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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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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 밤바다 너와 함께 걷고 싶다

[레드 기획]버스커버스커 노래에 취해 버스를 타다…엑스포로 포클레인이 분주하고
술집 ‘밤바다’는 문을 닫았지만 검게 일렁대는 바다는 바다
등록 2012-05-16 14:16 수정 2020-05-03 04:26
전남 여수의 돌산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밤바다.

전남 여수의 돌산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밤바다.

전남 여수는 사람을 부르는 도시였다. 1990년대 청춘들은 어느 소설의 첫 문장 “여수, 그 앞바다의 녹슨 철선들은 지금도 상처 입은 목소리로 울부짖어대고 있을 것이다”에 매혹돼 여수행 기차며 버스에 몸을 실었다. 소설 속 자흔이 내뱉은 “여수항의 밤 불빛을 봤어요? 돌산대교를 걸어서 건너본 적 있어요? 돌산도 죽포 바닷가의 눈부신 하늘을 봤어요? 오동도에 가봤어요? 오동도의 동백나무들은 언제나 나무껍질 위로 뚝뚝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 같아요”라는 문장에 기대 여행 경로를 짰을지도 모른다. 1994년 한강이 발표한 단편 ‘여수의 사랑’이다. 18년이 지나고 그 시절 청춘은 중년이 되고, 1990년대생들은 푸른 청춘이 되었다. 2012년 여수는 이제 노래가 되어 우리를 부른다.

“멀어요…10분이면 먼 거예요”

노래 를 담은 버스커버스커의 1집 음반은 3월29일 발매 이후 4월 말까지 7만1342장(가온차트 집계)의 판매고를 올렸다. 발매되고 그 다음주에 곧장 음반 판매 1위를 기록하며 그들은 세이렌의 노래처럼 자꾸만 사람 마음을 친다. 음반 발매에 앞서 3월26일 서울 영등포 타임스퀘어에서 열린 쇼케이스에서 보컬 장범준은 를 쓴 배경을 이렇게 밝혔다. “예전에 여수로 캐리커처 아르바이트를 하러 갔다가 만성리해수욕장 근처 포장마차와 주점 불빛이 너무 은은하고 축제 같고 아름다웠어요. 좋아하던 여자와 같이 오고 싶다는 마음이 들어 그 마음 그대로 빠르게 써내려간 노래예요. 실제로 노래를 만들고 횡설수설 전화도 걸고 그랬는데요. 50살이 되어서 부르고 싶을 정도로 오래오래 부르고 싶은 노래입니다.”

노래에 취해 여수를 찾은 청춘을 만나러 여수로 떠났다. 그곳에는 밤바다를 보며 사랑을 시작하고 실연을 정리하고 누군가의 이름을 자꾸만 불러보고 싶어 하는 이들이 있을 터였다.

5월8일 여수행 버스에 올라탔다. 서울 용산역에서 KTX를 타면 여수엑스포역까지 3시간20분이면 도착한다. 새마을호로는 4시간40분, 무궁화호로는 5시간10분이 걸린다. 남원이며 곡성이며 작은 기차역들을 거쳐 느릿느릿 남도를 향하고도 싶었지만, 종착역의 이름이 너무 삭막하다. 버스는 서울 고속터미널에서 1시간 간격으로 출발한다. 4시간10분을 달리면 여수시외버스터미널이다.

버스는 오전 11시에 서울에 있던 승객들을 오후 3시 여수에 내려놓았다. 터미널 앞에 택시가 줄지어 서 있었다. 만성리해수욕장에 가달라고 말했다. 만성리해수욕장은 여수 시내에서 가장 가까운 바다다. “멀지 않지요?”라고 물었다. “멀어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지도로는 별로 멀지 않던데. 얼마나 걸려요?” “차 타고 10분쯤 가야 해. 5천원은 나올 거여.” 아리송해하는 걸 눈치챘는지 기사는 “10분 거리면 여수에서는 먼 거예요”라고 덧붙였다. 여수의 첫인상은 10분을 30분만큼 길게 사는, 여유의 도시였다.

만성리해수욕장은 검은모래해변으로 유명하다. 백사장처럼 눈부시진 않았지만, 짙은 회색의 자갈과 모래가 반짝이고 있었다. 바닷물은 바로 아래 모래 알갱이를 셀 수 있을 정도로 맑았다. 과연 이름 그대로 ‘고운 물’의 도시다. 드문드문 빈 어선이 커다란 바다에 조각배처럼 걸려 있었다. 파도가 바위에 부서졌다. 비릿한 바다 냄새가 났다. 눈과 귀와 코가 차례로 이곳이 여수이구나, 깨달았다. 유리문에 커다랗게 ‘휴게소편의점’이라고 써놓은 가게에 들어가 맥주와 컵라면을 시켰다. 주인 아줌마가 “김치 좀 내드릴까” 하고 물었다. 김치에서 젓갈 맛이 진하게 났다. 마침내 혀도 이곳이 여수임을 깨쳤다.

