둘러싼 짙은 솔밭이 어둠을 한껏 빨아들인다. 그 덕일까. 왕릉의 부드러운 자태가 칠흑 속에 금세 윤곽을 드러낸다. 달빛 좋은 날이면, 훤하게 빛을 뿜는다.
“신라 52대 효공왕은 살아서도 죽어서도 슬픈 왕이에요. 갓난아기 때 아버지 헌강왕이 세상을 떠나고 삼촌(정강왕)과 고모(진성여왕)에 이어 12살 때 즉위했어요. 길가 여인의 몸에서 난 서자여서 외가의 보호막도 없었어요. 재위 16년 동안 견훤과 궁예한테 땅을 빼앗기는 기록만 나와요. 나약한 헌강왕은 운명의 굴레를 짊어지고, 지금처럼 밤비 내리는 날 쓸쓸히 죽어갔을 거예요. 별 볼 일 없는 왕이다보니 능을 찾는 이도 별로 없지요.”
헐리는 전국 고택 옮겨와 ‘수오재’ 지어한옥 고택 ‘수오재’를 세운 경주 지킴이 이재호씨는 이날 20여 명의 여경 기행단을 이끌었다. 구불구불 논두렁이 살아 있는 보문 벌판의 진평왕릉에서 시작한 왕의 길(6길) 기행을 효공왕릉에서 밤비 맞으며 마무리했다. 최근 을 펴낸 그는 제주 올레길이 생기기 전인 1995년에 일찌감치 을 펴냈으며, 2009년엔 을 펴냈다. 자연스럽게 경주 왕릉 전문가가 된 그는 “경주 왕릉 이름 다수가 엉터리”라며 “정직하게 바로잡는 길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책 제목들이 모두 ‘걷는 즐거움’이다.어릴 때부터 이 나무 저 나무, 이 바위 저 바위 보면서 온갖 상상을 했다. 절이나 유적에도 관심이 많았다. 경주는 문화유적이 가장 많은 곳이다. 길을 떠나야 세상도 문화도 만나게 되지 않나. 수오재를 찾는 사람들과 문화유산의 길을 꾸준히 걷고 있다. 그 감동을 글로 담아 썼다.
경주 사람이 아닌데, 경주 지킴이로 인정받는다.경남 의령이 고향이고, 젊었을 때는 서울과 울산을 오가며 지냈다. 1987년 한국문화유산답사회 초대 총무를 맡으면서 전국을 두루 답사했다. 그때 경주에 뿌리내리기로 마음먹었다. 부여도 생각해봤으나 남아 있는 문화유산이 별로 없더라. 경주에서 세 가지 조건에 맞는 땅을 찾아다녔다. 첫째 저녁노을이 아름다울 것, 둘째 문화유적이 가까이 있을 것, 셋째 영원히 개발되지 않을 것.
지금의 수오재가 그런 곳인가.효공왕릉이 바로 옆이잖나. 최악의 개발독재정권이 들어서도 여기는 개발 못할 거다. 툇마루에서 지는 노을의 감동을 맛볼 수 있다. 거기에 솔숲까지 덤으로 얻었다. 뒷동산을 올라가보라. 이런 게 아름다움이고 신비로움이라고 느낄 것이다. 소나무 사이로는 보문 벌판이 한눈에 들어온다.
수오재가 경주의 고택으로 제법 유명해졌다. 다른 지역의 헐리는 한옥을 옮겨와 지었다고 하더라.수오재 터를 정한 게 1995년이다. 그때만 해도 정부나 사회나 사라지는 한옥에 관심이 별로 없었다. 한옥을 살려보자는 생각을 했다. 고택에서 배어 나오는 품격의 미학을 즐기고 싶다는 개인적 욕심도 있었다. 실은 경주에 옛모습 그대로의 고택이 별로 없다. 한옥이래야 최근에 새로 지은 것들이 대부분이다. 1996년에 경북의 구미 제3공단 확장으로 헐리게 된 칠곡 석적면 고택을 맨 먼저 옮겨왔다. 지금의 수오재 사랑채다.
