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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적인, 한국적인 674층 건물도시

SF 정치소설 <타워> 작가 배명훈… “요즘 상황은 불쌍한 작가들에게 소설 영감을 던져준다”
등록 2009-06-25 16:43 수정 2020-05-03 04:25

674층 높이에서는 해가 몇 초쯤 늦게 질 것이다. 그 계산은 과학자가 할 것이다. 위로 2408m 죽 뻗은 도시에서는 일출·일몰 예보를 층별로 해야 하리라. 그 예보는 기상청이 알아서 해줄 것이다. 674층, 2408m까지 뻗은 도시에 살면서 아래로 굽어보다 보면 바닥에서 위로 올려다보는 게 어색해지기도 할 것이다. 이제 소설가가 입장할 때다. 소설가 배명훈(31)은 (오멜라스 펴냄)에서 그렇게 사는 많은 사람들이 ‘저소공포증’에 시달릴 것이라고 말한다.

SF 정치소설 <타워> 작가 배명훈

SF 정치소설 <타워> 작가 배명훈

제목인 ‘타워’는 ‘빈스토크’(Beanstalk)라는 도시이자 나라이자 건물이다. 674층, 2408m 높이의 건물에는 50만 명이 거주한다. 이동 수단은 엘리베이터다. 라인 하나가 20~30층을 오르내리는데 터미널에 가면 100층 이상의 장거리를 갈 수 있다. 이 도시에서는 수직파와 수평파의 정치적 대립이 있다. 수직파는 기계설비(엘리베이터)를 중시하고, 수평파는 하역작업을 주로 하며 노동을 중히 여긴다. 고위층은 고위층, 최고위층은 최고위층에 산다. 엘리베이터 개발과 관련해 부동산 가격이 들썩인다. 에 실린 6개의 단편은 빈스토크를 무대로 미세권력지도를 그리고(‘동원박사 세 사람_개를 포함한 경우’), 저소공포증에 시달리는 소설가가 로봇의 눈을 통해 지중해를 보고(‘자연예찬’), 타클라마칸 사막에 떨어진 옛 연인을 위성지도를 통해 찾고(‘타클라마칸 배달사고’), 수직파와 수평파 사이의 위험한 사랑이 펼쳐지고(‘엘리베이터 기동연습’), 이주노동자가 시위 진압용 코끼리의 똥을 치우고(‘광장의 아미타불’), 이웃의 테러 진압을 위해 동분서주한다(‘샤리아에 부합하는’).

빈스토크의 조물주를 만났다. 도시를 만들고 거주자에게 생명을 불어넣었다. 배명훈은 이 첫 소설집으로, “박사라는 호칭을 주는 박사학위 논문처럼, 자신에게 소설가라는 호칭이 비로소 부여”된 것 같다고 말한다. 책은 6월5일 나왔으니 따끈따끈한 소설가다.

공상과학(SF) 소설가로 불리지만, 그 역시 SF랑은 어색한 사이다. SF 소설가가 흔히 그렇듯 SF 마니아도 아니었다. “문단의 밖인데, 장르의 안도 아니에요.” 자기가 쓴 소설이 굳이 SF로 분류될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대학신문에서 단편부문 우수상(2004년)을 받은 ‘테러리스트’ 심사평 때부터 SF가 운운됐다. 원체 이런 분류가 마음에 안 든다.

“SF라는 말이 왜곡돼 있으니까요. 장르문학이 특수문학이라고 하는데, 일반적인 주제를 마음껏 다루잖아요. SF가 로봇의 싸움 등 기법의 문제일 순 없지요. SF의 고전이랄 만한 작품 어디가, 기법의 문제인가요. 인간 일반의 문제지요. 그리고 SF는 대중소설이라는 낙인이 찍혀 있어요. 그런데 돈을 벌 거면 SF 소설을 안 써야 하는 것이 현실 아닌가요. ‘장르적인 기법’이라는 말도 그래요. 장르가 기법으로 만들어질 순 없으니까요. 장르가 쌓아온 미학은 어떤 소설에도 사용할 수 있는 미학입니다.”

이미 ‘순수’로 분류되는 소설들에서 ‘백색의 순수’는 찾기 어려운 시점이 됐다. ‘순수’의 누군가는 환상 기법을 쓰고, 누군가는 추리를 끌어오며, 누군가는 시간을 뛰어넘는다. 이런 작품은 기법만 장르‘적’인 소설인가, 장르 자체를 허무는 소설적인 격변인가, 궁금하다.

<타워>

<타워>

굳이 배명훈의 소설이 SF로 분류된 것은 기질에서 나왔다. “하나의 관점이나 변수를 잡고 그것을 확대해보는 걸 즐깁니다. 는 고층 건물 이야기인데, 일반적인 고층 건물의 상식 범위를 넘어서도록 했죠. 그러고 나니 마구 상상력이 솟아나기 시작했어요.”

