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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액형, 냉정과 열정 사이

등록 2004-11-25 00:00 수정 2020-05-03 04:23

식을 줄 모르는 ‘혈액형 인간학’의 인기… 냉담한 전문가들 “혈액형 유전자와 성격 연관성 입증 안돼"

▣ 이주현 기자 edig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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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19일 서울 논현동의 한 어린이집. 18명의 어린이들이 나란히 앉아 그림을 그린다. 얼마 전 서울대공원에 소풍 갔던 기억을 그리는 것이다. 크레파스를 들기 전까지는 시끌벅적 제멋대로 떠들던 아이들이 이 순간만은 콧등에 땀이 맺힐 정도로 집중하여 선을 가다듬는다. 아이들의 옷깃에는 모두 동그라미 스티커가 달려 있다. 담당교사인 임진희(31)씨가 설명한다. “A형은 파란색, B형은 빨간색, O형은 노란색, AB형은 초록색이에요. 본래는 이렇게 혈액형에 따라 갈라앉거나 스티커를 붙이지 않지만 오늘은 특별히 취재를 돕기 위해 표시를 했습니다.” 그는 이어 아이들의 그림을 짚어가며 혈액형에 따라 그림의 내용이 다르다는 것을 지적했다. “A형은 자신이 경험한 것을 순서대로 전개하는 것이 특징이고, B형은 자기에게 인상 깊었던 것을 클로즈업해서 그립니다. O형은 화면이 꽉 차게 자기가 본 것들을 최대한 많이 집어넣고, AB형은 특이한 색깔과 모양으로 경험에서 비롯된 상상의 세계를 그리지요.” 이 어린이집에서는 그림을 모아 부모들에게 보여주고 아이의 성격에 대해 설명하는 자료로 쓸 계획이다. 10월에 일본 도쿄로 ‘혈액형 연수’를 다녀온 임씨는 “혈액형 교육의 목표는 A형을 A형답게 키우는 것이 아니라 A형의 장점을 최대한 발휘해 좀더 행복한 아이로 자라나도록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어떤 애들은 교사의 스타킹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애들이 있어요. 대부분 스킨십을 좋아하는 O형들이지요. 혈액형의 특성을 파악하면서 아이들을 관찰하면 그동안 이해하지 못했던 아이들의 특성을 깨닫게 되죠. 또 혈액형을 알면 아이들의 성격을 좀더 바람직한 방향으로 이끌어갈 수 있어요.”

1971년 한 일본인이 시작한 성격탐구

혈액형 열풍이 그칠 줄 모른다. 가수 김현정씨의 신곡 가 인기를 끌고 있고, 영화 (최석원 감독)가 2005년 2월 개봉을 목표로 촬영 중이다. 교육전문 케이블 방송은 혈액형에 따른 공부 방법을 소개하는가 하면 속옷회사는 상대방의 혈액형이 새겨진 커플팬티를 출시했다. 최근 한 보험회사는 고객의 혈액형에 맞는 보험을 분류해 가입자에게 맞춤보험을 설계하는 이벤트를 열기도 했다.
왜 이처럼 혈액형이 인기일까. 혈액형과 성격은 어떤 상관관계가 있을까.
먼저 혈액형의 역사를 간단히 들춰보자. 혈액 중 적혈구의 표면에는 수많은 구조물들이 있다. 어떤 구조물은 단백(protein) 성분으로 이루어져 막단백(membrane protein)을 형성하고 있고, 또 어떤 구조물은 당사슬(sugar chain)로 이루어져 있다. 이런 구조물의 차이가 ABO 혈액형을 비롯해 Rh, MNSs 등 수많은 혈액형의 종류를 낳는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ABO식 혈액형은 1901년 수혈할 때 피가 엉기는 것을 막기 위해 오스트리아의 란트 슈타이너가 만든 것이다. ABO 혈액형을 결정하는 유전자는 9번 염색체(9q34)에 위치하고 있는데, A유전자는 A형 항원을 만들어내고 B유전자는 B항원을 만들어낸다. 혈액형 항원은 적혈구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몸의 각 장기와 조직, 침에도 들어 있다. 수혈을 위해 만든 혈액형 분류법이 ‘인간학’으로 발전한 것은 1971년 일본의 방송작가 출신 노미 마사히코가 이란 책을 내놓으면서부터다. 그는 혈액형에 따라 몸의 구성물질이 다르며(그는 이를 ‘혈액형 물질’이라고 명명했다) 이것이 체질을 만들고 성격을 결정한다고 주장하며 ‘마치 모래알 줍듯’ 스포츠스타·정치인·연예인 등의 혈액형을 일일이 조사해 등을 펴냈다. 사후엔 그의 아들 노미 도시다카가 이를 ‘가업’으로 물려받아 계속 신작을 내놓는 중이다.
물론 의사들은 이 이론의 비과학성을 단칼에 정리한다. “그 이론의 ‘혈액형 물질’이란 혈액형 항원을 일컫는 것인데, 우리 몸속에는 혈액형 항원 말고도 조직형 항원이란 것이 있어 수혈할 때 혈액형 조사하듯 골수이식을 할 때에도 조직형 항원을 꼭 확인해야 한다. 혈액형이 그처럼 성격에 심대한 영향을 끼친다면 혈액형 항원보다 훨씬 더 종류가 많고 정보가 풍부한 정부조직형 항원을 이용한 성격 분류는 왜 하지 않는가.”(서울대 의대 검사의학교실 이동순 교수) “혈액형의 과학성을 입증하려면 혈액형을 결정하는 유전자가 성격과 관련이 있다는 연구가 나와야 하는데 그런 것이 없지 않은가. 게다가 성격 분류라는 것은 개인에게 낙인을 찍는 속성이 있기 때문에 매우 신중히 조사해야 한다. 지금의 혈액형 신드롬은 스타들의 행동에 대중들이 부화뇌동하는 것이다.”(강남성모병원 정신과 전문의 김태석) 전문가 중에는 이보다 좀더 너그러운 시각도 있다. “혈액형을 체질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는 타고난 선천적인 체질일 뿐인데, 사람의 행동·성격·건강에는 후천적인 요소가 많은 영향을 끼친다. 우리가 고스톱을 칠 때 처음 주어진 패가 선천적인 체질이라면 게임이 진행되면서 서로의 상호작용으로 패가 섞이게 된다. 시간이 지나 현재 가지고 있는 패가 게임의 승패를 좌우하지 않는가. 혈액형 결정론은 후천적 요소를 무시하는 오류를 지니고 있다.”(포천중문의대 대체의학과 전세일)


