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멍 때려도 출판사는 돌아간다



모든 일에 전문가가 될 수는 없는 법… 잔뼈 굵은 프로들이 포진한 외주업체와 친구가 돼라
등록 2010-06-16 20:39 수정 2020-05-03 04:26
창업 뒤 2년 동안 갖춘 외주 시스템의 제작 라인은 우리 출판사의 가장 큰 재산이다. 우리 출판사의 책을 찍어주는 고마운 인쇄노동자들. 김보경 제공

창업 뒤 2년 동안 갖춘 외주 시스템의 제작 라인은 우리 출판사의 가장 큰 재산이다. 우리 출판사의 책을 찍어주는 고마운 인쇄노동자들. 김보경 제공

1인 출판. 단어 자체에서 고독감과 외로움이 넘치지만 사실 출판이란 굉장히 많은 사람과의 커뮤니케이션이 필요한 일이다. 대형 출판사의 편집자가 작가·삽화가·사진작가·교정자·디자이너·마케터 등과 함께 일한다면 1인 출판사의 편집자 겸 대표는 덧붙여 출력소·인쇄소·제본소 등 제작처 담당자, 서점 MD, 정산 담당자 등과도 주기적으로 연락해야 한다. 편집 외에 제작·영업·경리 업무까지 혼자서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소규모 출판 창업을 시작하는 사람에게 요구되는 능력은 기획·편집 능력보다 오히려 타인과의 소통 능력일지 모른다.

잡지 기자였던 1990년대 중반, 회사 내에 있던 사진팀·미술팀이 회사에서 분리돼 나갔다. 워크아웃 바람이 거셀 때였다. 선후배와 동기가 갑자기 외주업체의 직원이 됐다. 이전엔 일 진행에 문제가 생기면 ‘선배랑 다시 얘기해봐야겠네’라고 생각했는데, 이 시기가 지나 입사한 후배들은 “어차피 우리가 클라이언트잖아요”라는 불만을 쉽게 입에 올렸다. 클라이언트? 낯선 단어다.

지난 몇 년 사이 1인 출판이 활성화된 바탕에는 외주제작 시스템의 정착이 한몫했다. 예전처럼 제작 부서가 전부 회사 내부에 있고 회사 총판 조직을 통해 영업하는 시절이라면 1인 출판사가 감히 출사표를 내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소규모 출판사에 축복과 같은 외주제작 시스템에서 출판사는 외주업체의 클라이언트가 되기보다 가늘고 길게 함께 가는 동지가 돼야 한다.

창업을 결심한 뒤 첫 책을 내기까지 2년 동안 많은 외주업체를 만나고 다녔다. 견적도 받고 우리 회사의 목표도 전했다. 견적은 대체로 비슷하게 나왔고, 액수가 지나치게 높거나 낮아 뭔가 다른 속셈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곳은 아웃시켰다. 이렇게 초기에 갖춘 제작 라인이 대부분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으며, 이들은 우리 출판사의 가장 큰 재산이다. 언젠가 1인 출판 예비 창업자들을 상대로 내 경험을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의 주제도 ‘사람이 소중하다’였다.

외주 시스템이 고마운 이유 중 하나는 그 분야에서 잔뼈가 굵은 프로들과 가난한 출판사가 함께 일할 수 있다는 것이다. 부자는 부자들끼리만 놀고 가난뱅이도 기왕이면 부자랑 친구 하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건만! 내가 보답하는 방법은 그저 힘닿는 대로 꼬박꼬박 현금으로 제작비를 입금하는 것뿐이다. 제작비를 줄이기 위해 디자인이나 교정을 혼자서 하는 1인 출판사도 있다. 하지만 멀티태스킹과는 거리가 먼 능력 부족자인 나로서는 그 시간에 기획과 편집에 공을 들이는 편이다. 선택과 집중! 전문적인 일은 프로에게 맡겨야 완성도가 높아지고 그래야 책에 대한 독자의 신뢰가 높아진다.

창업 전에 만난 한 영업자는 기본적인 출판 용어조차 못 알아듣고 ‘멍 때리고’ 있는 나를 보고 혀를 찼다. 하지만 기자일 때도 지금도 ‘나는 전문가가 아니야. 일 잘하는 전문가랑 일하면 되는 거야’라고 생각한다. 모르면 배우고 일의 흐름이 끊이지 않게 중간에서 조절만 잘하면 되는 것이다.

나는 외주업체 사람들에게 늘 우리 출판사가 ‘가난한 출판사, 동물 전문 출판사, 재생지를 고집하는 출판사’라는 사실을 주입한다. 출판사의 정신만 공유해도 제작 과정의 마찰을 줄일 수 있다. 디자이너는 가난한 출판사에 무리한 후가공(글자를 별색으로 박는 등 돈이 많이 드는 제작 후반 작업)을 고집하지 않고, 저작권 에이전시는 외국 출판사를 설득해 선인세를 깎고, 인쇄소는 재생지 사용으로 불만이 많아도 그러려니 한다. 외주업체를 출판사의 지원군으로 만드는 비결은 내가 아는 것보다 더 많이 아는 체 않고 전문가인 그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 외주업체끼리 가격경쟁이 있어도 적은 돈 아끼려다 함께 일할 좋은 파트너를 잃지 않는 것 정도다. 부자 출판사야 뛰어난 외주업체 여럿과 일하니 언제라도 대체 업체가 있지만, 가난한 출판사가 출판사 정신까지 나누며 오래 일한 외주업체를 잃으면 그보다 큰 손실은 없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외주업체 직원에게 이런 말을 듣고도 바보처럼 벙긋거린다.

“책공장 대표님, 이제는 아실 때도 됐잖아요.”

김보경 책공장더불어 대표

<font color="#006699">*‘출판창업 함부로 하지 마라’ 연재를 이번호로 마칩니다.</font>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