이 세상에 없는 건물에서 일어나는 일이지만, 3차원(물론 지구상이 3차원이다. 그러나 불룩 솟은 이 거대한 y축은 지상의 땅꼬마 같은 건물들을 ‘평면’적으로 만들어버린다)을 작동시키는 방식은 아주 인간적이다. 아니 더 적나라하게 인간적이다. 이 적나라함은 한국적이다. 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이름은 모두 한국식이다. 지극히 한국적인 능청스런 유머가 배명훈 소설의 골자다. ‘동원박사 세 사람’의 첫 문장은 “어떤 술은 화폐로 통한다”이다. 술이 화폐처럼 유통되는 것을 북위 33도에서 38도에 대략 걸쳐진 어떤 나라의 풍습 이외에는 들어본 적이 없다. 대한민국 현실의 감동은 소설에 그대로 옮겨진다. ‘타클라마칸 배달사고’에서는 빈스토크로 떠난 여자를 잊지 못해, 한 남자가 자신의 나라를 떠나 빈스토크 공군에 지원한다. 남자는 타클라마칸에 추락하고 만다. 타클라마칸 사막에 한 점이 된 남자를 찾는 프로젝트가 ‘집단지성’의 힘으로 믿을 수 없는 속도로 수행된다. 같은 단편에서 작가는 ‘파란 우편함’이라는 우편 시스템을 소개한다. 우편 배달 업무를 하는 사람을 따로 두지 않았는데도, 엘리베이터를 오고 가는 사람들에 의해 적어도 94%의 우편이 이틀 안에 정확하게 배달된다.

=‘타클라마칸 배달사고’는 지난해와 올해 우리 사회에서 본 것 중 가장 감동적인 장면을 옮긴 것입니다. 동기 없는 집단지성의 힘, 감동적이었습니다. 누군가는 블로그에 “이 작가는 등장인물은 냉소적으로 그리면서 네티즌에게는 무한한 신뢰를 보낸다”고 뭐라고 그러더라고요. 사람은 변한 것 같아요. 그런데 질문은 변하지 않아요. 참여했던 사람들은 서로 너는 왜, 라고 묻지 않습니다. 동기를 묻는 질문 방식 자체가 모더니즘적이죠. 질문 방식 자체가 바뀌어야 합니다.

-독특한 유머가 당신 소설의 큰 장점입니다.

=어려운 이야기를 할수록 유머가 필요합니다. 비판적인 이야기일수록, 메시지가 강할수록요. 우리 세대의 방식이 심각하지 않습니다. “당신들 이상하다. 웃긴다” 그런 식의 감성이죠. 지금의 상황 자체도 유머감각이 없어서 안 풀리는 것 같아요.

-마지막 에피소드인 ‘샤리아에 부합하는’에서 테러리스트가 결국 동화됩니다. 빈스토크에 사람이 살고 있었네, 라는 결론이 되는 거죠(빈스토크에 초기에 설치한 뒤 65년간 묻혀 있던 폭탄은 혁명의 D데이에 모두 불발된다. 폭탄 옆을 지키며 거주하던 15명의 테러리스트가 모두 예외 없이, 폭탄을 불발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처음에는 수직으로 길쭉한 탑을 상상했습니다. 구제받을 길이 없는 공간이죠. 계층구조가 부각되고 부동산 문제 등이 심각한 문제 공간이죠. 수직으로만 가면 상징이 정교하지 않아도 되는데, 건물을 두껍게 하면서 디테일에 신경을 많이 쓰게 됐습니다. 수평이 되면서 인간적이 된 거지요. 한쪽 방향이면 강렬한 이야기가 나오긴 하지만 “어쩔 건데?”라고 묻게 됩니다. 테러리스트의 마음처럼 저도 변했죠.

-당신이 바로 그 테러리스트군요. 결국 비판의 칼날이 무뎌지는 셈인데, 아쉬운 점은 없습니까.

=할 말은 다 했으니까요.

단편 ‘바이센테니얼 챈들러’(2008년 발표)는 한 총통의 당선 뒤 동면을 결행하는 이야기다. 총통의 통치 치하를 견딜 수 없어 5년간 잠을 잔다. 이 단편은 배명훈이 2007년 대통령 선거 다음날 쓴 소설이다. “가 책으로 나온 뒤 상상이 현실로 된 게 많습니다. 광장을 둘러싼 차벽은 ‘플랑크스’(시위를 막는 밀집부대)를 연상시키고, ICBM은 어려운 단어가 아닐까 했는데 상식 키워드가 됐네요. 지금 사태는 불쌍한 작가들에게 영감을 받아 쓰라고 하는 것 같아요. 평화로운 시기에는 방바닥을 파야 하는데, 세상이 뜨거우니 영감이 넘칩니다. 애매한 우리 세대도 스스로를 발견해가고 있습니다.

글·사진 구둘래 기자 anyo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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