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부터 10년 후에 어떻게 변화될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전자책은 구텐베르크의 위대한 기계를 대체하는 역할이 아닌 보완하는 역할을 할 것이다.”
미국 기자 출신으로 하버드대 도서관장을 지낸 ‘책 전문가’ 로버트 단턴은 그의 책 (2011)에서 전자책의 미래를 이렇게 내다봤다. 전자책의 미래에 대한 예측은 곳곳에서 넘쳐난다. 그는 1950년대 미국 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책을 마이크로필름으로 바꾼 뒤 보관에 실패한 예를 들며, 전자책이 종이책을 완벽하게 대체하기는 힘들 것이라 했다. 실제로 전체 출간되는 책 가운데 20% 가까이를 전자책 형태로 소비하는 미국에서는 진지하게 받아들일 대목일 테다.
권당 800원꼴이라 싸다는 느낌 강해
미국과 달리 전자책의 비중이 전체 시장의 2%에 채 못 미치는 우리나라 출판계에서는 ‘전자책에 대한 우려’가 기우에 가깝다. 오히려 좀처럼 불어오지 않는 ‘전자책 바람’을 걱정할 판이다. 2000년대 초반부터 특수를 기대했던 국내 출판계에서는 꾸준히 성장하고는 있지만 생각보다 몸집이 커지지 않는 전자책 시장이 고민거리 혹은 미개척 분야로 남아 있다.
그런데 최근 국내 전자책 업계에 전례없는 사태가 펼쳐졌다. 국내 대형 출판사인 열린책들의 애플 전용 스마트폰·태블릿PC용 ‘세계문학’ 앱이 출시 나흘 만에 2만 건이 넘는 다운로드를 기록한 것이다. 설 연후 직후 국내 앱스토어에서 최다 다운로드, 최고 매출앱에까지 올라섰는데, 게임이 아닌 전자책이 높은 순위에 오른 건 드문 일로 평가된다.
별다른 인기를 누리지 못했던 전자책 앱이 이렇게 주목받은 건 파격적인 책값 때문이다. 괴테의 , 조지 오웰의 , 도스토옙스키의 등 열린책들이 펴낸 세계문학전집 전부를 149.99달러(약 16만원)에 판매하고 있다. 현재 전자책으로 출간한 51권을 구입할 수 있으며, 저작권 문제가 해결된 작품을 중심으로 매주 새로 펴내 모두 150권 정도를 볼 수 있도록 했다.
정보기술(IT) 업체에 다니는 한아람(32)씨도 세계문학전집을 결제하고 나쓰메 소세키의 를 보고 있다. 1년 넘게 아이패드로 전자책을 봐온 그는 “예전부터 세계문학전집에 대한 동경이 있어 언젠가 가져보고 싶었는데, 싼값에 나와 별 고민 없이 구매를 신청했다”고 말했다. 그는 “솔직히 소유욕만으로 따지면 종이책 전집을 사는 게 더 합리적이지만, 이 전집은 권당 800원꼴이라 싸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고 덧붙였다. 열린책들은 싼값에 전집을 내놓은 이유로 ‘오픈파트너’라는 제도를 설명하고 있다. 앱 출시를 기획한 강무성 열린책들 편집주간은 “솔직히 이 정도로 인기를 끌 줄은 몰랐다”며 “‘오픈파트너’ 방식은 독자들이 전자책으로 변환한 책의 오·탈자 등에 대해 의견을 내는 역할을 하고 앞으로 출시되는 전자책 세계문학전집을 모두 볼 수 있도록 하겠다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페이스북의 ‘오픈파트너’ 페이지에서는 구매자들이 책을 보며 오·탈자나 편집이 잘못된 부분을 지적해 올리고 있다.