집채가 크고 여럿이다.좋은 고택을 고르느라 발품 많이 팔았다. 마산 노산동의 황부잣집 2채를 그 뒤에 옮겨왔다. 황부잣집을 인수한 교회에서 고택을 헐고 주차장을 만든다 하더라. 이게 수오재의 본채와 별채가 됐다. 2009년에 마지막으로 전북 김제 만경면 곽부잣집 고택을 옮겨왔다. 도로확장부지로 편입돼 철거 통보를 받은 거다. 1815년에 지어진, 200년이 더 된 고택이다. 수오재에서도 가장 큰 공간을 차지한다. 이렇게 4채로, 널찍한 집을 지었다.
왕릉과 문화유산 모두 잇는 길수오재를 어떻게 가꾸고 싶은가.실은 20년 동안 모두 13채를 옮겨왔다. 돈이 없어 그냥 버린 것도 있고 이웃에서 옮겨 짓도록 넘겨준 것도 있다. 고택을 옮겨서 새로 짓는 게 돈도 힘도 훨씬 더 많이 든다. 수오재는 아직 미완성이라, 담장도 마당도 더 가꿔야 한다. 살아서 찾는 무릉도원으로 수오재를 만들고 싶다는 꿈을 꾼다. 죽어서 가는 무릉도원이 아니라, 수오재를 찾는 사람들이 편안하게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은 거다. 그게 무릉도원 아니겠나. 훗날 수오재를 세상에 돌려줄 생각이다. 빈손으로 세상 떠나는 거지.
수오재는 무슨 뜻인가.나를 지키는 집이다. 다산 정약용의 글에서 따왔다. 약한 사람한테 강하고, 강한 사람한테 약한 사람을 보면 분노한다. 나는 약한 사람한테 더 약해지려 하고, 강한 사람한테는 더 강해지려고 한다. 그런 나 자신을 지키고 싶다는 소망을 담았다.
이렇게 탄생한 수오재는 한옥 펜션으로 운영된다. 이미 경주의 대표적인 고택 펜션으로 알려져 있다. 무릉도원을 꿈꾸고 돈 계산에 어두운 그에게 펜션 운영은 영 부담스럽다. 수오재 주인장도 좋지만, 길을 걷는 기행작가로 불리기를 더 좋아한다. ‘경주 길’(왕의 길) 모임을 만들어, 매달 한 차례 왕릉 길을 걸은 지 벌써 10년이 넘었다. 은 그 산물이다.
차제에 ‘왕의 길’을 잘 정돈해 많은 이가 다닐 수 있도록 했으면 좋겠다.경주에는 이미 여러 길이 나 있다. 동남산 가는 길, 서남산 가는 길, 그리고 ‘왕의 길’이라는 이름이 붙은 길도 하나 있다. 그런데 이게 연결돼 있지 않다. 제각각이다. 우리가 걸은 ‘왕의 길’은 왕릉와 함께 주변의 문화유산을 이어 걷는 온고지신의 문화가 풍성한 길이다. 박혁거세 왕릉에서 시작하는 1길부터 동해 문무왕릉으로 가는 11길까지, 신라 왕릉 전체를 걸을 수 있도록 짜놓았다. 잘 살려서 많은 사람이 이용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주변 풍광도 멋스럽겠다.반월성에서 감포 바닷가의 문무왕릉까지 가는 11길은, 걷기에는 무리가 따를 게다. 신문왕릉에서 괘릉을 잇는 6길은 국도를 따라 기찻길을 오가는 어려움이 있다. 하지만 수년 안에 철로가 없어진다니, 곧 사정이 좋아진다. 나머지는 최고의 품격과 문화를 만끽할 수 있는 나무랄 데 없는 길들이다.
김씨와 박씨 문중, 17개 왕릉 나눠 가져영조 6년(1730년)에 일이 벌어진다. 그전까지는 신라 왕릉 중 11기만 이름이 붙어 있었다. 이때 경주 부윤(지금의 경주시장)이던 김시형(경주 김씨)과 박씨 문중이 주도해 추가로 17개 왕릉의 주인을 정했다. 경주의 남산을 기준으로 서쪽 6개 왕릉에 박씨 성을 가진 왕을 새 주인으로 모셨다. 서쪽에는 이미 박혁거세의 오릉이 있기에, 박씨 왕릉을 그쪽으로 몰아서 정한 것이다. 김씨 왕들은 반대쪽인 동쪽 11개 왕릉 주인으로 모셔졌다. 유교 문화에서 문중의 세를 과시하기 위해 족보를 만들고 오랜 조상의 뿌리인 무덤 찾기에 나서면서 벌어진 일이다. 경주 김씨와 경주 박씨 족보는 1680년대에 처음 만들어졌다. 당시 힘도 없고 족보도 만들지 못했던 석씨 문중은 하나의 왕릉도 차지하지 못했다.
