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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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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절반의 커피를 찾아서

등록 2004-11-25 00:00 수정 2020-05-03 04:23

질좋은 생두와 갓볶은 원두의 맛을 즐길 순 없을까…자가로스팅 매장 등이 보여주는 ‘진짜’ 커피



인스턴트 커피에 길들여진 한국. 신선한 생두와 원두의 향을 즐길 순 없을까. 스타벅스에서도 찾을 수 없는 커피의 진정한 맛을 소개한다.


▣ 김수병 기자 hellio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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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프리랜서 번역가로 활동하는 이혁태(32)씨는 커피를 재발견한 재미에 푹 빠져 지낸다. 그는 1990년대 후반부터 5년여 동안 미국에서 유학생활을 하는 동안 커피의 맛을 알았다. 국내에서는 ‘맥심’이나 ‘초이스’ 혹은 자판기 커피에 익숙했던 그에게 ‘에스프레소’는 신기하기만 했다. 에스프레소는 원두 가루를 압축해 기계적으로 농축액을 추출해내는 시스템이다. 여기에 다양한 재료를 섞은 ‘에스프레소 음료’는 끊임없이 그의 입안을 자극했다. 최고급의 아라비카 원두만을 계절에 따라 공급하는 신선한 ‘블렌드 커피’를 즐기면서 원두커피의 다양한 맛을 경험할 수도 있었다. 처음으로 커피콩인 ‘생두’를 구경하기도 했다.

한국 스타벅스, 미국과 같은가

그렇게 커피 마니아가 되어가던 이씨의 생활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국내에 들어오면서 ‘스타벅스’가 자랑하던 그윽한 커피의 향과 맛, 풍미 등을 즐길 수 없었기 때문이다. 국내에서도 스타벅스의 신화는 계속되고 있었다. 스타벅스는 1999년 7월 서울 이화여대 앞에 1호 매장을 설립한 이래 지난해 550억원의 매출을 올릴 정도로 초고속 성장을 거듭했다. 107개의 매장을 거느린 스타벅스 코리아는 테이크아웃 문화의 전도사 구실을 톡톡히 하고 있었다. 그가 보기에 ‘커피 제품이 아니라 문화를 판다’는 슬로건은 한치의 거짓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미국에서 경험한 커피 맛을 느끼려고 에스프레소 매장을 찾았다가 ‘쓴맛’만 삼켜야 했다.

정말로 스타벅스 커피는 귤이 회수(淮水)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는 말처럼 태평양을 건너며 본래의 맛을 잃어버렸던 것일까. 생두는 볶는 순간부터 산화가 이뤄진다. 원두의 신선도를 유지하려면 습기나 빛·공기 등에 노출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스타벅스 코리아 양재선 마케팅팀장은 “특별히 제작한 ‘향 보존 팩’(Flavor-Lock Valve Bag)으로 원두의 향미를 보존한다. 원두에서 나오는 가스는 밖으로 배출하고, 외부의 공기는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장치다. 지역에 따라 맛이 다른 것은 에스프레소에 첨가하는 ‘우유’나 ‘시럽’의 차이일 뿐이다. 선박으로 들여와 통관·검역·유통 등의 절차를 밟아도 볶은 뒤 한달 안팎이면 소비자에게 공급된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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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스타벅스 등 테이크아웃 매장의 원두 신선도를 의심하는 사람들이 많다. 커피 로스팅(roasting·생두 볶기) 전문가 전광수씨는 “원두커피는 생두를 볶아서 만든 식품이다. 진공팩을 이용해도 향미가 변하는 것은 막을 수 없다. 미국에서 마시는 커피는 질 좋은 원두를 볶은 뒤에 곧바로 사용하기에 최상의 맛을 낸다”며 “지금으로선 테이크아웃 매장에서 원두의 제 맛을 기대하기는 힘들다”고 지적한다. 최상의 커피는 양질의 생두를 볶은 뒤 적어도 한달 이내에 갈아서 내려 마시는 것이다. 스타벅스 본사는 국내의 매출액이 급증하면서 고객의 신선도 요구에 따라 로스팅 공장을 세우려고 중국이나 싱가포르 등에서 부지를 물색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렇다고 이씨가 신선한 커피에 대한 기대를 접을 수는 없었다. 입소문에 귀를 기울이다 보니 매장에서 직접 볶은 원두와 음료를 파는 곳이 있었다. 이른바 자가 로스팅 업소들이다. 대표적인 곳이 1998년 이화여대 부근에 문을 연 ‘비미남경’이었다. 이곳의 탄생은 재일동포 마쓰바라 아키모리가 경험한 도쿄 외곽 오하니자야역 선로변에 있는 카페로 거슬러 올라간다. 마쓰바라는 커피장인 호리구치에게 커피를 배워 서울에 자가 로스팅 매장을 차렸다. 지금은 마쓰바라 사장의 조카인 정현정씨가 매장을 운영하고 있다. 이씨는 비미남경에 커피를 주문한 다음날 원두를 받아 커피의 다양한 향미를 다시 즐길 수 있었다.

