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닥토닥.
지치고 상처 입은 마음을 다독인다. 따뜻한 위로가 너무나도 필요한 때. 괜찮다고 다 괜찮아질 거라고 쓰다듬으며, ‘읽는 약’ 그림책을 건네는 이들이 있다. (이봄 펴냄)의 저자 시인이자 그림책작가 이상희, 신문기자 최현미, 출판평론가 한미화, 동화작가 김지은씨. 1월11일 서울 마포구 동교동 미디어카페 후에서 그들을 만났다.
은 그림책 전문가 4명이 어른들에게 권하는 44권의 그림책 이야기다. 기쁨, 사랑, 위로, 성장이라는 네 가지 열쇳말을 중심으로 그에 맞는 그림책을 펼쳐놓고 조곤조곤 이야기를 들려준다.
어른들에게 건네는 그림책 44권어떤 마음일 때 어떤 책을 읽으면 좋을지, 함께 보면 좋은 책은 어떤 것이 있는지까지 세심하게 챙긴다. 읽는 이에게 꼭 맞는 다정함을 건넨다. 저자들은 “세상 사람들이 우리처럼 그림책 때문에 아무 일도 못하게 만들자. 우리처럼 그림책 덕분에 어떤 일도 다 할 수 있게 만들어버리자”라는 모토로 이 책을 썼단다.
그림책이 보여주는 세상은 평온하고 착하고 포근하다. 주인공이 위험에 빠지지만 결국 고난을 극복하고 모든 문제를 풀어나간다. 악한 사람은 반드시 벌을 받고 착한 사람은 복을 받는다. 사이가 안 좋던 이들도 손을 잡는다. ‘선함의 원형’을 보여준다. 이런 세계로 여행하면 마음이 따뜻해진다.
한미화씨는 “그림책은 기쁨의 기억을 불러오는 역할”을 한다고 말한다. 를 보면 두발자전거를 타고 싶어 아빠를 졸랐던 그날이 떠오르고, 는 엄마가 안나에게 정성껏 마련해준 외투처럼 우리에게도 잊을 수 없는 소중한 물건을 떠올리게 한다. 유년의 즐거웠던 날들을, 나를 사랑해준 사람들을 생생하게 되살린다.
“독자와의 만남에서 어릴 적 기뻤던 순간을 기억의 서랍에 채울 수 있어 행복했다고 말한 이들도 있어요. 어떤 분은 엄마 몰래 동생이랑 만화방에 가서 만화 보던 추억이 떠올랐대요. 어떤 분은 ‘삶의 느낌표’를 찾았다고 했어요. 기쁨의 순간을 많이 간직할수록 즐겁고 행복한 날이 많아져요.”
삶의 이력이 각기 다른 저자 4명이 만나는 지점은 그림책이다. 이들의 단체 카톡방 이름은 ‘그림책 선물’. 그들에게 그림책은 ‘인생의 선물’ 같은 존재다. 이상희씨는 병문안을 갈 때 그림책을 항상 갖고 간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아픈 사람들을 위로하는 데 그림책만큼 좋은 선물은 없기 때문이다.
그림책을 선물하는 사람들“병실에서 그림책을 읽어주면 처음에는 당혹스러워하는데 책을 덮을 때는 다들 행복해해요. 자신을 위해 책을 읽어주는 것에 많은 위안을 받고요. 그림책은 모든 사람을 위한 책이에요. 0살부터 100살까지 누구나 즐길 수 있어요.”
김지은씨에게 그림책은 영원한 친구다. 존 버닝햄의 에 나오는 상상의 친구 이름 ‘알도’를 자신의 전자우편 아이디로 사용한다. 책 마지막에 나오는 “언제나 거기 있을 거야”라는 문구는 그에게도 큰 힘을 준다. 나이가 들든, 어려운 순간에든 그림책이 항상 옆에 있어준다는 위안을 받는다고. 그림책이 ‘사랑의 큐피드’ 역할도 했단다.
“남편과 ‘썸’ 타던 시절 작은 분식집에 갔어요. 제가 그림책을 귀하게 안고 있었는데 그게 뭐냐고 묻데요. 그림책이라고 했죠. 김이 모락모락 나는 라면을 앞에 두고 그림책을 읽어줬어요. 절 바라보는 눈빛이 달라지더군요. 주도권이 저에게 왔죠. 결국 그때 일을 계기로 결혼하게 됐어요. 하하하.”
최현미씨는 아이에게 그림책을 읽어주며 그림책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그 아이는 대학생이 됐다. 그림책을 읽으며 함께 성장한 느낌이라고. “아이에게 그림책을 읽어주며 저도 위로받았죠. 어른들도 상처가 있고 말하지 못한 아픔이 있잖아요. 다른 책에서는 받지 못한 위로를 그림책에서 받았어요. 함축된 글과 그림은 상상의 여지가 많고요. 아이들만의 책이 아니죠.”
