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인 학습과 경험에 기반하는 취향을 데이터화하는 것은 가능할까. 아이튠즈 라디오(사진) 등 개인의 취향을 수집해 추천을 하는 음악 큐레이팅 서비스가 늘고 있지만 여전히 사람의 귀와 손을 빌리는 사이트도 있다. 김진수 기자 jsk@hani.co.kr
가물가물 잠이 막 들려던 찰나 굉장히 좋은 멜로디가 귓가를 간질였다. 깜깜한 어둠 속에서 벌떡 일어나 라디오 옆에 놔둔 메모지와 펜을 들고 디제이가 불러주는 노래 제목을 휘갈겼다. 아침에 보니 종이에는 전원석의 라고 적혀 있었다. 그날부터 라디오를 들으며 이 노래가 나오길 기다리고 기다렸다. 한 달 뒤 운 좋게 이 노래를 들을 수 있었고 나는 주저 없이 녹음 버튼을 눌렀다. 1987년이었고 13살이었다. 그렇게 만든 카세트테이프를 ‘늘어날 때까지’ 듣고 또 들었다.
모바일로 음악을 듣는 것이 일반화된 지금 1980년대 라디오의 추억은 아득하게 멀거나 공상과학(SF)적인 상상력을 자극하는 일화일 것 같다. 하지만 디지털이 에워싼 지금도 우리는 그때처럼 음악을 듣는다. 아이튠즈, 네이버 뮤직, 벅스, 현대카드 뮤직, 카카오 뮤직, 스포티파이나 판도라 같은 온라인 서비스들이 음악 추천 기능에 ‘라디오’란 이름을 붙이는 건 상징적이다. 역사적으로도 라디오는 대중음악과 미디어의 긴밀한 관계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였다. 거칠게 말해 라디오의 등장 이후 텔레비전, 영화, 인터넷, 휴대전화 등과 밀착된 대중음악의 역사는 그 반복에 불과했다. 게다가 지금은 온라인 음악시장의 안정기다. 영국의 저널 (MUSIC WEEK)는 2014년 1분기 미국의 디지털 판매가 전년보다 25.8% 성장했다고 밝혔다. 영국은 20% 증가했다. 인상적인 건 다운로드 대신 스트리밍 수익이 늘었다는 점인데 이런 구조에서 ‘라디오’라 명명된 음악 추천 시스템이 등장한다. 우리는 하루에 적게는 500곡, 많게는 1천 곡이 넘는 신곡이 출시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바꿔 말해 음악이 너무 많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일부만 듣고 마는 것이다. 라디오는 거기서 좋은 걸 골라줬다.
10대도 40대도 ‘주간 톱 100’결국 추천이 관건이다. 흔히 ‘큐레이션’이라 불리는 추천은 온라인 플랫폼 시대에 일상화한 행위다. 뉴스와 엔터테인먼트를 막론하고 추천은 서비스의 필수적인 요소기도 하다. 사이버스페이스에서 역설적으로 중요해지는 입소문, 이미 쇼핑몰과 마케팅 영역에서 시도되던 평판 시스템이 엔터테인먼트 영역으로 이식된 셈이다. 이때 누가, 어떻게 추천하느냐. 산업은 이것을 두 방향으로 접근한다. 사용자 경험의 빅데이터를 활용해 자동화하든가, 아니면 믿을 만한 전문가를 섭외하든가. 요컨대 테크놀로지와 인간의 대립인데, 그 중심에는 ‘가치 판단’이란 이슈가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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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터를 분석하는 방식은 벅스, 네이버 뮤직 등이 활용한다. 그 정밀도는 빅데이터의 규모와 질에 좌우되는데, 스포티파이와 아이튠즈가 이미 활용하고 있다. 하지만 국내 서비스는 그에 비해 만족도가 높지 않다. 시스템보다 환경 탓이고, 각 문화권에서 대중음악이 차지하는 지위의 차이 때문이다. 사실 한국은 취향과 정체성이 거의 무관하게 존재하지만 서양은 인종, 계급, 교육 수준, 지역, 문화적 감수성이 취향과 밀착된다.
어떤 의미에서 한국은 취향 자체가 거의 계발되지 않은 곳이다. 심지어 음악의 양도 절대적으로 적다. 한국의 음악시장은 하위문화와 강력하게 결합된 장르 분화를 기대하기도 어렵다. 그래서 빅데이터를 활용한 자동 추천 시스템도 제 기능을 발휘하기 힘들다. 쉽게 말해, 10대 소녀도 40대 아저씨도 ‘톱 100’이란 음원차트를 공유하고 버스커버스커와 소녀시대와 오렌지캬라멜을 한꺼번에 소비하는 상황에서 자동 추천은 차별화를 제시하지 못한다.
반면 현대카드 뮤직의 ‘투데이픽스’는 사람이 추천한다. 장르에 특화된 5명의 전문가가 매일 특정 테마에 어울리는 10곡을 선곡하는데, 규모는 작지만 대체로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카카오 뮤직도 비슷하다. 구입한 음악을 채팅창에서 함께 듣는 것으로 카카오 뮤직은 우리가 이어폰을 나눠 끼던 경험을 모바일로 확장한다. 이런 방식을 글로벌한 범위로 넓힌 프로젝트도 있다. 폴란드의 한 음악 저널리스트가 운영하는 비하이프(beehype)란 사이트는 전세계 80여 개국의 음악평론가, 저널리스트, 뮤지션들이 자국의 로컬 음악을 소개한다. 비영리 프로젝트로서 영미권이 아닌 곳의 인디 음악에 집중한다.
습관이란 게 무서운 거라지만개인적으로 음악만큼은 학습과 경험이 중요해서 사람의 추천이 효율적이라 본다. 하지만 이것이 과도기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테크놀로지가 점점 인간의 근본적인 영역을 넘보는 시대에 이런 고민은 음악 서비스 이상으로 확장될 필요도 있을 것이다. 분명한 건,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연예인 때문에, 아니면 괜찮은 음악을 들으려고, 혹은 습관처럼 라디오를 튼다는 사실이다. 근본적인 건 변하지 않고 약간의 방식만 바뀐다. 하지만 그건 큰 변화다. 음악 서비스의 미래가 어찌 될지는 모르지만, 뭔가 엄청난 게 오고 있다는 것만큼은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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