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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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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리꾼들) 니네 힘들지, 재범이도 힘들거야”
“우리 사회가 과연 근대사회냐는 회의가 든다”

‘박재범 사태’ 둘러싼 누나팬 임지은-평론가 차우진 대담…
“근거 부족한 국가주의에 의한 사회적 타살”
등록 2009-09-17 13:38 수정 2020-05-03 04:25

박재범을 좋아하는 팬과 아이돌 그룹을 눈여겨보아온 평론가가 만나서 대화를 나눴다. 차우진씨는 음악평론가 가운데 드물게 아이돌 그룹에 대한 지속적인 비평을 해왔다. 그리고 블로거 임지은(Naizo)씨는 2PM, 특히 박재범의 팬이다. 30대 누나팬인 임지은씨는 자신의 블로그에 박재범을 옹호하는 글을 올렸다 댓글의 맹폭도 당했다. 차 평론가는 2PM의 7명 멤버 중에서 일곱 번째로 재범이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임지은씨

임지은씨

사회= 우리는 왜 연예인에게만 분노할까? 21세기 민족감정은 유명인을 통해서 분출될까?

임지은(이하 임)= 연예인은 사람인데 상품이고, 게다가 만인에게 노출돼 있다. 그것이 그들의 비애다. 누가 국위 선양을 하려고 연예인 됐겠나? 상황을 바꿔서 생각해보자. 미국에서 활동하는 한류 스타가 미니홈피에 미국인 마음에 안 든다,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썼다. 시쳇말로 턴다고, 네티즌이 그것을 찾아서 돌렸다. 그리고 미국 대중이 그에게 야유를 보낸다. 게다가 그가 현지 기획사에서 보호받지 못하고 돌아오면 어떨까. 한국인들이 기꺼이 용납할까. 내보내는 사람이 있으면 들어오는 사람에게도 관용이 있어야 한다. 어쨌든 한국 사회는 점점 세계화되고 국외자가 많아질 텐데, 이런 일이 계속되는 건가 하는 좌절감이 든다.

차우진(이하 차)= 국가와 나를 동일시하니까, 한국을 욕하는 것이 나를 욕하는 것이 된다. 미국도 애국심이 강한 나라다. 그래도 미국은 강대국이니까 애국심의 근거가 있다. 하지만 한국은 삶의 만족도가 낮은데도, 만날 사는 게 짜증난다고 하면서도 외부에서 욕을 하면 감성적으로 대한다. 근거가 부족한 국가주의다.

임= 블로그에 글을 쓰자, 응원도 있었지만 공격하는 댓글도 많았다. 여기엔 마음껏 공격해도 되는 키워드가 있다. 군미필자, 빠순이, 빨갱이. 빠순이가 뭐라는 거야, 실드 치지 마 하면 논의가 원천봉쇄된다. 억울한 빠순이로 얘기를 하자면, 쓸쓸하게 쫓겨간 재범이도 불쌍하지만 나는 내가 너무 불쌍하다. 아무리 스타가 밉상인 짓을 했더라도, 팬들에게 그의 행동을 판단할 시간과 선택의 기회가 주어졌어야 한다. 그런데 언론과 대중의 더러운 직거래 때문에 기회가 차단됐다. 지금은 인권이 침해됐다고 느낀다.

사회= 논란에서 출국까지, 정말로 순식간에 진행됐다. 오홋 냉담한 JYP, 소속사를 원망하는 목소리도 있다.

차= 소속사보다 먼저 문화방송이 내쳤다. 출연하던 프로그램에 못 나오게 됐으니까. 민족·국가, 이런 코드는 건드리면 수습을 못한다고 관계자들은 그동안의 학습을 통해서 알고 있는 것이다.

임= 어느 블로그에서, 인디언밥으로도 사람이 죽는다는 얘기를 읽었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당시에 나도 많이 울었다. 사회적 타살에 나도 한몫을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다. 그런데 벌써 한국 사회는 사회적 타살이 여러 형태로 나올 수 있다는 걸 잊고 있다. 괘씸죄도 경중이 있는데, 최소한 그것을 구분할 마음이 없다. 가수로 데뷔하기 전의 일이고 개인적인 경험에서 나온 사회적 불만을 토로했을 뿐인데, 이런 취급을 받는 것은 가혹하다. 밉상은 밉상이고 괘씸죄는 괘씸죄일 뿐이지, 퇴출까지 당해야 하나. 나로선 밉상과 추방이 어떻게 곧바로 연결되는지, 그 간극을 메울 회로가 없다.

차우진씨

차우진씨

차= 사적인 공간에 그런 말을 썼다고 퇴출당해야 한다는 주장이 공감을 얻는 사회가 과연 근대사회냐는 회의가 든다. 분열증이 느껴진다. 어떤 블로그에 들어가니 메인에 고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 추모글이 올려져 있었다. 그런데 글을 보니까 온통 박재범에 대한 분노도 아니고 증오가 넘쳤다. 거기에 응원 댓글이 줄줄이 달렸다. 이 문제는 이 문제고, 저 문제는 저 문제인 거다. 이런 일이 올해 동시에 벌어져 더욱 상징적이다. 전직 대통령들의 서거와 최진실씨 사망을 통해서 사회에 반성의 기운이 일었다. 여기서 사회가 뭔가 배우겠다 싶었다. 그러나 지역주의 타파 같은 전근대성을 극복하겠다는 정신을 잇겠다는 사람들의 일부가 여전히 이렇다니, 아직도 중세다 싶다.

