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P’(대통령)를 위시한 청와대가 정부 부처들이 여럿 동원되는 ‘범정부 TF(태스크포스)’를 꾸리고, TF가 비선 실세들의 이익을 국익으로 포장하는 창구로 쓰인 정황이 확인됐다. 에 나오는 고사에서 비롯된 ‘농단’은 ‘가장 유리한 위치에서 이익과 권력을 독차지한다’는 뜻이다. 국정 농단으로 얻으려던 비선 실세의 이익은 궁극적으로 누구의 이익이었을까.
문화체육관광부(문체부)가 7천억원대 예산을 투입하기로 한 초대형 국책사업 ‘문화창조융합벨트’ 사업은 시행 두달 전까지도 문체부의 사업계획에 포함되지 않았으나 외부 세력에 의해 졸속으로 입안됐던 것으로 드러났다.
문화창조융합벨트는 정부의 문화사업을 독식해온 차은택 전 창조경제추진단장이 주도한 것으로 알려지며 문체부가 스스로 내년 예산을 자진 삭감하겠다고 밝힌 대표적 ‘최순실 특혜’ 사업이다.
센터 개소 두 달 전까지도 인지 못해차은택씨는 2014년 8월 처음으로 정부 문화사업에 관련된 직을 맡았다. 이후 박근혜 대통령이 문화 행사에 갈 때마다 자주 동행했고 8개월여 만에 창조경제추진단장에 올랐다. 연합뉴스
문체부(당시 장관 김종덕)는 2014년 12월26일 ‘내년부터 새로 시행되거나 바뀌는 정책 소개’란 제목의 자료를 배포했다. 새롭게 시행되는 사업 10건을 소개하며 ‘문화예술치유 프로그램 지원’ ‘스포츠산업펀드 조성’ ‘태권도원 관광자원화’ ‘장애물 없는 관광지 조성’ 등을 2015년에 새롭게 시작하는 대표 사업으로 앞세웠다. 이때까지 문체부가 작성한 자료에는 ‘문화창조융합’이란 단어나 개념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이와 관련해 2014년 초 문체부가 꾸린 ‘미래 먹거리 TF’는 25개 중장기 핵심 사업을 정리했는데, 여기에도 ‘문화창조융합센터’는 없다. 문체부 산하 연구기관 실장급 연구원은 “문체부 ‘미래 먹거리 TF’는 중장기적으로 시행할 새로운 정책 과제를 개발하기 위해 만든 모임인데, 최소한 이때까지 문화창조융합이란 개념이 아예 없었다”고 말했다.
국정 화두가 ‘경제 활성화’임을 감안해 문화의 경제적 가치를 높여야 한다는 논의가 있었으나 “이는 일반적 차원의 얘기”였을 뿐, 콘텐츠 사업을 모두 ‘문화창조융합’으로 몰아넣어 재편할 계획은 없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정부 산하 문화정책 연구원 박사급 연구원 역시 “‘문화창조융합’이란 말이 등장할 때까지 최소한 정책 연구 단위에선 그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전혀 논의된 바 없는 개념이 한 달여 만에 정부의 핵심 정책이 되는 상황에 대해 그는 “통상적이라고 하기 어렵다. 이전에 그런 경우가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문화창조융합 관련 사업들이 등장한 과정이 대단히 갑작스러웠다는 것이다. 문체부의 예산 수립 과정에도 참여했다는 이 연구원은 “한국콘텐츠진흥원이나 문체부가 알지 않겠느냐, 드릴 말씀이 없다”고 말했다.
예산 ‘0’에서 ‘7천억’ 규모에 이르기까지문체부의 2015년 예산안을 살펴봐도 마찬가지다. 문화창조융합 관련 지출 계획은 문체부의 2015년 예산안에 아예 없다. 문체부는 2015년에 전년 대비 10% 증액된 예산을 짰는데, 44쪽에 달하는 예산 설명 자료 어디에도 ‘문화창조융합’이란 말은 없다.
2015년 예산에서 문체부가 잡은 ‘6개 중점 과제’는 ‘생활 속 문화 참여 일상화, 콘텐츠·관광·스포츠 산업 집중 육성, 일자리 사업 추진, 안전·문화·여가 향유 환경 조성, 한류 확산, 문화공간 재생’ 등 기존 사업 방향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이었다.