여수의 낮은 한적하고도 분주했다. 도시는 엑스포 개장을 나흘 앞두고 조용히 술렁이고 있었다. 시내 곳곳에 포클레인이 움직이고 있었다. 도로 포장을 다시 하고, 새 가로수를 심었다. 아직 제자리에 적응하지 못한 어린 가로수들이 위태로워 보였다. 해변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동네 아줌마들 몇몇만 바위에 붙은 고동이며 게를 부지런히 잡으며 삭막한 풍경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해변 도로에는 횟집이 죽 이어져 있었다. 절반은 문을 닫았다. 거짓말처럼 ‘밤바다’라는 이름의 빛바랜 간판을 단 술집인지 밥집인지를 마주했다. 어떤 정취에 가게 이름을 붙였는지 주인을 만나 묻고 싶었지만, 이곳도 문을 걸어잠그고 묵묵부답이긴 마찬가지였다.

돌산대교 북단 전망대에서 바라본 야경. 돌산대교 조명이 눈부시다.

돌산대교 북단 전망대에서 바라본 야경. 돌산대교 조명이 눈부시다.

바닷가 두 남자 “같이 보고 싶은 사람 있어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일렁대는 여수 밤바다에 대한 갈망은 정작 이 도시에 없는 것일까. 효과가 궁금했다. 여수시청 홍보과 담당자는 “당황스러운 질문”이라며 입을 뗐다. “분기별로 관광객 통계를 집산하기 때문에 노래가 발표된 뒤의 수치는 아직 확인이 불가능하다. 더구나 엑스포를 앞두고 있어 어차피 관광객이 늘고 있기 때문에 노래 때문인지 수치로 확인할 수 없다”고 말했다. 엑스포를 코앞에 두고 시정 업무만으로도 벅찬 가운데, 밤바다의 낭만을 찾는 질문은 무안할 뿐이다.

차를 타고 바다를 따라 돌아다녔다. 돌다 보니 뉘엿뉘엿 해가 지기 시작했다. 돌산읍 평사리 인근 바닷가에서 지는 해를 보았다. 하늘과 바다는 붉고 푸르게 어지러이 색을 섞었다. 수평선에 낀 해무가 천천히 내려오던 해를 쏙 집어삼키고 드디어 밤이 짙었다.

저녁을 먹고 돌산대교 북단 전망대에 올랐다. 낮과는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까만 바다 위로 시내와 항구의 작은 불빛이 총총히 떠 있었다. 조명이 들어온 돌산대교도 환하게 불을 밝히며 수면에 빛을 드리웠다. 몇몇 시민이 산책을 하고 있었다. 도대체 “이 바다를 너와 함께 걷고 싶어, 이 거리를 너와 함께 걷고 싶다”며 바다를 바라보는 자 어디 있는가. 기사를 어떻게 쓰나 하는 압박감이 검은 바다처럼 밀려들었다.

젊은 남자 둘이 옆에 섰다. 서울의 밤거리에선 ‘당신 무슨 생각으로 이 길을 걷고 있었느냐’고 물을 수 없었겠지만 여수에서는 가능했다. 서울에서 온 김기택(31)·조영빈(23)씨는 버스커버스커의 를 듣고 궁금해서 여행을 왔다고 했다.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난 둘은 같은 이유로 여수에서 만난 것이 반갑고도 신기했다. 김기택씨는 다니던 광고회사를 그만두고 오랜만에 생긴 여유를 누리는 중이었다. 김씨는 “주7일제로 일하다시피 했어요. 시간이 생겼는데, 어디를 갈까 궁리를 하다 노래를 듣고 여수 밤바다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죠. 주변에 이 노래를 듣고 여수로 여행하고 싶다는 사람이 많은데, 저를 부러워해요”라고 말하며 손에 쥐고 있던 스마트폰으로 노래를 켰다. 여수 밤바다에서 가 흘렀다. “여수 밤바다 이 조명에 담긴 아름다운 얘기가 있어/ 네게 들려주고파 전활 걸어 뭐하고 있냐고/ 나는 지금 여수 밤바다 여수 밤바다….”

사귀는 사람은 없냐고 물었다. “있으면 혼자 이렇게 왔겠어요?” 두 남자는 오히려 되물었다. 대신 밤바다를 같이 보고 싶은 사람은 있다고 했다. 조영빈씨는 중간고사가 끝나고 일주일 정도 수업이 비어서 내려왔단다. 전화하고 싶은 사람이 없느냐고 물었다. 조씨는 “좋아하는 여자애가 중국에 가 있어요. 전화해볼까, 여수에 왔다고. 전화하면 안 받을 텐데. 지금 잘 것 같아요. 안 받으면 어떡하지?”라며 한참을 망설이다 마침내 전화를 걸었다. 여자는 전화를 받지 않았고, 바닷바람이 조씨를 위로했다. 두 사람은 다음날 오전 여수를 떠난다고 했다. 5월9일 같은 시각, 김기택씨는 부산 밤바다를, 조영빈씨는 해남 밤바다를 바라보고 있을 터였다.