‘전자책=싼 책’으로 굳어지면 되레 독
열린책들의 성공은 전자책으로 큰 재미를 못 봤던 출판계에 깜짝 이변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와 비슷한 전자책 형식도 연달아 나오고 있다. 도서출판 세계사는 지난 1월22일 박완서 작가의 1주기에 맞춰 ‘박완서 소설전집’ 앱을 내놓았다. 박완서 작가의 등 모든 작품을 볼 수 있다. 세계사는 작품을 다양한 조합으로 묶어 54.99~94.99달러(약 6만~10만원)에 팔고 있다. 11~22권을 한번에 살 수 있는 값이다. YES24도 비슷한 ‘전집할인’ 상품을 내놓았다. 전용 단말기 등에서 볼 수 있도록 박경리 작가의 와 조정래 작가의 을 담은 ‘박경리·조정래 에디션’을 26만8천원에 팔고 있다. 모두 41권으로 종이책의 절반 값이다. 이밖에 살림지식총서 100권도 종이책의 절반값인 19만9천원에 팔고 있다.
출판사들은 기존 종이책 묶음을 저렴한 값에 내놓는 배경을 이렇게 설명한다. 1년 전부터 앱을 기획했다는 강무성 열린책들 주간은 “출판사 처지에서는 새로운 작가를 발굴해 진입시키기가 힘들고, 출판시장에서는 워낙 많은 책이 쏟아져 나오다보니 새로 출간한 책조차 눈에 띄기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또 “베스트셀러만 계속 잘 팔리고 이미 알려진 작가들만 승승장구하는 상황에서 이미 나와 검증받은 세계문학전집으로 승부를 걸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열린책들은 앞으로 앱을 바탕으로 한 전자책 출판 시스템을 이어갈 계획이다. 강 주간은 “를 쓴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작품을 모두 출간했는데, 곧 베르베르 전집을 모은 전자책앱을 내놓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값싼 전자책 전집’이 늘어나는 것을 우려 섞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이도 있다. ‘전자책=싼 책’이라는 고정관념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경기도 분당에 사는 전업주부 이숙형(45)씨의 경우를 보면 그렇다. 한달 전부터 전자책 읽기를 시작한 그는 “주로 세일하는 소설 등을 중심으로 구매한다”며 이렇게 말했다. “전자책은 종이책보다 종류도 적고 꽂아놓는다는 만족감이 적어 상대적으로 값이 싸지 않으면 선뜻 손이 가지 않는다.”
전자책 시장 어떻게 바꿔놓을지 주목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은 최근의 현상을 두고 “한마디로 (전자책 시장의) 판을 깨는 일”이라고 표현한다. 그는 “일본의 전자책 시장은 휴대전화를 통한 매출이 많은데, 그 가운데 대부분을 만화가 차지한다”며 “전자책 시장을 선점하겠다며 저작권에서 자유로운 고전 등을 덤핑으로 내놓는 건 (출판업계) 모두가 망하는 길로 가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른바 ‘검증받은 책’만 전자책으로 만드는 문화가 장기적으로 새로운 작가를 발굴할 수 있는 여건을 훼손하리라는 지적이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이 지난해 펴낸 보고서를 보면, 국내 서적 출판업의 매출 규모는 2010년 1조4천억원에서 2011년 1조2900억원으로 8% 정도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전자책 시장은 매해 평균 20% 이상 꾸준히 성장하고 있다. 그러나 2004년 7월부터 2011년 12월까지 부가가치세 면제를 받으려고 한국전자출판협회에서 인증을 받은 전자출판물 274만3302건 가운데 순수하게 종이책 단행본이 전자책으로 출간된 건 전체의 5% 미만(10만여 건)에 그쳤다. 전자사전, 디지털 학술논문 등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출판계에서 ‘전자책 보급의 원년’으로 꼽는 올해, ‘전집 열풍’이 전자책 시장을 어떻게 바꿔놓을지에 주목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독자들의 태블릿PC에 꽂힌 전자책이 출판계에 훈풍을 가져다줄지, 아니면 수많은 작가들의 독약이 될지 두고 볼 일이다.
글 김성환 기자 hwany@hani.co.kr사진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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