신라 왕릉은 현대에 들어 10기의 이름을 더 정했다. 모두 38개의 왕릉이 이름을 갖게 된 셈이다. 56명의 왕을 배출한 신라왕조에서 1~3대와 5~8대, 그리고 말기의 53~55대 10명의 왕이 박씨였다. 김씨는 13대 미추왕에 이어 17~52대와 마지막 56대 경순왕 등 38명의 왕을 배출했고, 초기 4대 석탈해왕과 9~12대, 14~16대 등 8명의 왕이 석씨였다.
엉터리라는 주장을 어떻게 뒷받침하나.영조 당시 경주에 살았던 화계 유의건이 에서 “(박씨 문중과 김씨 문중이 서로 싸우니) 신라의 사람이 지금 살아 있다 해도 기록에 없는 능이 누구 것인지 어찌 알겠소”라고 했고, 다른 문집 에서는 김씨와 박씨 문중의 이해관계에 따라 17개 왕릉의 주인을 정했다는 이야기를 소상하게 적어놓았다. 2010년에는 고 이근직 경주대 문화재학과 교수가 ‘신라 왕릉 연구’란 논문에서 “진짜 왕릉은 27대 선덕여왕, 29대 태종무열왕, 30대 문무왕릉 등 7기뿐이고 나머지는 잘못 알려진 것”이라고 용감하게 주장했다.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이야기해보라.남산 서쪽에 있는 삼릉을 보자. 박씨 성을 가진 8대 아달라왕릉과 53대 신덕왕릉, 54대 경명왕릉이 위에서 아래로 나란히 누워 있다. 아달라왕은 184년에 죽었고, 신덕왕은 730년 뒤인 917년에 죽었다. 700년 전 조상을 찾아 그 아래 묘를 쓴다는 게 있을 수 있나. 박씨 왕릉을 억지로 모으려다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또 선조인 아달라왕이 제일 위에 자리잡았는데, 이것 또한 조선시대에 억지로 짜맞췄다는 방증이다. 신라시대에는 조상 묘를 아래에 쓰고, 후손 묘를 위로 올려가면서 썼다. 도굴된 신덕왕릉을 구제 발굴하면서 확인한 무덤 형식도 맞지 않다. 신덕왕은 신라 말 900년대 왕인데, 무덤은 통일 전 후기인 600년대 양식인 석실분이었다. 신문왕릉 경우를 하나 더 보자. 에 신문왕이 낭산의 동쪽에 묻혔다는 유일한 기록이 남아 있는데, 지금 위치는 엉뚱하게도 낭산의 남쪽이다. 낭산 남쪽에 있는 효공왕릉이 실제 신문왕릉이라고 봐야 한다.
남산의 흉물 묘지 3천 기 정비해야지금이라도 발굴해서 바로잡으면 되지 않나.발굴을 하더라도 알 수가 없다. 삼국시대 왕릉 중 무덤 속에 확실한 기록이 남아 있는 것은 백제 무령왕릉이 유일하다. 왕릉 속에 누구를 모셨다는 기록을 남기지 않는다. 유물을 보고 추정할 뿐이다. 나 의 단편적 기록이 전부인데, 그나마도 없는 왕이 다수이다. 지금 왕릉의 주인이 잘못됐다는 것은 알고 있는데, 진짜 주인을 찾을 길도 없으니 다들 입 다물고 있는 것이다.
그래도 역사의 진실은 분명히 해야 하지 않나.그렇게 생각한다. 확실히 아닌 것은 아닌 것으로 정리하고, 잘 모르는 것은 잘 모르는 대로 설명이라도 해야 마땅하다. 또 하나, 경주 남산의 3천 기 등 마구 쓰인 묘도 차제에 정비해야 한다. 매월당 김시습이 기거했던 남산 남쪽 용장사지 바로 앞에도, 서쪽 창림사지 석탑 안에도 떡하니 흉물스러운 묘를 써놓았다.
경주=글·사진 김현대 선임기자 koala5@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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