옛날 노래, 20대 여성에게 신선한 노래

를 들은 이들의 평은 두 갈래로 나뉜다. 옛 노래 같거나, 새롭거나. 이에 음악평론가 차우진씨는 “두 가지 평 모두 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는 “버스커버스커의 팬층은 20대 초·중반 여성이 압도적인데, 이들에게 여수 밤바다가 주는 감성이 새로울 것”이라며 “1970~80년대 음악을 들어온 이들이라면 이미 들어온 음악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이후 세대에게는 오히려 신선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다”고 말했다. 더불어 “‘하오체’에 가까운 가사의 말투는 요즘 노래에서 흔히 쓰이는 것이 아니라서 오히려 새롭고 멜로딕한 음율이 반복되고 이것이 가사의 내용, 문체와 조화를 이루며 낭만적인 분위기를 형성한다”고 평했다. 여기에 케이블 채널 Mnet의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 에서 준우승을 차지한 뒤 활동을 전면 거부했던 일 등을 통해 이들 음악이 상업적이지 않다는 이미지가 더해져 더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숙소로 돌아와 내려다본 만성리해수욕장은 까맣게 비어 있었다. 바다에 점점이 불을 밝힌 배들로 바다와 하늘의 경계를 겨우 구분할 수 있었다. 전화를 걸어 아무 말이나 늘어놓고 싶은, 고백하지 못한 사랑은 이제 없지만 그래도 일렁대는 바다는 바다였다. 여수의 검은 밤바다는 그렇게, 소리 없이 가만히 이리로 오라고 삭막한 도시를 벗어나 한번 쉬어가라며, 혹은 잃었던 감성을 되찾으라며 우리를 불러대고 있었다.

여수시 돌산읍 평사리 인근에서 지는 해를 보았다.

여수시 돌산읍 평사리 인근에서 지는 해를 보았다.



밤풍경 좋은 여수 바다
여자만에서 지는 해를 보라
모든 바다가 같겠느냐마는 여수의 바다 또한 그렇다. 여수는 미항으로 유명한 도시다. 밤 풍경이 좋은 여수 바다를 추천한다. 해변의 정취는 취향대로. 다음 할 일은 달려가 전화기를 들고 너와 함께 걷고 싶다고 고백하는 것.

만성리해수욕장
여수시 만흥동. 보기 드문 검은 모래사장이 해변을 이루고 있다. 짚을 엮어 만든 삿갓 모양의 파라솔이 설치돼 있는데, 이국적이다. 버스커버스커의 보컬 장범준은 를 쓴 배경으로, 이곳을 걸으며 축제 같은 불빛을 보았다고 했다. 밤이면 해안가의 횟집들이 총총히 불을 켜고 수평선 뒤로 넘어간 해 대신 바다를 밝힌다.

모사금해수욕장
여수시 오천동. 조용히 사랑을 말하고 싶다면 모사금해수욕장으로 가자. 한적하고 조용한 해변이다. 멀리 광양만 야경이 보이고 광양에서 출발한 외항선 불빛이 밤바다를 비춘다. 만성리해수욕장에서 출발한다면 가는 길도 아름답다. 해안을 따라 난 길로 메타세쿼이아 가로수가 줄지어 서 있다. ‘이 길을 함께 걷고 싶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방죽포해수욕장
여수시 돌산읍 죽포리. 죽포에 제방을 쌓아 방죽포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언덕 사이로 바다가 오목하게 들어가 있다. 길이 300m의 아담한 해변이다. 뒤로는 작은 소나무 숲이 형성돼 있다. 최근에 새로 심은 나무와 200년생 아름드리가 서로 의지하며 숲을 이룬다. 해안가에 카페와 펜션이 있긴 하지만 외지인으로 붐비기보다는 여수 사람들이 더 자주 찾는 곳으로 인적이 드문 편이다. 밤이면 눈앞이 바다와 하늘 구분 없이 새까맣다. 마음이 먹먹해지는 건 단지 검은 바다 때문인 걸까.

여자만
여수시 소라면 사곡리. 구불구불한 리아스식 해안이 아름답다. 여수반도와 고흥반도에 둘러싸여 갯벌로 이뤄져 있다. 순천만으로 더 잘 알려져 있지만 여수 사람들은 바다 가운데 있는 외딴섬 ‘여자도’의 이름을 따서 여자만(汝自灣)이라고 부른다. 여자만에는 해가 완전히 지기 전에 가야 한다. 낙조가 아름다운 곳으로 유명하다. 고백에 실패하더라도 붉은 해가 다독여줄 것이다.

오동도
여수시 수정동. 혹독한 사랑을 겪은 이라면 겨울의 오동도를 찾아라. 동백나무 숲이 형성된 오동도에는 겨울이 끝나갈 무렵부터 동백꽃이 지천으로 핀다. 3월 초면 붉은 송이들이 피처럼 후드득 바닥에 떨어진다. 잔인한 사랑의 끝을 닮은 오동도의 풍경에 새삼 위로받을지 모를 일이다.

여수=글 신소윤 기자 yoon@hani.co.kr·사진 탁기형 선임기자 kht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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