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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편성’에 종말을 고하다

보편 체제 민주자본주의 모순의 ‘돌려막기’ 불가능성을 분석한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 신년호
등록 2012-01-14 11:12 수정 2020-05-03 04:26

‘죽은 자’마저 무덤에서 끌어냈다. 어디서든 지혜를 구해야 한다. 위기는 위기다.
1월7일 발행된 한국판 신년호는 2002년 숨진, 프랑스를 대표하는 비판적 지식인 피에르 부르디외의 글을 1면에 올렸다. 그가 1989~92년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강의한 내용을 묶어 란 제목으로 곧 출간될 책에서 발췌했단다. 부르디외가 주목한 것은 ‘보편성의 독점자’로서의 국가다. 조금 풀어내보자.

보편화의 이면에 ‘박탈과 독점’이 프랑스혁명 당시 한 시골마을에서 작성한 공동 회의록이 발견됐다. 이 지역 사람들은 수천 년 동안 만장일치로 투표를 해온 전통이 있다. 도시의 혁명지도부에서 다수결로 투표 방식을 바꿔야 한다는 명령이 떨어졌다. 그들은 어떻게 해야 할지 고심했다. 다수결에 반대하는 사람도 있었다. 사람들 사이에 편이 갈렸다. 조금씩 다수결이 자리를 잡아갔다. ‘보편적인 힘’이 전통을 제거했다. 보편화의 이면에 ‘박탈과 독점’이 숨어 있었다. 부르디외는 이렇게 지적했다.

“하나의 문화는 그것이 보편적인 것, 모든 이들에게 제공되는 한에서 합법적이다. 보편성을 소유하지 못한 자들은, 보편성의 이름으로 간단히 배제된다. 겉으로는 통합을 수행하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분리를 수행하는 문화는, 그것을 독점하는 이들에게 중요한 지배 수단이 된다. (그에 대한) 비판 자체가 차단된 끔찍한 독점이다.”

부르디외가 말한 ‘국가’의 외연을 ‘세계체제’로 넓혀 보자. 2차 대전 이후 지구촌은 정치민주주의와 시장자본주의를 두 축으로 하는 이른바 ‘민주자본주의’(Democratic Capitalism)를 ‘보편적 체제’로 받아들였다. 분배와 성장은, 평등과 자유처럼 길항관계다. 볼프강 스트리크 ‘막스플랑크 사회연구소’ 소장은 “정치민주주의와 시장자본주의 사이의 모순을 뛰어넘기 위해 1960년대 말 이후 인플레이션과 공공부채, 그리고 민간부채가 차례로 동원됐다”며 “2008년 금융위기는 결국 세 번째 방안의 종언”이라고 썼다.

노동자와 자본가, 시민과 정부, 개인 채무자와 민간은행 간의 싸움은, 2008년 이후 다국적 금융기관과 국가 간의 진검승부로 바뀌었다. 금융기관들은 최근까지도 개별 국가를 협박해 자기들을 구제하도록 요구했다. 하지만 자국민을 희생시켜야 하는 금융시장의 강요를 마냥 받아들일 수 있는 정부는 더 이상 없다. ‘민간’에서까지 ‘부채’를 끌어들였지만, 민본자본주의가 안고 있던 ‘모순’의 돌려막기는 지속이 불가능하다는 점이 명확해졌다. 일국적 차원의 문제도 아니다. 지구촌이 하나다. 우리에게 익숙한 ‘보편성’의 종말이다.

작가 겸 언론인 토머스 프랭크는 ‘우파, 분노를 우회시키다’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대선을 앞둔 미 보수 진영에 “성급한 애도의 인사를 건네는 건 곤란하다”고 지적했다. 2008년 주가 폭락 이후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명백한 실패로 드러나며 곤경에 처했을 때, 사실 저들이 살 날은 얼마 남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2년 뒤 중간선거에서 그들은 이데올로기적 타협은 조금도 하지 않은 채 하원을 장악했다. “월가에 대한 군중의 불만이 워싱턴으로 향하게 하고, 은행에 대한 분노를 정부와 세금에 대한 반발로” 뒤바꿔버린 게다. 4월 총선과 12월 대선을 앞두고 있는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대목이다.

‘호모에코노미쿠스’의 역설

특집으로 꾸린 ‘김정일 이후의 시대’도 흥미롭다. 김보근 편집장은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 사망 소식에 주가부터 걱정하는 ‘호모에코노미쿠스’의 모습에서 “경직된 통일의 개념 자체를 변화시킬 잠재력”을 포착해냈다. 그는 “그들이 가진 이기적인 태도가 건전한 방향으로 유도된다면, 국가 이데올로기로 경직화한 통일론에 활력을 줄 수 있다”며 “호모에코노미쿠스의 솔직함은 남북한이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이익이 되는 새로운 통일론을 마련하도록 요구하는 출발점을 제공할 수도 있다”고 내다봤다. 역설이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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