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부러져 죽고, 2층에서 떨어져 죽고, 눈 뽑혀 죽은 령들을 찍어라… 집안의 불 끄고 TV만 달랑 켠채 볼륨을 높인 뒤 공포의 게임속으로
▣ 김현진/ 자유기고가·<네 멋대로 해라> <불량소녀백서>
슬슬 발꿈치까지 다가온 여름, 귀신 이야기는 여름밤에 빼놓을 수 없는 필수 아이템이다. 귀신 이야기를 재미있게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리얼리티가 필수다. 얼마나 생생하게, 지금 내 등 뒤에 귀신이 서 있을 것처럼 이야기할 수 있느냐가 귀신 이야기의 관건이다. 이 점에서 현실과 다른 세계를 마치 또 다른 현실처럼 생생하고 실감나게 눈앞에서 구현하는 게임의 세계야말로 귀신들이 서식하기에 가장 좋은 환경일진대, 그중에서도 독보적인 위치를 확립한 게임이 바로 일본 테크모(tecmo)사에서 개발한 <령>(零) 시리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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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게임은 PS2판으로 개발돼 엑스박스(X-BOX)까지 이식됐으며, 2001년 <령- 제로>가 발매됐고(일본 기준), 뒤를 이어 <령- 붉은 나비> <령- 자청의 성>이 꾸준히 발매되며 마니아층을 쌓았다. 할리우드 영화처럼 매끈한 연출의 <바이오 하자드>나 <사일런트 힐> <클락타워> 시리즈 역시 공포감이나 게임성에서는 <령> 시리즈보다 뒤떨어질 것이 없지만 괴기스러운 것으로는 <령>을 따라올 것이 없다. 이 괴기함이야말로 이 게임의 가장 섬뜩한 매력이다.
플레이어는 오직 도망치는 수 밖에!
전 시리즈를 통틀어 주인공은 언제나 영감을 가진 여성이다. 플레이어는 <제로>에서는 사라진 오빠를 찾아 헤매는 소녀 미쿠, <붉은 나비>에서는 신비하게 이어진 쌍둥이 미오와 마유, <자청의 성>에서는 연인을 잃고 실의에 빠져 있는 레이가 되어 끔찍한 비밀 속에 혼자 던져진다. 그리고 아무도 도와주지 않고 밖으로 나갈 수도 없는 채 혼자서 악령들이 가득한 흉가를 조사해나가야만 한다. 보통의 어드벤처 액션게임에서는 총이나 칼 등의 무기가 주어져 그것을 사용해 능력치의 상승에 따라 업그레이드를 해가며 몬스터와 맞서는 것이 상식이지만, <령>은 다르다. 플레이어는 단 하나의 무기도 가질 수 없다. 당연한 것이, 상대는 몽둥이나 총검 등을 이용해 손상을 입힐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플레이어는 오직 도망치는 수밖에 없다. 생선처럼 풀린 눈을 하고 벽을 통과하고 시시때때로 출몰하는 육체 없는 존재에 일반적인 무기로는 맞설 수 없는 것, 엉뚱하게도 <령>에서는 ‘사영기’라 불리는 구식 카메라가 단 하나의 무기이다.
설정상 현실 세계에서는 언제나 사람들이 그들을 배척하게 만드는 이유였던 영감,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능력이 이 흉가에서는 캐릭터들이 생존할 수 있는 단 하나의 구원이 된다. 캐릭터는 이 사영기를 통해 영을 포착하고, 신비한 힘이 깃든 이 카메라의 셔터를 눌러 촬영하면 사영기의 힘을 통해 비로소 영은 사진 안에 갇혀 소멸된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 필름이 모두 소진돼서는 안 된다. 필름이 떨어졌다면 영을 가둘 수 없기 때문에 흉가 안을 돌아다니면서 비밀을 푸는 단서들을 모으는 와중에 14식, 61식, 90식 등의 필름을 확보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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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만 설명해서는 마치 그저 평범한 액션게임에서 총과 탄약의 관계를 설명한 것 같지만, <령>이 섬뜩한 점은 단지 카메라로 찍어대기만 해서는 악령을 퇴치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일단 카메라 렌즈를 통해 악령을 포착하지 않으면 안 된다. 게임에는 단순 이동 모드와 파인더 모드가 있다. 이동 모드는 3인칭으로 캐릭터와 공격해오는 령을 모두 볼 수 있지만, 파인더 모드로 전환하면 1인칭이 되어 캐릭터의 시야가 곧 플레이어의 시야가 된다. 도망칠 위치 등을 모두 파악한 뒤, 카메라를 들여다보며 파인더로 령을 바라보는 것이다. 이동 모드에서도 본 령의 모습도 괴이한데, 렌즈를 통해 상세히 본 령의 모습은 끔찍하기 그지없다. 목이 부러져 죽고 2층에서 떨어져 죽고 눈이 뽑혀 죽은 령들이 다가오는 모습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하지만 이런 녀석들을 처치하려면, 파인더로 빤히 클로즈업을 하는 수밖에 없다.
가장 무서운 순간이 셔터 찬스!