그러나 전문가들의 냉정한 시각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대중들은 여전히 혈액형에 ‘열광’하고 ‘집착’한다. 과장해서 말하면 ‘내가 유일하게 믿고 있는 신념이 혈액형’이라는 회사원 주아무개(33)는 “서른 넘도록 살아오면서 사람들의 관계를 관찰·분석하다 보니 혈액형이 어떤 경향성을 지닌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고 말한다. “게다가 쉽고 재미있지 않은가!” 혈액형을 신봉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이에 대한 신념체계가 굳어지면서 이것이 다시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혈액형 이론이 계속 재생산된다는 분석도 있다. 가령 B형 남자 신드롬의 생산자인 가수 김현정씨도 알고 보면 혈액형 담론의 ‘소비자’이다. 그는 본래 B형 남자를 염두해 두고 노래를 지었던 게 아니라 섹시하고 영리해서 여자들이 쉽게 잊지 못하는 남자에 대해 노랫말은 썼다가 나중에 인터넷에 떠도는 B형 남자 이야기를 읽고 제목을 ‘B형 남자’로 지었다고 한다.

복잡한 혈액형… 장점만 기억하라?

혈액형 인간학을 부정하거나 또는 신봉하는 두 양극은 절대 화해할 리 없지만, 그럼에도 공통된 전제가 있다. ‘혈액형은 생각처럼 단순하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 주위엔 어릴 적 검사했던 혈액형과 어른이 돼서 검사한 혈액형이 다른 경우가 있다. ABO 혈액형 검사는 시약과 응집하는 정도를 살펴서 결정하는 것인데, 반응 정도가 유달리 약하거나 강한 경우가 있기 때문에 임상병리학 전문의가 아닌 경우엔 판정을 잘못하는 사례가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정확한 검사를 하려면 혈액형의 항원·항체·유전자 검사 세 가지를 해야 하는데 항원 검사로 대신하는 경우도 많다는 것이다. 이동순 교수는 “간혹 선천적 변이형이 있어서 A형이면서도 anti-A항체를 지니고 있기도 하며, 암에 걸리거나 박테리아에 감염되면 응집반응이 달라져서 혈액형 분류가 잘못될 수 있다”고 설명한다. 혈액형 유아교육을 하고 있는 교사 임진희씨도 강조한다. “같은 A형도 AA와 AO가 다르고, 부모가 어떤 혈액형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도 아이들의 행동이 달라져요. 각종 복잡한 조합과 변수가 생겨나기 때문에 단순히 맹신해선 안 됩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부모님들에게는 아이의 혈액형이 지닌 장점만을 설명해드려요. 단점을 부각시키면 아이들의 행동을 제약할 수 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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