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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하기 전부터 의무방어전?

등록 2005-03-23 00:00 수정 2020-05-03 04:24

원치 않으면서도 ‘분위기 유지’위해 성관계 응낙하는 20대 초·중반 남녀들의 고민

▣ 김소희 기자 sohee@hani.co.kr

혈기왕성한 20대 초·중반의 남녀는 어떤 성 문제로 갈등하고 있을까. 지난해 말 건강심리학회에 발표된 ‘데이트 커플의 성적 상호작용’(유외숙)과 한국상담심리학회에 발표된 ‘이성교제에서 원하지 않는 성관계 요구 응낙에 대한 설명모형’(유외숙·박경)을 보면, 남녀 대학생의 절반가량은 ‘데이트 파트너’와의 사이에서 원하지 않는 성관계(애무, 구강성교, 삽입성교) 요구를 한번 이상 응낙한 경험이 있다고 한다. 말은 ‘예스’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노’라고 여기는 것이다. 여학생은 48%, 남학생은 54%로 남학생의 응낙 비율이 더 높았는데, 이 나이대에 데이트 주도권이 여학생쪽에 더 많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쩔쩔매는 쪽은 남학생이지만 고민은 여학생이 많이 한다. 성 문제에 대한 고민을 경험한 비율은 여학생이 4명 중 3명꼴(74.9%)로 남학생(55.5%)에 견줘 월등히 높았다.

20대 성생활을 위해 풀어야 할 숙제들

원치 않는 성관계 요구를 거절하지 못하는 이유로는 남녀 합해 △상대의 욕구를 만족시켜주려고 △친밀감을 높이기 위해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아서 △호기심 때문에 △관계의 긴장을 피하려고 △상대가 거부당했다고 느낄까봐의 차례로 조사됐다. ‘상대방 욕구 만족’이나 ‘친밀감 유지’라는 긍정적 목적이 ‘관계의 긴장 회피’나 ‘분위기 유지’ 같은 부정적 결과를 막기 위한 목적에 앞선 점은 돋보이지만, 이는 종합적인 결과다. 분석 모형을 달리해보면 남녀 차이가 두드러진다. 남학생은 ‘상대가 나에게 관심을 갖지 않을까봐’ ‘상대가 우리 관계를 끝내겠다고 협박할까봐’ ‘상대가 거부당했다고 느낄까봐’를 가장 강도 높게 앞서 꼽았고, 여학생은 ‘상대의 욕구를 만족시켜주려고’ ‘관계에서 더 친밀해지기 위해’ ‘관계의 긴장을 피하려고’를 중요하게 꼽았다.

특히 불안·의존성 등에 따른 응낙 동기를 보면, 20대 이후 안정적인 성생활을 하기 위해 풀어야 할 숙제들이 눈에 띈다.

불안해서 거절 못하는 경우를 보자. 남학생은 성적 경험이나 호기심을 중시했고, 여학생은 상대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려는 동기가 강했다. 여학생은 친밀한 ‘관계맺기’를 위해 응낙하는 이타적인 행동을 하지만, 남학생은 성적 호기심과 맞물려 응낙하는 자기중심적인 행동을 하게 된다. 남자든 여자든 불안 수준이 높은 이들은 강박적으로 타인과 가까워지기를 원하고 자기가 원하는 만큼 가까워지지 않을까봐 늘 걱정하고 사랑받지 못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다. 이런 이들은 성관계의 협상이 필요한 상황에서 지나치게 자신을 통제하고 억제할 가능성이 높다. 그 결과 성적 권리와 기쁨을 누릴 기회를 차단하고, 때에 따라서는 성적 피해자가 될 수 있다.

특히 불안 수준이 높은 여학생은 관계통제나 의사결정권 같은 ‘성관계 권력’을 상대방보다 적게 갖는 경향이 있고, 자기가 성관계 권력이 적다고 느낄수록 원치 않는 성관계 요구에 더 많이 응낙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관계 주도성을 회복하기 위한 방편으로 원치 않는 성관계에 자꾸 ‘예스’라고 대답하기도 하고, 이와는 달리 아예 성적 협상을 포기해버리기도 한다. 둘 다 심리적 후유증을 앓을 가능성이 높다. 또 교제 기간이 길수록 여학생 집단에서 원치 않는 성관계 응낙을 더 많이 하는 것도 눈에 띈다.

성관계 빈도 높을수록 원치 않아도 ‘예스’

남학생들도 고민이 있다. 의존성이 높은 남학생들은 상대에 대한 신뢰나 자신감이 낮을 때, 원치 않는 성관계에 응낙하는 비율이 높았다. 성관계를 주도하고 늘 준비돼 있고 성적 능력이 강한 것을 남성성으로 해석하는 사회·문화적 압력과도 관련이 있다. 상대방의 요구를 거절하면 남성적으로 보이지 않을까봐 걱정하는 것이다.

남녀 모두 성관계 빈도가 높을수록 원치 않아도 ‘예스’라는 대답을 더 많이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번 하면’ 그 뒤에는 거절하기가 쉽지 않아서다. 상대방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의무적으로, 혹은 습관적으로 성관계를 하게 된다. ‘성적 미래’가 창창한 젊은이들이 이런 ‘성적 지루함’에 빠지는 것은 개인을 위해서나 사회를 위해서나 경계해야 할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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