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착이 가는 인물은 아무래도 건국의 주역인 정도전 인 것 같아요. (…) 정도전은 40살이라는 늦은 나이였는 데도 현실에 매몰되지 않고 자기 이상을 놓지 않은 채 현 실에 접목시켜 실행해나갔다는 점이 굉장히 멋있죠. 음, 짜증나는 인물은, 그 사람들 입장에선 시대를 잘못 만 난 것일 수도 있지만, 선조와 인조예요. 왜란과 호란이라 는 국가적 대위기를 (…) 대처하지 못한 것만으로도 속상 한데 그 이후에 일을 수습하고 과거를 반성하는 데도 도 무지 치열함이 보이지 않아 실망스러웠습니다.”
자료 수집·콘티·스케치·채색 홀로의 500년 이야기를 20권의 교양만화 에 고스란히 담아낸 (휴머니 스트 펴냄)의 저자 박시백 화백은, 조선시대 인물에 대 한 호불호를 묻는 질문에 이같이 답했다. 1권 ‘개국편’으 로 거슬러 가보자. 삼봉 정도전이 이성계와 만나 도원결 의를 하는 장면. 박 화백은 이를 술 취한 두 사람이 손을 잡은 채 방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는 시퀀스로 묘사했다. 그 만남에서 조선은 비롯되었다.
이처럼 역사적 사건을 시각화해 기억할 수 있다는 것 은 분명 독자들의 복이지만, 지난 ‘사관’의 시절은 저자 에게 ‘고난’이었다. 2077책에 달하는 방대한 을 완독한 뒤, 자료 수집과 콘티, 스케치, 채색까지 혼자 하면서 4천 장, 2만5천 컷의 만화에 실록을 담는 동안 10여 년이 훌쩍 지났다. 500명에 이르는 등장인물 의 캐릭터를 잡는 일도 쉽지 않았다. 초상화나 에 묘사된 특징을 기본으로 그린 것은 극히 일부 에 불과했고, 대개는 자료를 찾을 수 없어 말과 행동, 삶 의 족적을 연구한 뒤 상상으로 그렸다. 신기하게도 그 상 상은 독자의 예상과 거의 일치했다.
“때론 재미가 덜하더라도 정사에 기반해 역사적 편견 과 오해를 바로잡고 싶었다”고 저자는 말했지만, 이 책에 서 재미와 의미는 시종 행복하게 만나고 있다. “조선시대 역사를 전달하는 데 최고의 수작”이면서 번뜩이는 재치 와 위트로 조선사를 깨알같이 풀어낸 역작인 것이다.
선조들이 있어 오늘의 우리가 있다500년 왕조가 저물었던 ‘망국편’의 마지막 장면, 10년 동안의 이야기를 마치며 저자는 이렇게 적었다. “독립투 쟁의 길은 추위와 배고픔, 고문과 투옥, 총살과 교수대, 그리고 가족의 고난과 곤궁이 예정된 길이었다. 그 모든 걸 감당하며 역사 앞에 이름 없이 사라지기를 두려워하 지 않았던 선조들이 있어 오늘의 우리가 있다.”
휴가철 읽을 책을 아직 고르지 못했는가. 그렇다면 다 행이다. 여기, 당신의 휴가를 잡아먹을 이 있다.
오승훈 기자 vino@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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