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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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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발 햇볕정책에 옷 벗기 시작한 북한

남북 교류 끊긴 사이 서로 실리 챙기며 더욱 끈끈해진 북-중 관계… 예속화 걱
정스러운 한편 중국과의 경협이 북한의 실질적 변화 이끌 것이라는 전망도 나와
등록 2015-03-20 17:37 수정 2020-05-03 09:54

고속도로는 한산했다. 30여 분을 달리는 동안 차량은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고속도로 양옆으론 드물게 농가가 보일 뿐이다. 지난 2월24일 오전 두만강 하구에 위치한 중국 훈춘시 취안허(권하)세관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동북의 한적한 농촌 지역까지 시원하게 깔린 고속도로는 오늘이 아니라 내일을 위한 것이다. 취안허세관을 지나면 도달하는 곳이 북한의 나진항이기 때문이다.

지난 2월24일 북한 나진항과 중국 지린성 훈춘시를 연결하는 취안허세관 앞을 경비병들이 지키고 있다.

지난 2월24일 북한 나진항과 중국 지린성 훈춘시를 연결하는 취안허세관 앞을 경비병들이 지키고 있다.

북-중 수교 60년을 맞은 2009년 원자바오 총리의 방북을 계기로 중국 국무원은 ‘창지투(창춘·지린·투먼) 개발계획’을 국가전략으로 정식 비준했다. 지린성의 중심도시인 창춘과 지린에 산업도시 클러스터를 만들고 옌지·룽징·투먼을 개발의 전진기지로, 훈춘과 북한의 나진을 연계해 대외 창구로 만드는 구상이다. ‘항구를 빌려 바다로 나가는’ 이 전략에서 나진항의 역할은 핵심적이다. 동북3성에서 황해의 다롄항을 통해 운송하는 물류를 나진항으로 옮겨 중국 남부 지역으로 실어나르면 1t당 10달러 이상의 물류비를 아낄 수 있다.

중국 무역 의존도 88%까지 치솟아

이를 위해 2011년 개통한 투먼~훈춘 간 고속도로(길이 62.7km)에 중국 정부가 투자한 돈은 34억6천만위안(약 5770억원)이다. 중국은 오는 10월 지린~훈춘 간 총길이 360km의 고속철도 개통도 앞두고 있다. 동북아 물류 거점을 노리는 훈춘시는 지린성 정부의 지원을 받아 외자 유치에도 적극 나서는 중이다. 훈춘시 접경에선 150만m²의 방대한 부지에 건설 중인 포스코-현대 물류기지도 눈에 띈다. 아직 휑뎅그렁한 풍경이다. 가이드로 동행한 조선족 동포는 “겨울 비수기인데다 춘절 연휴로 세관에 사람이 없는 것 같다”고 전했다.

취안허세관 앞 도로는 원래 나선 지역으로 건너가는 화물차량과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뤄 랴오닝성의 단둥시와 함께 북-중 교류 열기를 확인할 수 있는 곳으로 꼽힌다. 2013년 북한은 대내외적으로 혼란을 겪으면서도 역대 최대 무역량을 달성했다. 5·24 대북제재 조처로 남북경협이 퇴보한 사이 북한과 중국은 ‘신 북-중 경협 시대’라 불릴 정도의 새로운 단계에 진입하는 중이다.

1990년 북한 전체 무역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25%에 지나지 않았지만 2012년에는 88%까지 치솟았다. 원래 북한은 대남 교역에서 취한 흑자로 대중 교역 적자를 상쇄하는 ‘삼각 구조’를 유지해왔지만 한국과의 거래가 끊기면서 중국 경제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됐다.

“북-중 경협 강화는 앞으로도 시장적 관행들의 제도화를 비롯한 북한 경제의 변화에 기여할 것이다. …이런 변화의 흐름이 이어지는 가운데 남북경협이 다시 활성화된다면 북한의 변화를 가속화할 수 있을 것.”-이상근 연세대 북한연구원 연구교수

중국의 대북 투자액 역시 매년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신고된 투자액만 따져도 2004년 2천만달러에서 2013년 5억8600만달러로 급격히 증가했다. 2009년까지만 해도 중소업체 위주였던 대북 투자기업의 구성도 변했다. 2010년부턴 정부계 기업들의 투자가 늘어났다. 중국유색광업유한회사, 롼허국제그룹 등 국영기업이나 대형 상장기업들의 투자 참여가 두드러진다. 최근 몇 년 새 중국 노동자들의 인건비가 상승하면서 중국이 북한과 합영회사를 설립하고 경공업 제품을 위탁가공으로 생산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중국의 최저임금 평균은 2014년 기준 월 3천위안(약 53만원) 정도인 데 견줘, 북한 노동자의 평균임금은 월 1500위안(약 26만원) 정도로 절반 수준이기 때문이다.

