접경은 1990년대 중국의 개혁·개방 이후 북한인, 한국인, 탈북자, 북한 화교, 조선족 동포 등 다양한 국적과 정체성을 가진 경계인들이 모여들어 서로를 이용하고 견제하며 실리를 구하는 곳이 되었다. 때론 같은 민족으로, 때론 경쟁적인 이방인으로 만나는 한반도 밖의 ‘조선 사람들’은 통일을 위한 귀중한 자산이고 마중물이다.
그동안 국내 언론은 이런 점이지대의 다층적 성격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채 남북관계의 표피를 더듬거나 북한의 정치·경제적 위기를 점쳐보는 척도로서만 접경지역을 보도해왔다. 밀수 현장, 가난한 북녘 동포, 북한 경비대의 살풍경이 분절적으로 보도되는 가운데 접경의 다양한 가능성은 배제됐다.
접경은 통일 한반도의 미래다. 은 지난 2월23일~3월4일 열흘간 중국 랴오닝성 단둥을 중심으로 지린성 옌지·지안·훈춘·투먼을 취재하며 한반도의 경계인들을 만나고 그들의 삶을 들여다보았다. 남과 북을 징검다리처럼 이어주는 그들을 이해하고 나아가 ‘이용’하지 않는다면 ‘통일 대박’은 신기루에 불과할지 모른다. 각자의 생계 또는 생존에 영향을 줄 수 있어 이름·소속 등은 일부 고쳐 썼다. _편집자
“야, 이거 어디로 갔네? 담배 어따 두간?” 한 무더기 비닐봉투를 싸안고 조길룡(49·가명)씨가 달려와 묻는다. 차 떠날 시간인데 느긋한 장영진(36·가명)씨에게 원망스런 기색이다. 하얀 비닐봉투에 중국산 과일사탕이 가득 담겨 있다. 장씨가 유난스럽게 군다는 듯 담배를 땅바닥에 툭 버린다. “거, 와 이렇게 보채네.” 투덜거리며 주차돼 있던 차 뒷문을 열고 일제 담배 한 보루를 꺼내 조씨에게 건넨다. 조씨는 장씨가 들어주든지 말든지 손목에 찬 시계를 들여다보며 반쯤 욕지기를 섞어 군소리를 중얼거렸다.
3월2일, 오후 4시를 조금 넘긴 시각이었다. ‘조선’에서 물건을 싣고 들어왔던 화물차들이 다시 중국 물건을 싣고 단둥(중국 랴오닝성)을 떠나는 시간대다. 북한 신의주에서 단둥으로 연결된 중조우의교(압록강철교)의 절반은 철도, 나머지 절반은 도로다. 도로를 통해 화물차량이 매일 북-중 국경을 넘나드는데, 일방통행 도로여서 2시간씩 교대로 차량이 오간다. 오전 9시 중국 차량이 북한으로 건너가면 오전 11시 북한 차량이 건너오는 식이다.
조씨는 화물차 기사들이 싣고 내리는 화물들과 아무 관련이 없다. 그날그날 조선에서 온 화물차 기사들이 북쪽 사람들에게 부탁받아 중국 현지에서 구입해가는 자잘한 물건들을 대신 구입해주는 일을 한다. 이날 조씨는 사탕, 담배, 그리고 그가 도무지 ‘알 수 없는 물건’을 부탁받았다. 급히 이것저것 물건을 사다 날라야 하는 조씨를 대신해 장씨가 물건을 사다준 터다.
자리를 뜨려던 조씨가 다시 장씨에게 종이쪼가리에 인쇄된 사진 하나를 내민다. “야, 이거이 뭐이네? 난 이거 아무리 봐도 모르겠어.” USB 단자를 컴퓨터에 여러 개 연결할 수 있도록 만든 멀티 USB 포트였다. 거래를 위해 스마트폰을 쓰긴 하지만 앱 하나도 남의 도움을 받아야 설치할 수 있는 그가 이해할 수 없는 물건이긴 했다. 장씨가 용도를 설명해주자 조씨는 그것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지만 일단 쪽지를 들고 시장 안으로 뛰어 들어간다. 북한 ‘따이공’(보따리장사꾼)들이 옷, 화장품 등을 사가는 신류시장이다.