임= 시애틀은 한국이 아니기 때문에.

사회= 박재범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이 문제가 민족주의가 아니라 도덕주의 문제라고 말한다. 미국인이 한국에서 상도덕에 어긋나는 행위를 했으니 나가라는 것이다.

임= 비판자들이 인터넷에 글을 쓰면, 흔히 ‘나는 박재범을 잘 몰랐지만’ 하면서 시작한다. 이들이 2PM의 음반을 샀을 리 만무하다. 소비자운동은 약자인 소비자를 보호하고 제조사의 태도 변화를 요구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이번 사태로 상품이라는 이름의 연예인만 쫓겨갔을 뿐이지, 회사의 구조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연예인은 냉장고와 다르다.

차= 미국에서도 부시를 욕한 음악인에 대한 비판과 욕설이 있었다. 그러나 반대의 핵심적 방법은, 방송에 압력을 넣어서 그들의 음반을 틀지 않게 만들고 레코드 가게 앞에서 피켓 시위를 하면서 불매운동을 펼치는 것이었다. 이렇게 상업적 복수를 하면 되는데, 한국에선 도덕으로 접근해버린다. 도덕의 기준도 모호하고 자의적이다.

사회= 재범이는 아직 창창한 나이인데 무슨 인생을 망쳤느냐, 유난 떨지 말라는 시선도 있다.

임= 요즘 20대들 얼마나 힘들면 저럴까, 서글픈 감정이 든다. 이렇게 말하고 싶다. 야, 니네 힘들지, 나도 힘들어, 쟤(재범이)도 힘들 거야. 인생의 목표를 외부적 요인으로 빼앗겼을 때 얼마나 힘든지 짐작이 가지 않느냐.

사회= 교포라는 정체성이 사태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임= 그를 이해하는 처지에서 말하자면, 재범이는 경계인이다. 나는 미국인인데 왜 미국인이 아닐까, 나는 한국인인데 왜 한국인이 아닐까, 고민하지 않았겠나. 그것을 생각하면 애잔한 마음이 든다. 사실 팬들은 ‘마이스페이스’의 문제가 된 글들을 예전에 보았다. 나도 지난해 10월에 봤는데 그저 녀석 입이 걸구나, 그때 참 힘들었나 보다 생각하고 넘겼다.

차= 최근에 아이돌 현상을 보면서 아이돌을 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변해서 좋았다. 1990년대와 달리 이제는 아이돌을 사람으로 보는구나 생각했다. 소녀시대를 보면서 저 어린 것들이 저렇게 고생을 하네, 하는 시선이 느껴졌다. S.E.S 시절엔 방송에 나와서 한 번 웃으면 크게 버는 데 무슨 문제야, 이런 시선이 강했다. 최근엔 동방신기 사태도 인권 문제로 얘기한다. 그런데 이번 사태를 보면서 다시 느꼈다. 사람으로 보는 아이돌이 있고, 아닌 아이돌이 있구나. 구분이 있구나. 가녀린 애들에겐 관대하나, 내게 눈을 부라릴 것 같은 애들에겐 냉혹하다. 내가 돈줄을 쥔 소비자고 너는 상품일 뿐인데, 감히 나한테 대드냐 하는 태도도 있다.

임= 팬들이 악에 받친 것처럼 보이는 이유가, 기획사를 믿지 못해서다. 토사구팽은 아이돌 시장의 유구한 전통이다. 그래서 최후의 보호자 심정으로 악에 받쳐서 감정적인 댓글을 달면 사태는 더 악화된다. 인터넷 용어로 ‘빠가 까를 양산한다’고 하더라. 사실 팬으로서 2PM에게 어려운 시기가 올 것이란 생각을 했다. ‘짐승돌’이란 이름에서 보듯이 정말로 2PM은 자기 검열을 하지 않았다. 마음대로 노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우리는 대리만족을 느꼈다. 하지만 그것이 부메랑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베테랑 기획사의 아이돌은 매뉴얼을 외운 것처럼 행동한다. 사실 그 소속사에 2PM만 한 개성을 가진 아이돌이 없어서 그랬을까. 이런 식의 구설에 휘말리면 끝장이란 걸 학습을 통해 알고 있으니까, 인형같이 표백시키는 거다. 그들에게 조금만 더 자유를 주면 우리도 더 많은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데, 그게 아쉽다.

차= 마지막으로 언론 문제를 반드시 지적하고 싶다. 애초에 발단이 잘못됐다. 누군가 ‘Korea is gay’라는 원문에서 ‘gay’가 ‘역겹다’냐 ‘이상하다’냐는 논란에서 보듯이, 오역 논란이 있는데도, 공적 영역으로 퍼나른 인터넷 언론이 있었다. 원본은 사라진 상태에서 복사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재생산됐다. 어찌 보면 거대한 해프닝 같다.

사회·정리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사진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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