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밥만 먹고 살기에 너무나 욕심이 많은 존재다. 가끔은 하필, 가끔은 운 좋게 사람으로 태어났다고 생각하는, 사람으로 태어난 난 이상하게도 밤만 되면 고픈 것이 너무나 많다. 쓰디쓴 커피, 노곤한 목욕, 쫄깃한 수다, 달달한 초콜릿, 열정적인 댄스, 짜릿한 술 딱! 한 잔 등등. 그리고 어쩌다 한 번씩 문화를 느끼며 고상해지고 싶은, 달빛을 받으며 센티해지고 싶은, 뜬금없는 충동에 휩싸이곤 한다. 그럴 때마다 난 라인이 드러난 트레이닝복에, 폭신한 에어가 달린 운동화를 신고 유유자적 집을 나선다. 경쾌한 발걸음으로 향하는 곳은 대한민국 예술 1번지, 바로 예술의전당!
서울 지하철 3호선 남부터미널역에서 도보 10분 거리에 위치한 예술의전당은 물론 낮 시간에도 멋진 곳이다. 오페라하우스에서, 한가람디자인미술관에서, 카페 모차르트 곳곳에서 예술과 조우할 수 있으니. 하지만 솔직히 오페라는 비싸다. 전시회는 관심사인 것 외에는 낯설어 잘 찾지 않는다. 카페 모차르트에서 파는 맥주와 소시지는 여느 동네 치맥집에서도 만날 수 있다. 하지만 밤 시간의 예술의전당은 비싸지도, 낯설지도, 그렇다고 절대 흔하지도 않은 매력적인 구석을 가지고 있다.
음악 분수. 낮과 이른 저녁(평일 12~1시, 6시30분~8시)에도 분수쇼는 열리지만, 은은한 달빛이 빛을 발하기 시작하는 밤 10시께 시작되는 분수쇼가 장관이다. 달빛에 화려한 조명이 더해지며 물속에 몸을 숨긴 총 56대의 펌프가 하늘 높이 솟아오른다. 그와 동시에 음악(클래식에서부터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OST까지 다양한 종류의)이 짜잔 울려퍼지기 시작한다. 너울거리는 무지갯빛 조명과, 그때그때 울리는 음악에 맞춰 펌프에서 자유자재로 만들어내는 난초 모양의 분수, 안개 모양의 분수, 발레 모양의 분수. 음악의 하이라이트마다 가까이 다가가면 플룸라이드를 탄 듯 흠뻑 몸이 적셔질 만큼 시원하게 펑 터져나오는 물줄기.
분수대 앞에 널따랗게 펼쳐진 인공 잔디밭 한구석에 자리잡고 앉아 때로는 아메리카노 한 잔, 때로는 맥주 한 캔과 함께 그 광경을 감상하노라면 ‘아, 이게 여유구나’ ‘아, 이게 행복이구나’라는 생각이 뜨거운 물속에 찻잎이 번지듯 아지랑이처럼 자연스레 피어오른다.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절로.
그 순간만큼은 김태희도, 손예진도, 며칠 전 술집에서 주민등록증을 보여달랬다고 자랑질을 해대던 초절정 동안 친구도 부럽지 않다. 왜? 음악을 듣는 귀, 분수쇼를 담는 눈, 시원한 물줄기와 바람을 느끼는 살결, 평소 잠잠하기만 했던 전신의 모든 감각이 살아 움직이니까. 게다가 그윽하게 비춰주는 달빛 때문에 마치 아름답고 경외로운 예술가가 된 듯 야릇한 기분마저 든다.
프랑스의 어느 사색가가 말했다. 예술은 산책에서 태어나고, 산책을 통해 전신의 감각이 예리해진다고. 그 말을 살짝 바꿔보자. 예술혼은 밤늦은 시각에 꿈틀대고, 그래서 찾아간 예술의전당의 음악과 분수쇼를 통해 전신의 감각은 예리해진다, 라고. 그러다 보면 가끔 풀리지 않던 문제의 해답이 은근하게 떠오르기도 한다고! 괜스레 고상해지고 싶은, 센티해지고 싶은 여느 밤 연인 혹은 친구와 함께여도 좋지 않을까. 작은 행복은 항상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정수현 저자
*‘밤이면 밤마다’는 밤에 하면 더욱 재밌는 일들을 소개하는 칼럼입니다.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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