장사라면 장사고 심부름이라면 심부름이다. 심부름을 해주고 조씨는 건당 20~30위안(약 3500~5300원)을 챙긴다. 그렇게 하루 10여 건을 뛰고 200~300위안을 번다. 조선 땅에서 단둥으로 들어온 지 5년여, 모아놓은 돈도 중국에 번듯한 친척도 없는 조씨가 맨몸으로 시작할 수 있었던 유일한 일이 이런 장사다.
조씨는 북한에서 태어난 화교다. 북한 화교 중엔 중국 국공내전 때 피란했다가 정착하거나 한국전쟁 때 중국인민지원군으로 참전했다가 그대로 정착한 이가 많다. 한족인 조씨의 아버지도 조선인 어머니를 만나 북한 땅에 눌러앉았다. 그가 어릴 때만 해도 화교의 처지는 나쁘지 않았다. 1960년대 이전까지 화교들은 북한에서 어느 정도 특권과 자치권을 인정받았다. 북한 화교 대표 조직인 ‘조선화교연합회’는 중국 당국의 지도를 받았다. 1960년 북한 당국이 화교를 대상으로 중국 국적 포기와 귀화 캠페인을 벌이면서 차별이 시작됐다. 화교는 군에 입대할 수도, 당에 가입할 수도 없다. 신분 상승에 제약이 있으므로 할 수 있는 일은 돈벌이였다.
1982년 북-중 정부가 양국에 친척이 있는 경우에 한해 친척 방문을 공식 허가하면서 양국의 조선족과 화교들은 경계를 넘나드는 보따리장사로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중국 정부가 개혁·개방에 나서면서, 자유롭게 양국을 넘나들며 두 개 언어를 구사하는 화교들의 살림도 좋아졌다. 중국에서 생필품을 공수해오는 화교들을 북한 사람들은 ‘중국집’이라고 부른다. 조씨의 부모도 그런 중국집이었다.
조씨의 살림이 어려워진 건 너도나도 장사에 뛰어들면서다. 1990년대 이후 사실상 배급이 끊기고 장사를 하지 않으면 먹고살기 어렵게 되자 북한 사람들도 너나없이 장사를 시작했다. 국경과 거리가 먼 중국집의 장사는 ‘비교우위’에서 뒤처질 수밖에 없었다. 돈을 벌려고 조씨는 아내와 아이도 두고 중국으로 들어왔다.
그곳에 희망은 더 없다
40여 년을 북한에서 살았던 조씨는 중국말을 거의 하지 못한다. 사람들이 자신을 가리켜 ‘화교’라고 하니 그렇다고 할 뿐이다. 한족인 아버지를 여의고 조선인 어머니 아래서 자랐으니 누가 봐도 조선 사람이다. 식당에 가면 간체로 적힌 메뉴판을 읽지 못해 애꿎은 종업원에게 알아듣지도 못할 욕지기를 퍼붓는다. “중국 음식은 느끼해서 못 먹겠다”며 북한식 명태요리, 온면만 자꾸 찾는다. 그래도 조선에는 더 희망이 없는 것을 안다. 올해 초 그는 영구 귀국을 결심했다. 북한에서 나와 중국에서 지내더라도 1년에 한 번 북한에 돌아가 지내면 북한 영주권을 유지할 수 있다. 하지만 많은 화교들이 조씨처럼 북한을 등지는 중이다. 북한에 남은 화교 인구는 5천여 명에 불과하다.
장씨의 처지는 그보다 낫다. 둘째형이 일찌감치 중국에 들어와 사업을 시작하고 북한에 있는 가족을 차례로 불러들였다. 그는 선양에서 건축자재 사업을 하는 형의 단둥 일을 돕는다. 이따금 사업차 한국에도 간다. 지난해엔 제주도에 다녀왔다. 15년여 전 북한에서 나온 그는 고향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다. 개혁·개방 이후 중국에서 자란 그에겐 폐쇄적인 사회에서 온 사람의 머뭇거림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북한 사람보단 오히려 사업 상대로 만나는 한국 사람들과 가깝다. 여자친구도 화교가 아니다. 여행지에서 우연히 만난 조선족 동포다. 조선 땅에서 자란 한족과 중국에서 자란 조선족이 마음을 나누는 것이니, 폐쇄국가 북한에서 태어났지만 장씨야말로 코즈모폴리턴이다. 그런 장씨지만 ‘조국’ 이야기를 물으면 예민해진다. “거기선 똥떼놈이라 하고 여기(중국)선 조선놈이라고 하니 나도 조국이 어딘지 모르갔시요.”