실리·명분, 마다할 이유 없는 중국

2013년 3차 핵실험과 그해 말 북-중 경협에 앞장서온 장성택의 처형으로 북-중 교류가 정체 상태에 머물고 있다는 주장도 있다. 실제로 2014년 북-중 교역량은 전년도인 2013년 65억4653만달러에 비해 약 2.8% 감소한 63억6363만달러다. 지지부진한 황금평 경제특구 개발, 단둥시내 단둥~신의주 간 신압록강대교 개통 지연 등이 그런 의구심을 부추긴다. 이같은 우려를 불식하려는 듯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지난 3월9일 베이징에서 열린 전국인민대표대회 회의 지린성 대표단 심의에 참석해 “신창타이(新常態·New Normal)에 적응해 동북 지역의 낡은 공업기지 진흥을 깊이 있게 추진해야 한다. 주변국 및 지역과의 교류협력을 강화해야 한다”고 발언했다. 북-중 경협의 건재함을 확인시킨 셈이다. 동북아 정세 안정이라는 대승적 의미뿐 아니라 동북3성 진흥을 통한 지역 불균형 발전 해소, 값싼 노동력과 자원이라는 실익까지, 중국이 북한과의 교역을 마다할 이유는 없어 보인다.

이런 까닭에 5·24 조처 이후 북한 경제가 중국 경제에 지나치게 예속되고 있다는 우려가 지속적으로 나오고 있다. 김형덕 한반도평화번영연구소장은 “북한으로선 한·미·일 등 서방과의 교류가 봉쇄된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북-중, 북-러 교류가 출구일 수밖에 없다. 북-중 경제협력은 장기적으로 북한이 원치 않더라도 북한 경제가 중화경제권으로 편입, 의존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김 소장은 “북한의 지하자원 개발에 중국의 자본이 많이 투자됐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대안이 없는 북한으로선 값싸게 중국에 자원 등을 팔 수밖에 없다. 이로 인한 피해는 나중에 한국이 고스란히 지게 될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반면 ‘북한을 개혁·개방으로 이끄는 측면에서는 남북경협보다 북-중 경협의 효과가 클 수 있다’는 주장도 새롭게 제기되고 있다. 중국과의 경제협력이 남북경협과는 달리 북한을 실질적으로 바꾸고 있다는 지적이다. 2011년 이후 북한은 대외 경제협력 관련 법률들을 대대적으로 뜯어고치는 중이다. 외국 기업의 사용기간 내에 토지의 임대·양도·저당·상속 등을 가능하게 했고, 가격 결정이나 파산 등도 기업이 결정할 수 있게 했다. 2011년 12월 개정된 ‘라선경제무역지대법’과 ‘황금평, 위화도경제지대법’에는 기업의 독자성 보장, 시장원리의 준수 등이 명시돼 있어 눈길을 끈다. 아울러 개성공단 입주기업들의 숙원으로 꼽혔던 ‘3통(통행·통신·통관) 문제’도 “우편, 전화, 팍스 같은 통신수단을 자유롭게 리용할 권리”를 명문화함으로써 해결의 기미를 보이고 있다.

견제할 것 아니라 함께 개방 유도해야

이상근 연세대 북한연구원 연구교수는 지난해 발행된 에 기고한 논문 ‘북-중 경협 강화와 한반도의 미래’에서 이런 변화들을 지적하며 “북-중 경협 강화는 앞으로도 시장적 관행들의 제도화를 비롯한 북한 경제의 변화에 기여할 것”이라며 “이런 변화의 흐름이 이어지는 가운데 남북경협이 다시 활성화된다면 북한의 변화를 가속화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북한의 개혁·개방 가능성이 처음으로 가시화하고 있는 상황에서 북-중 경협 강화에 대한 대응의 우선적 목표는 중국의 영향력을 견제하는 것이 아니라 북한의 개혁·개방을 본격화하는 것이어야 한다.”

훈춘·투먼(중국)=엄지원 기자 umkij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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