일본에서 ‘보따리’로 들여오기도

사실 국내에도 생두를 수입하는 업체들이 적지 않다. 인스턴트 커피를 생산하는 대형 업체뿐만 아니라 중소업체들도 수두룩하다. 하지만 이들 업체에서 양질의 생두를 기대하기는 쉽지 않다. 인스턴트 커피에 치중하는 대형 업체들은 대외적으로 생두 로스팅을 공개하지 않은 상태에서 주문자상표부착(OEM) 방식으로 테이크아웃 매장에 원두를 공급하고 있다. 국내외 중소업체들도 테이크아웃 매장과 일반 커피숍 등에 원두를 공급하지만 중저가의 낮은 품질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국내 업체들이 양질의 커피 농장에 접근하기 어렵고, 설령 접근해도 고가이기에 수입을 꺼리는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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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정이 이렇다 보니 자가 로스팅 매장은 양질의 생두를 주요 수입국을 통해 들여오기도 한다. 비미남경은 일본을 오가는 사람을 통해 ‘보따리’로 들여오는 경우가 많다. 정현정씨는 원두의 품질을 유지하려면 불편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국내에서 유통되는 생두는 수확 연도조차 확인하기 어렵다. 유통기간이 1년 이상 길어지면 생두 속의 수분이 12%에서 9% 정도로 줄어 잘 볶더라도 제 맛을 내지 못한다.” 게다가 국내에서 유통되는 생두는 여러 농장에서 수확한 것을 유통 과정에서 섞어 크기가 일정하지 않은 것도 많다. 유럽과 미국, 일본 등은 농장 단위로 품질관리를 거친 생두만 ‘스페셜티 커피’로 인정한다.

다양한 커피맛을 즐기려면 커피볶음기를 보유한 매장을 두루 찾아야 한다. 한 매장에서 로스팅을 한다고 해서 60여종에 이르는 상품화된 생두를 모두 보유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얼마 전 이씨는 서울 마포구 대현동에 있는 소형 로스팅 매장 ‘빈스서울’을 발견했다. 겨우 시음할 수 있는 테이블 두개가 달랑 있을 뿐이고 30여종의 생두를 판매하고 있다. 지난 11월20일로 개업 1주년을 맞은 빈스서울 대표 김동진씨는 1980년대 후반에 사진을 공부하러 일본에 갔다가 요코하마 ‘생두집’을 드나들며 로스팅을 알게 됐다. 귀국한 뒤 자영업을 구상하다 자가 로스팅 매장을 떠올린 뒤 일본을 오가며 기술을 습득했다. 지금은 요코하마 생두집에서 제작한 소형 로스팅 기구를 이용해 240g 단위로 생두를 볶아서 팔고 있다.