북한 출신 ‘귀국 화교’ 중 많은 수가 단둥을 새로운 정착지로 삼는다. 친척 방문 허가로 중국에 들어와 일을 하다가 북한으로 돌아가는 화교, 다른 지역에 살다가 기회를 찾아 단둥으로 모여든 귀국 화교들까지 합치면 많게는 인구가 2만여 명으로 추산된다. 북한 화교들이 단둥에 모여드는 것은 이 작은 도시가 북한-한국-중국 삼각무역의 중심지로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평양에서 220km, 서울에서 약 420km 거리에 위치한 단둥은 해마다 북한인 20만 명, 한국인 20만 명이 관광과 사업으로 드나들며 한반도와 중국 사이의 교두보 구실을 맡고 있다. 1960~70년대만 해도 허허벌판이던 소도시가 삼각무역의 중심이 된 이유를 한 가지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1970~80년대 중국의 개혁·개방, 1990년대 북한 경제의 몰락, 1992년 한-중 수교, 남북 경제협력 등 다양한 영향이 화학작용을 일으키면서 천지개벽을 가져왔다.
단둥의 한국인과 북한인, 북한 화교와 조선족 동포, 네 집단을 오랫동안 연구해온 강주원 서울대 아시아연구소 선임연구원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2010년 전후로 네 집단이 서로 관계를 맺으며 살고 있는 것은 새로운 현상 또는 미래형이 아니라 역사적 과정이자 현재진행형임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들에게는 시기적으로 한-중 수교 전후부터 어느 한 집단을 빼고는 단둥 국경지역의 변화상이 설명되지 않는 특수성이 있다.”
이들은 주로 조선족이 밀집해 장사해온 지역인 얼징가의 ‘조선 한국 민속거리’로 모여든다. 단둥시가 단둥세관 바로 앞에 조성한 민속거리에는 북한 식당과 한국인이 운영하는 한인 식당, 조선족·화교 점포 등 150여 개 점포가 두루 모여 있다. 압록강 철교를 건너온 북한 사람들이 가장 먼저 들르게 되는 곳이기도 하다.
‘‘압록강은 바다보다 깊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다. 국경의 삶은 합법과 비법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오갈 수밖에 없다.단둥에서 여러 집단은 관계 맺고 길항하며 성장한다. 중국어와 한국어를 구사할 수 있는 북한 화교와 조선족 동포는 1980년대부터 서로 경합을 벌이며 단둥을 비롯한 북-중 접경지대에서 ‘중개인’으로 성장해왔다. 한국 정부가 재외동포들에게 취업(H2) 비자를 내주면서 중국 동북3성의 조선족들에겐 새 길이 열렸다. 옌볜이나 단둥의 조선족들은 한국에서 돈을 번 뒤 가게를 차리거나, 한국인 사업가 대신 중국 현장의 관리자 역할을 하다 사업체를 차린 경우가 많다. 5·24 대북제재 조처로 북한과 직거래를 할 수 없게 된 한국 기업의 빈자리를 조선족 사업가들이 메우게 된 것이다. 어쨌든 ‘밑바닥’을 떠났다는 이야기다. 그들이 떠난 밑바닥을 채우는 이들이 아직 시장 물정에 어두운 북한 화교들이다. 비슷한 ‘조선’ 출신이라 할지라도, 단둥에서의 노임은 조선족, 북한 화교, 탈북자 순으로 결정된다.
접경지역의 거래 품목들
“‘셀카봉’도 북으로 넘어갑니다”
“사람 장사 빼고는 다 한다.” 중국 지린성의 북-중 접경지역에서 만난 어느 밀수꾼의 말이다. 북한 화교 출신의 밀수꾼 왕아무개(37)씨는 20년 전 북한에서 중국으로 온 뒤 자원이나 약초, 농토산물 등을 밀수 거래해왔다. “뭘 주로 하느냐” 물으니 “하는 품목이 너무 많다”면서도 “할 수 있는 일이면 하고 못하는 일이면 못한다”고 선을 그었다.
