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은 이중적이다. 장벽이면서 관문이다. 두 개의 세계를 갈라놓는 동시에 연결한다. 그 경계의 성격이 모두 같진 않다. 국경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소통의 정도에 따라 교류가 완전히 폐쇄된 ‘소외적 접경지역’부터 부분적 만남을 허하는 ‘공존적 접경지역’, 모든 부문에서 친숙하고 협력적인 주민 관계가 나타나는 ‘상호의존적 접경지역’ 또는 ‘통합적 접경지역’이 존재한다고 설명한다. 영구한 경계는 없다. “개발 역사에서 소외됐던 접경지역은 개방화·세계화와 함께 지리적 근접성과 상호보완성을 바탕으로 협력과 통합의 장소로 새롭게 성장하고 있다.”(이옥희 북한대학원대학교 초빙교수) 시간의 문제일 뿐 접경은 결국 폐쇄에서 개방으로 나아간다는 것이 접경 연구자들의 결론이다.
신의주와 단둥, 만포와 지안, 혜산과 창바이, 남양과 투먼. 역사가 쓰인 이래 한반도와 광활한 중국 대륙을 연결하는 접경지역은 문 닫으려는 위정자들과 넘나들려는 변방 주민들이 버티어 대항하는 장이었다. 지세가 험해 발해 멸망 이후 발길이 끊겼던 압록강·두만강 연안 접경지역에 한민족이 다시 등장한 것은 조선왕조 이후다. 여진족의 노략질을 막기 위해 태종과 세종은 4군6진을 설치했다. 변경은 봉금령으로 봉쇄됐다. 가난한 조선의 농민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국경을 넘어 먹을거리를 찾았다. 17세기 이래 청 왕조 역시 지금의 훈춘 지역을 청조의 발상지로 여겨 군사·행정 중심을 설치하고 국경을 집중 관리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역시 큰 가뭄 앞에 국경은 별 의미가 없었다.
국경은 장벽이면서 동시에 관문이다. 중국 랴오닝성 단둥시의 중조우의교(압록강철교)는 외부 세계와 폐쇄국가 북한을 연결해주는 회로다.
문헌에는 1831년 압록강 상류 린장 지역에 처음으로 조선 이주민이 등장했다고 기록돼 있다. 일시적 월경이 아니라, 정착을 의미하는 기록이다. 이후 린장에는 뒤이어 수십 명의 조선인이 들어와 고려문·고려성 등 마을을 이뤘다. 가난한 이들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섞여들어 황무지를 개척했다. 압록강 상류에는 조선인이, 하류에는 만주족과 산둥성 이주민이 먼저 들어와 자리를 잡았다.
조선인들의 폭발적인 이주는 1910년 일제의 토지 강점과 함께 이루어졌다. 평안도·함경도 농민들의 생계형 이주 말고도 남부 지역의 농민과 상인, 항일 투사들의 이주도 줄을 이었다. 대륙 진출을 꾀하는 일제가 자본을 대 건설한, 평북 신의주~중국 단둥시를 연결한 압록강 철교(압록강 단교)는 아이러니하게도 조선인들의 탈출도 부추겼다. 철교 건설 이후인 1920년에 압록강 북쪽의 조선인 인구는 30만 명을 넘겼다.
효율적 약탈을 위해 일제가 건설한 철도·항구 등 기반시설들은 중-조 접경도시들에 전례 없는 성장을 가져왔다. 항일투쟁을 위해 국경을 넘은 조선인들을 감시·통치하기 위해 옌지와 룽징이 (일제의) 행정 중심지로 개발됐고 투먼과 훈춘은 상업 중심지로 성장했다. 한적한 소도시였던 단둥과 신의주 역시 일본이 철도를 부설하면서 반도와 대륙을 연결하는 관문 구실을 하게 됐다. 제국주의 침탈 과정에서도 ‘경계’보다는 ‘연결 통로’로서의 기능이 더 강화된 것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북한 접경지역은 국경을 수비하는 군사적 방어기지 기능보다 사회·문화적 교류나 경제 교역의 통로 역할이 컸다”는 게 이옥희 교수의 설명이다.