자기만의 원두 만들려는 사람들

이런 가운데 자기만의 원두를 만들려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커피 볶기에 매력을 느끼는 이씨도 로스팅을 배우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적어도 10년쯤 뒤면 원두커피 시장이 30%쯤으로 확대될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테이크아웃 체인에서 ‘바리스타’(Barista·커피를 뽑아서 고객과 교류를 하는 사람)가 원두를 취급해 에스프레소 음료를 만든다면, ‘로스터’는 생두의 특징에 따라 최고의 맛을 내는 원두로 볶아낸다. 만일 이씨가 커피 장인이 되려면 나주대학의 바리스타학과를 비롯해 여러 대학에 진학해 로스터와 바리스타의 노하우를 터득할 수 있다.

그것도 여의치 않다면 서울 명동 퍼시픽호텔 뒤편의 ‘전광수 커피하우스’나 서울 강남 압구정동의 ‘허형만의 커피집’에 드나들며 커피에 관한 배움을 넓힐 수 있다. 10년 넘게 로스팅에 관심을 기울인 전광수씨가 로스팅 ‘기술’을 보급하고 ‘감각’을 전하기 위해 차린 매장이다. 후미진 골목 2층에 자리잡은 매장이기에 일반 손님은 그리 많지 않다. 대신 볶은 커피를 사려는 사람들이나 로스팅을 배우려는 사람들이 북적거린다. 커피하우스는 두대의 중형 커피볶음기를 보유하고 있다. 하지만 전광수씨는 아직까지 정말로 원하는 생두를 볶지 못했다. “커피의 맛은 생두가 결정한다. 지금은 원하는 생두를 구하는 게 힘들지만 자가 로스팅업이 활성화되면 양질의 생두를 공동 구매할 수도 있을 것이다.”

차츰 최상급의 원두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양질의 생두를 공급하려는 움직임도 구체화되고 있다. 이제는 우리나라에서도 제 맛을 내는 원두로 커피의 진가를 알게 하려는 것이다. 지난 9월부터 생두를 매장에 공급하고 있는 ‘커피스톡’은 우리나라 커피 문화를 새롭게 정립하겠다는 다부진 포부를 밝히고 있다. 그해 생산한 최상급의 생두만을 전용 창고(warehouse)에 보관한 뒤 국내에 들여온다는 것이다. 커피스톡 유통사업부 여선구 실장은 “생두 유통의 신기원을 이루려고 한다. 기존의 생두보다 비싸지만 매장에서 한잔당 100원 정도만 추가하면 누구나 최고의 향미를 즐기도록 할 수 있다”고 말한다.

대형 커피업체들도 발빠른 대응

이렇게 자가 로스팅 매장에 마니아의 발길이 이어지고 신선한 원두를 찾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인스턴트에 주력하던 대형 커피업체들도 발빠른 대응을 하고 있다. 에스프레소 커피 매장에 갓 볶은 원두를 공급해 최소의 기간에 소모할 수 있는 유통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다. 동서식품은 대형 로스터 기기에서 생두를 한달에 세번 볶아 국내 브랜드 매장에 공급할 것으로 알려졌다. 이미 볶아진 커피를 선박으로 들여와 6개월가량 유통시키는 해외 브랜드에 맞서려는 것이다. 상대적으로 양질의 생두를 사용하는 해외 브렌드와 한달 이내의 유통기한으로 신선도를 높인 국내 브렌드의 원두커피 전쟁이 시작된 셈이다.

그동안 우리는 커피를 마셨던 것일까. 물론 마신 게 틀림없다. 하지만 그것은 절반의 커피였다. 이젠 나머지 절반의 커피에도 관심을 가져볼 만하다. 뉴요커들이 등장하는 드라마 나 영화 등에서 보았던 커피는 단순한 음료가 아니었다. 원두의 제 맛을 담아내지 못하는 종이컵 하나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누구는 원두커피에서 에스프레소 브렌드로 취향이 바뀌었다고 한다. 하지만 인스턴트 커피의 위세는 꺾일 줄 모르고 원두커피는 향만을 날렸을 뿐이다. 에스프레소 음료 시대에 뒤떨어져 보이는 생두로 커피의 진가를 확인하려는 이혁태씨. 그는 지금 커피의 향과 맛 그리고 색깔, 소리 등에 푹 빠져 커피 향기 날리는 겨울을 보내려 한다.