지난해 책을 만들 당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졌다. 매일 쏟아져나오는 막장드라마 같은 뉴스에 피로감과 스트레스는 커져갔다. 사회적 위로가 필요한 시기였다. 김지은씨는 그림책을 읽으면 “수액을 맞는 기분”이었다. 무해한 인큐베이터 같은 그림책 세상에 들어갔다 나오면 새로운 힘을 낼 수 있었다.
“우리가 살아가며 겪는 슬픔, 상실, 상처를 품어내며 괜찮다고 괜찮다고 다 괜찮다고 토닥여줍니다. 이런 위로가 필요한 순간에 그림책은 상당히 유능한 도구입니다. 그림책이 갖는 기본적인 세계관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린이’로 상징되는 우리 마음의 원형만이 가질 수 있는 선한 시선, 온전한 이해, 완벽한 사랑이 가능한 세계가 그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그림책을 위로의 책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중에서)
그림책은 함축적인 짧은 글과 존재감 넘치는 강렬한 그림으로 긴 생각의 문을 열어준다. 는 온 마음을 다해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에 대한 의미를, 는 벗어날 수 없는 곤경에 빠져 있더라도 그 문을 통과하면 새 삶이 펼쳐진다는 것을 말해준다. 은 사람과 여우가 사랑과 이해로 서로를 품어주는 모습을 보여주며 ‘생은 참 아름다운 것’이라고 다독인다.
어린이책이라는 편견은 그만는 “평범하지만 그 자체의 의미를 발견하고 존중할 때 가장 아름다울 수 있다”는 걸 사실적인 그림과 시적인 글로 전달한다. 는 천신만고 끝에 숲속 연못으로 돌아온 개구리 앨리스가 거듭 새로운 모험을 꿈꾸는 과정을 보여준다. 은 앞만 향하는 시선을 옆으로 돌려 우리 이웃을 보라고 말한다. 참다운 공동체의 삶을 자각하는 존재로 거듭나야 한다고 얘기하는 것이다. 는 죽음과 애도, 치유 과정을 다룬다.
그림책의 상징적인 글과 그림을 이해하기 어려울 때도 있다. 글과 글 사이, 그림과 그림 사이 빈 공간의 의미를 파악하는 게 힘겨운 그림책 초보자들은 책을 어떻게 봐야 할까. 한미화씨는 “글과 그림을 통합해서 보는 훈련이 필요한데, 일단 천천히 읽으세요. 저는 글을 보고 줄거리를 파악한 뒤 그림을 봐요. 그리고 글과 그림을 합쳐 봅니다”라고 조언한다. 그림책은 글과 그림으로 화음을 만들기 때문에 함께 읽어나가야 보이는 메시지가 있다.
김지은씨는 그림책이 ‘복합적 텍스트’이자 ‘종합예술’이라고 생각한다. 그림책의 촉감, 모양 등 어느 하나 허투루 넘길 수 없다. 제목은 책 전체를 하나로 상징하는 것과 다름없기 때문에 본문을 읽기 전 넉넉한 여백을 누리면서 제목의 의미에 잠시 집중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표지와 면지, 속표지, 만듦새의 비밀을 살펴보면서 작가가 지은 그림책이라는 집의 더 깊고 놀라운 지점까지 보면 예기치 않은 즐거움과 의미를 느낄 수 있다.
안타깝게도 그림책을 유아용으로 한정짓거나 동화의 연장선상으로 여기는 편견이 있다. 이런 시선에서 벗어나 그림책을 독립된 예술 장르, ‘제10의 예술’로 인정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커졌다. 쉴라 에고프는 “그림책은 가장 편안하고 친절한 장르인 것 같지만, 사실 어린이문학 전체에서 가장 큰 사회적·미적 긴장을 자아낸다”고 평가했다.
2시간 가까이 이어진 그림책 얘기는 끝날 줄 몰랐다. 자신이 아는 이야기 보따리를 아직 반의 반도 풀지 못한 듯. “다음 시리즈는 , 그다음에는….” “우리는 보물섬을 갖고 있어요.” “마치 거대한 광산을 가진 것 같죠. 하하하.”
“우리는 보물섬을 갖고 있다”못다 한 이야기는 다른 곳에서 이어진다. 출간 기념으로 ‘그림책 처방 진료소’를 마련한다. 4명이 각각 ‘기쁨 내과-다시 만나는 기쁨의 순간’ ‘사랑 내과-숱한 관계 속에 피어나는 사랑’ ‘위로 내과-당신께 전하고 싶은 위로’ ‘성장 내과-우리는 지금도 성장하는 중’이라는 이름으로 동네 책방에서 독자와 만난다. 그림책을 함께 읽고 책에 다 못 담은 이야기를 풀어낼 예정이다.
위로가 필요한 시대, 그림책은 우리 눈 앞 30cm 안에서 펼쳐지는 치유의 이야기다. 책을 읽다보면 마음 한구석이 따듯해지는 순간이 찾아온다. 위로의 친구가 손을 뻗어올 것이다. 쓰담쓰담.
글 허윤희 기자 yhher@hani.co.kr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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