이 게임의 비결은 귀신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오래 보고 있는 것이다. 오래 보고 있을수록, 그리고 놈들이 가까이 올수록 프레임의 색깔이 바뀐다. 새빨간 색으로 변하면 령이 플레이어를 공격하기 직전으로, 이때가 바로 셔터 찬스다. 이때 셔터를 누르면 령은 엄청난 데미지를 받음과 동시에 뒤로 밀려나는데, 이것을 ‘제로샷’이라 부른다. 이게 말이 쉽지, 사실은 담력 시험이다. 눈이 뽑혀 죽은 귀신이 “내 눈… 내 눈…” 하며 다가오는 광경을 보며 셔터가 빨갛게 제로샷 포인트로 차오르기를 기다리는 건 어느 정도 잔챙이 귀신들에게 익숙해진 뒤에야 가능하다. 목이 뎅겅 잘려 죽은 여성의 몸 없는 머리통이 긴 머리카락만 휘날리며 공중을 이리저리 횡단하는 모습도 마찬가지. 겁에 질려 파인더를 끄고 이동 모드로 전환해 복도를 달려가면 저쪽에서 머리통이 실실 웃으면서 이쪽을 향해 날아온다. 저쪽 2층에서는 떨어져 죽은 귀신이 추락했을 때 그대로의 모습으로 둥둥 떠오르고, 한 술 더 떠 목이 꺾여 죽은 여자 귀신은 마치 PVC파이프를 억지로 부러뜨려놓은 것처럼 기괴하게 꺾인 목을 하고 텅 빈 눈으로 이쪽을 바라본다. 입으로는 쉴 새 없이 “아파… 아파…” 하고 중얼거린다. 저런 각도로 목이 꺾였는데, 아프지 않을 리 없다. 불쌍한 귀신을 향해 가엾은 마음을 품자마자 플레이어를 포착하고 나면 원귀는 순식간에 그 동정의 마음을 싹 가시게 하는 한마디를 하며 이쪽으로 다가온다. “아파… 아파… 너도… 너도….” 이쯤 되면 패드를 던지고 도망갈 판이다.
하지만 패드를 던지기엔 너무 이르다. 깊은 밤, 집안의 불을 다 끄고 텔레비전 하나만 달랑 켠 채 어느 정도 볼륨을 높여야 비로소 공포는 극대화된다. 공포영화도 소리를 끄고 보면 그다지 무섭지 않듯이, 이 게임 역시 소리를 빼면 반쪽짜리다. 2층에서 떨어진 귀신은 죽음 직전의 “꺄아아아악!” 하는 절규를 내지른다. 뭔가 긁는 소리, 음산한 비명, “왜 죽이려 하는 거야?” 원망 어린 음성들처럼 귀신이 내는 소리, 캐릭터를 컨트롤할 때 나는 오래된 폐가의 끼이익∼ 문이 열리는 소리, 발걸음을 옮길 때의 소리…. 할리우드 영화처럼 사람을 깜짝 놀래는 방식의 공포가 아니라, 슬피 울면서 머리를 풀어헤치고 폐가를 누비는 귀신들을 사영기에 담으며 플레이어는 <전설의 고향>을 경험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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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작성이나 아이디어 등의 게임성을 빼고 스토리텔링적·문화적으로 이 게임 시리즈가 흥미로운 이유는 시리즈 전편에 흐르는 ‘청승’ 때문이다. (여기부터는 스토리와 관련이 있으니 스포일러를 알고 싶지 않은 분은 통과하시도록) 1편 <제로>의 주인공 미쿠는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자신을 유일하게 이해해줬던 오빠가 사라지자 그가 방문했던 폐가를 찾아나선다. 그 많은 귀신들을 헤집고 찾아헤맬 정도니 어지간히 오빠를 좋아했구나 싶은데, 여러 날 지나면서 이 폐가의 정체를 알수록 영 희한하다. 이 폐가들은 작은 2층 집 정도가 아니라, 작은 아파트 단지를 연상케 할 정도로 넓은 전통 주택이다. 한 가문 전체가 모여 살던 집이고, 가문 전원이 귀신이 되어 출몰한다.
뉴 테크놀로지 캐릭터의 동인은 신파
그들은 인간의 한과 미련 등 부정적인 감정들을 그들만의 의식으로 감당해왔다. 주인공 캐릭터도 여성이고, 이 귀신 소동의 중심에 있는 인물 역시 여성이다. 그 가문의 중심에는 무녀가 있다. 태어날 때부터 감정이 허락되지 않고, 제물로서의 역할로만 사육되듯 길러진 무녀가 사랑을 알게 되었을 때 이 모든 파란이 일어난다. 이뤄지지 못하고 꺾인 연심은 한이 되고, 좌절된 사랑은 거대한 폐가를 건설한다. 눈앞에서 죽어간 연인, 그리고 한 번만 더 보고 싶다는 소망.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지언정 한 번만 더 만나고 싶다고, 죽었으되 죽지 못하고 이 땅에 남아 있는 가련한 귀신은 중얼거린다. 미련과 한과 잃어버린 사랑이라니, 이토록 차갑게 디지털적 매체인 게임에서 온통 폴리곤으로만 이뤄진 뉴 테크놀로지의 게임 캐릭터를 움직이는 가장 큰 이유가 이렇게도 신파적이라니, 이는 꽤 재미있는 아이러니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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