원두 커피의 ‘해방’을 위해

서울의 자가로스팅 매장들

만일 1990년대 초·중반에 결혼한 사람들이라면 커피메이커를 혼수로 장만했을 것이다. 하지만 인스턴트 커피에 비해 훨씬 비싸고 구하기도 쉽지 않은 원두로 인해 커피메이커는 가정에서 애물단지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국내에서 원두커피 대중화의 관건은 원두커피의 저렴화에 달려 있다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생두의 질은 만족스럽지 않으면서 가격은 비싸다는 결정적인 약점이 있는 셈이다.
우리나라 원두커피 가격은 미국의 두배나 된다. 실제로 미국에서 12달러(450g) 하는 최고 수준의 스페셜티 커피가 국내에선 2만4천원이나 한다. 커피 전문가들은 원두커피 가격이 미국 수준으로만 떨어져도 대중화 추세에 접어들 것이라고 예상한다. 커피메이커 혹은 페이퍼 드립을 이용하려는 사람은 위해 서울 지역에 있는 자가 로스팅 매장 몇곳을 소개한다.

● 허형만의 압구정커피점 : 국내의 대형 커피업체에서 20년 동안 근무한 경력이 있는 허형만씨가 차린 커피 유통 및 커피 볶기 전문점. 12종의 단종 원두와 2종(핸드드립용·에스프레소용)의 블렌딩을 판매하며, 매주 수요일에는 유료(5천원) 공개 커피강좌도 열고 있다. 국내 태환자동화산업이 개발한 반열풍식 커피볶음기를 사용한다. 지하철 3호선 압구정역 부근, 02-511-5078.

● 비미남경 : 국내 최초로 개업한 자가 로스팅 매장으로, 특이한 상호는 재일동포 마쓰바라 아키모리 사장의 자녀 넷의 이름에서 따왔다. 홍익대 앞 빵집 ‘르방’에 원두를 공급하며, 한달에 커피 원두를 90kg가량 판매한다. 과테말라와 케냐, 자메이카 등지의 질 좋은 생두를 들여와 도쿄 후지로열 반열풍 커피볶음기롤 사용한다. 지하철 2호선 이대역 부근, 02-365-1401.

● 커피하우스 : 대개의 로스팅 매장이 커피 볶는 과정을 공개하지 않는 것과 달리 모든 것을 공개해 커피를 편하게 만날 수 있다. 10여년의 로스팅 경력이 있는 전광수 사장이 로스팅 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지난 4월 개점했다. 직화식의 후지로열과 반열풍식의 프로밧을 이용해 생두의 특성을 살려 볶는다. 강한 커피 맛을 특색으로 내세운다. 지하철 4호선 명동역 부근, 02-778-0595.

● 빈스서울 : 2평 남짓한 소형 매장으로 ‘로스팅업’을 전문으로 한다. 취급하는 커피 종류는 30여 가지나 된다. 특히 일본에서 직접 들여오는 ‘블루마운틴 넘버 1’은 최고급으로 꼽힌다. 맛이 서로 어울리는 세 종류의 생두를 블렌딩한 ‘빈스서울 블렌드’로 맛을 들여도 괜찮다. 일본의 자가 매장에서 들여온 미니 볶음기를 이용한다. 지하철 6호선 대흥역 부근, 02-706-7022.

● 부에노커피 : 재미동포 김병호씨가 4년 전 이화여대 앞에 개업한 커피 볶기 및 커피 전문점.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본사를 둔 ‘부트커피’(Boot coffee)와 제휴해 양질의 생두를 들여오고 있다. 7종의 생두를 227g, 1kg 3kg 단위로 판매한다. 전화로 주문하면 이틀이 지난 뒤 원두를 택배로 받을 수 있다. 반열풍식의 커피볶음기를 사용한다. 지하철 2호선 이대역 부근, 02-364-0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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