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민주화 이후에도 부드러운 방식으로 학살이 지 속되고 있다고 생각했다. 공안기관의 위법과 권력 남용, 도시 재개발 철거 현장에 난무하는 폭력과 노동 현장의 구사대 폭력, 빨갱이라고 덧칠해서 특정인을 정치적으로 매장시키고 죽음으로 몰아가는 일이 바로 그것이었다. 즉 나는 학살은 전쟁기에 나타나는 매우 특수하거나 예 외적인 현상이 아니라, 평상시에도 폭력으로 정치적 저 항세력을 완전히 무력화하거나 제재하는 권력 행사의 한 특수한 형태라고 보았다.”
진실화해위원회에 대한 냉정한 평가한국 사회는 오늘도 전쟁 중이다. 현대자동차가 고용 한 용역회사 직원들은 경찰의 묵인 아래 울산 희망버스 참가자들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경남 밀양의 송전탑 공 사를 반대하는 노인들에게 공권력과 한국전력은 폭력과 폭언을 일삼는다. 한국전쟁에서 오늘날의 한국 사회를 연역하는 일이 자연스러워 보이는 이유다. 김동춘 성공회 대 교수(사회학)의 (사계절 펴 냄)는 정전협정 60주년을 맞은 오늘, 한국 사회를 만든 한국전쟁을 어떻게 기억해야 할지 아프게 묻는 책이다.
사실 한국전쟁기 국군과 경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전국 각지에서 국군과 경찰에 의 해 무수한 민간인들이 학살됐고, 억울한 죽음은 전쟁과 반공주의라는 이름으로 은폐되고 억압됐다. 살아남은 유족은 죽음의 진상을 규명해달라고 요구하지도 못했을 뿐더러 오히려 빨갱이로 몰려 연좌제로 고통받아왔다. 저자는 학살 같은 국가폭력 문제를 단지 유족의 고통에 국한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 사회의 인권유린 뿌리이고 한국 정치·사회의 작동 기원이자 원리로 이해한다. 학살 을 기억하고 진실을 규명하는 것은 망자와 유족의 고통 을 해원하는 것만이 아니라, 한국 사회의 인권을 지키는 문제이고 정의를 수립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전작 를 통해 민중의 체험에서 전쟁의 의미를 캐물으며 전쟁의 역사사회학을 시도했던 저자 는, 이후 10여 년 동안 민간인 학살 사건에 대한 진상 규 명을 요구하는 시민단체의 결성을 주도하고, 이에 따라 출범된 진실화해위원회 상임위원으로 ‘외도’했다. 이 책 은 그가 쓴 한국 과거청산운동의 ‘비망록’인 셈이다.
그 비망록에 성과만이 오롯할 수는 없을 터. 저자는 자신이 몸담은 진실화해위원회의 한계에 대해서도 냉정 한 평가를 내린다. 예산과 인력 운용에서 당시 행정자치 부의 지휘·감독을 받아 명실상부한 독립기구로서 역할 을 하기 힘들었고, 조사 결과를 결정하는 위원들이 대통 령과 여야 정치권의 추천으로 구성돼 정권의 성격에 좌 우되고 정치적 분위기에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고 자인한 다. 특히 당시 정치적·사회적 구조와 맥락 속에서 역사 적 진실을 규명해내야 했는데, 조사 인력과 역량 부재, 학살 사실을 기록한 정부 기록의 부재로 실제 조사 과정 은 단순한 진상 규명을 넘어서기 어려웠다고 자성한 대 목은, 그 조직의 산파 역할을 했던 지식인의 아픈 고백 으로 들린다.
한 학자의 양심과 실천의 기록
한국 사회의 현실에 발 디딘 사회과학을 고민했던 한 학자의 양심과 실천을 담은 이 책은, 연구자적 관심으로 시작한 일이 양심적 활동가의 역할로 이어지고, 이것이 다시 공직자의 책임을 낳았던 한 지식인의 보기 드문 인 생 궤적으로도 이채롭다. 저자는 말한다. 학살을 잊지 않 는 것에서 나아가 미완의 과거 청산을 기억하는 일, 그것 이 인권과 정의가 넘치는 세상을 위한 첫걸음이라고.
오승훈 기자 vino@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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