‘약탈의 전진기지’로서 역할은 오래가지 못했다. 변경도시는 정치 상황에 따른 부침을 겪을 수밖에 없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일제의 패망과 함께 변경도시들의 위상도 추락했다. 사회주의를 택하고 문을 걸어 잠근 북한과 중국 사이에서 변경은 고립된 채 쇠락했다.
자생적 교류까지 소멸되지는 않았다. 기록을 보면 1954년 중국식품공사·북한무역공사가 옌볜 지역에 거주하는 조선족의 요구를 받아들여, 양국의 접경지역 주민이 국경 해관(세관)에서 중국 인민폐를 기준으로 가격을 결정하고 ‘바터무역’(물물교환) 방식의 교역을 할 수 있도록 승인한 내용이 있다. 만주 지역에 이주해 자리잡은 조선족과 북한 화교들이 그 중심에 섰다.
1990년대 사회주의권의 몰락으로 북한 경제가 침체기에 들어갔지만, 이 시기 중국의 개혁·개방으로 상품경제가 크게 발달하면서 북-중 접경은 다시 번영의 기회를 맞았다. 정은이 경상대 연구교수는 “‘격차’가 교역을 부추겼다”고 설명한다. 생필품이 부족한 북한의 친척에게 중국 거주 조선족이 생필품을 가져다주면 몇 배의 이익을 남길 수 있었고, 화폐가치가 낮은 북한에서 저렴한 수산물을 중국 내륙지방에 가져다 비싼 값에 팔 수 있게 되었다.
1982년 북-중 양국은 연고가 있는 가정에 민간 왕래를 공식 허용했다. 이후 조선족과 북한 화교는 본격적인 무역 통로 구실을 하게 된다. 이들은 통행증만으로 한 달 가까이 친척집에 체류할 수 있었다. 이들 덕분에 1995년까지 북한의 대중 무역 가운데 변경 무역이 차지하는 비율은 80%에 육박했다. 그중 70%가 보따리 장사였다. 조선족이 밀집한 옌볜 지역의 대북무역 수출입 총액은 2000년대 들어 해마다 20% 넘게 성장했다. “북한에서는 물건, 사람, 돈, 정보가 접경도시를 중심으로 집결돼 북한 전역으로 파급되었다. 이러한 접경도시의 기능은 1990년대 북한에서 사실상 배급제가 붕괴되고 외부 세계와 차단된 상황에서 더욱 강화되었다.”(정은이 교수)
한국이 북녘 땅을 ‘위협’이기보다 ‘기회’로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 이즈음이다. 북-중 접경지대에서 벌어지는 ‘동포경제네트워크’에 분단선 이남의 한국인이 다시 등장한 것은 1988년 ‘7·7 선언’ 이후다. 그 직후 코오롱상사가 위탁가공으로 셔츠·가방 제작을 성사시켰다. 1996년에는 한국 기업의 대북 투자협력이 시작돼 대우 기업이 남포공단에 북한의 삼천리 총회사와 합영회사를 설립하기로 합의했다. 한-중 수교(1992년) 이후 북-중 접경지역 관광객의 절반은 한국인이 차지했다.
그러나 이 모두 5·24 조치 이전의 일이다. 2010년 5월24일, 이명박 정부는 천안함 사태 등을 이유로 ‘남북교역 중단’ ‘방북 불허’ ‘대북 신규투자 금지’ 등 대북제재를 선언했다. 관문인 동시에 장벽인 국경이 닫히는 것은 순식간이다. 5·24 조치로 장벽에 갇힌 것은 북한만이 아닌 듯하다. 북-중 접경무역의 한 축을 거머쥐었던 한국 기업가들이 20여 년 동안 터 닦은 접경지역에서 지도에도 없는 변경으로 밀려났으니 말이다.
, 이옥희, 푸른길, 2011
, 동북아역사재단, 2013
‘동포경제네트워크의 형성 과정과 북한의 개방’, 62권, 정은이,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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