하지만 문체부는 2015년 12월 성과 발표를 하면서 전혀 다른 얘기를 한다. 콘텐츠 산업 분야의 최대 성과로 ‘문화창조융합벨트 구축’을 꼽았다. 아울러 문화창조융합벨트를 ‘문화융성과 창조경제의 전진기지’라고 평하며 2017년까지 6개 거점을 구축해 융복합 킬러 콘텐츠의 선순환 생태계 조성을 완료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1년 전 예산을 계획할 때만 해도 전혀 없었던 개념이 불과 1년여 만에 문체부의 핵심 과제이자 성과가 되어 확대 지속해야 할 사업이 된 것이다.
이에 대해 문화산업 관련 협회에서 오랫동안 정책 담당을 해온 관계자는 “문화창조융합벨트는 2015년에 갑자기 튀어나온 것”이라며 “문체부 내 몇몇 의사결정권자가 의견 수렴 없이 결정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문화창조융합벨트가 시행되면서 업계엔 ‘차은택이 실세다’ ‘눈먼 돈이 돈다’ 이런 얘기가 돌기 시작했다”며 “근데 성과를 내는 게 중요하지도 않고, 홍보를 열심히 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오히려 돈을 쓰면서도 쉬쉬한다는 인상을 받았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또 다른 문화정책 관계자는 “사업이 잘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대통령에게 그럴싸하게 보이기만 하면 된다는 식이었다”고 말했다. 이 무렵 대통령이 문화 행사에 갈 때는 차은택씨와 손경식 CJ그룹 회장이 자주 동행했다.
2015년 정부 문화정책 기조가 급격히 꺾인 이유는차은택씨가 문화창조융합벨트 사업에서 어떤 구실을 했는지는 검찰 수사 등을 통해 밝힐 대목이다. 하지만 문화계 표현을 빌리면 그가 “갑자기 튀어나온 시기”는 매우 공교롭다.
차씨는 2014년 8월 대통령 소속 문화융성위원회 민간위원에 임명됐고, 이듬해 2015년 4월 1급 공무원인 창조경제추진단장 겸 문화창조융합본부장으로 점프했다. 문화창조융합벨트가 등장하며 정부 문화정책이 급격하게 꺾인 시점과 일치한다.
이에 대해 나라살림연구소 김상철 연구위원은 “2013년부터 올해까지 문체부 국가재정 운용계획을 검토한 결과, 2013~2015년 문화향유·창조경제·생활체육·관광산업이라는 4가지 전략사업 중심의 문화정책 흐름을 보이다가, 2016년 갑자기 문화창조융합벨트라는 개념 사업이 등장하고 가상현실 기술을 매개로 하는 단위사업이 신규로 편성된 것이 두드러진다”며 “전반적으로 국가재정 운영계획 틀이 바뀌었다고 보긴 힘드나, 기존 단위사업에 불과하던 특정 콘텐츠와 기술 사업이 문체부의 주요한 전략사업으로 등장한 것은 분명 독특한 현상”이라고 평가했다.
김 위원은 “사업명을 모호하게 짓는 것은 불투명한 정책들의 특징 가운데 하나”라며 “문체부 차원의 공식적 논의를 찾아보긴 힘든 상황에서 문화창조융합벨트 사업은 외부에서 꽂힌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실제 정부의 모든 입찰 과정이 드러나는 시스템 ‘나라장터’를 보면 문화창조융합벨트의 경우 사업이 시작되고 나서야 정부 쪽 연구가 시작된다.
그에 앞서 또 한 가지 공교로운 시기가 있다. JTBC가 입수한 ‘최순실의 태블릿 PC’를 보면, 최순실씨는 2013년 9월 이미 ‘창조경제타운 구축 홈페이지’ 시안을 받아 봤다. 공직 경험이 전무한 김종 전 문체부 차관이 임명된 것이 2013년 10월이다. 역시, 우연일 뿐일까.
이에 대해 문체부 관계자는 “김종 차관이 부임한 뒤 창조경제 사업의 주도권이 문체부로 넘어오기 시작했다. 매개는 ‘한류’와 ‘평창’이었다”고 말했다. 김종 전 차관은 2014년 최순실씨의 딸 정유라씨를 둘러싼 일에 매진했다. ‘살생부’를 받아 대한승마협회를 정리하고, 승마협회 회장사도 바꾼다. 세월호 참사 다음날에도 VIP의 뜻임을 강조하며 승마협회 관련 보도를 청탁했다. 그리고 2015년 문화창조융합에 본격 손대기 시작한 것일까. 더 좁힐 수도 있다. 2015년 1월 최순실·김종·차은택은 과연 무슨 일을 했던 것일까. 단언컨대, 문화창조융합벨트는 그 한 달 동안 아무도 모르게 태어난 괴물이다.
김완 기자 funnybone@hani.co.kr전화신청▶ 02-2013-1300 (월납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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