왕씨가 ‘조선’에서 최근 주로 들여오는 품목은 잣이다. 1kg에 30원을 받아 2~3원을 남긴다. 밀수라고 해서 푼돈 장사가 아니다. 대개 톤(t) 단위로 거래한다. 1t이면 3천원(약 53만원)가량을 번다. 겨울철엔 압록강이 얼기 때문에 국경에서 트럭으로 바로 실어나른다. 북한 경비대와 세관, 변방대의 눈에 띄지 않을까. “중국 국경경비대는 밥 먹고 살 수 있게 웬만하면 눈감아준다. 북한 경비대나 세관에는 돈도 쥐어주고 한 번씩 노래방에도 데려간다.” 왕씨의 설명이다. 그렇게 해서 버는 돈이 제법 크다. 생활비를 지출하고도 혼자 버는 돈이 연간 20만~30만위안(약 3500만~5300만원)가량 된다니 북-중 밀무역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역시 화교인 장아무개(37)씨는 랴오닝성 단둥에서 반제품 의류나 신발을 북쪽에 수출한다. 일본이면 일본, 중국이면 중국, “바람이 불면 그 사람(북한 주민)들은 따라가니까” 때에 맞춰서 물건을 공급하지만 한국 제품은 손대지 않는다. “아래쪽(남한)이랑 관계된 거는 통제가 심할 때도 있고 합법적으로 나가려면 제동 걸리는 게 많으니까 꺼리지요. 우리는 괜찮은데 가져가는 사람들이 잘못하면 크게 다칠 수 있으니까. 상표 떼고 나가는 건 괜찮지만 그런 거는 한꺼번에 많이 못 나가고 몇십 벌 정도 그렇게 나가지요.”
중국이 북한으로부터 주로 수입하는 품목은 석탄이나 산화철, 선철 같은 지하자원을 제외하면 의류에 집중돼 있다. 중국의 임금과 지대가 오르면서 북한의 접경지역에 공장을 세우고 반제품을 보낸 뒤 완성품을 받는 임가공(위탁가공)이 성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생활에 필요한 물자가 전반적으로 부족한 북한은 원유 같은 자원 말고도 중국에서 거의 모든 식품과 생필품을 사들인다. 중국의 북한 투자가 늘면서 기계 설비 수출도 늘었다. 아침저녁으로 단둥세관을 나가는 중국 화물차량에는 주로 과일과 수산물 등이 실린다. 단둥의 도매시장을 드나드는 중년의 여성 보따리장수들은 프린트해온 종이를 들이밀며 한국 화장품을 찾는다. 패키지에 적힌 한국어는 매직으로 지우거나 떼어내면 세관을 통과하는 일이 어렵지 않다. 단둥 지역의 한 화교는 “개인의 경우 옷가지부터 휴대전화 껍데기까지 안 가져가는 게 없다. 최근에는 한국 기업이 중국에서 만들어 한국으로 들여갔던 셀카봉까지 역수출돼 북한으로 넘어가고 있다”고 귀띔했다.
단둥시내 민박집의 일상을 들여다보면 이들 집단이 얼마나 밀착돼 있는지 이해할 수 있다. 조선족이나 한인 사업가들이 주로 묵는 압록강변의 민박집을 운영하는 사장 김미옥(51·가명)씨는 중산층에 가까운 조선족 동포다. 사업가였던 한국인 남편은 김 사장에게 민박집을 맡기고 한국에서 지낸다. 도우미로 취직해 일하고 있는 리진옥(53·가명)씨는 신의주에서 온 화교다.
조선인 어머니와 중공군 아버지를 둔 리씨는 중국말을 할 줄 모른다. 그는 단둥의 민박집에서 일하다 한국 남자를 만나 탈북하고 한국으로 도망친 동서(시동생의 아내)를 찾기 위해 민박집에 취직했다. 아직 북한 영주권자인 그는 쉬는 시간 짬짬이 나 한국 드라마를 보면서도 “우리 수령님이 있는 조국으로 돌아가 살아야 한다”고 힘줘서 말한다. 문화적 혼종이 가져온 ‘아노미’(사회적 규범의 동요·이완·붕괴 등에 의해 일어나는 혼돈 상태)조차 접경에선 자연스럽다.
강주원 연구원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한 집단이 먼저 터전을 잡은 곳에 나머지 집단이 들어와 섞이는 모습이 아니다. 그 이전 단둥 안에 네 집단과 관련된 문화와 세 나라가 연결되는 요소가 없었다는 점에서 네 집단은 그들의 출생국 혹은 고향이 아닌, 단둥이라는 국경지역에서 함께 국경 문화를 만들어가기 시작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나는 진짜 그런 세상이 있는 줄은 몰랐어요.” 김미옥 사장은 손님들을 만나면 압록강 너머의 믿기 어려운 이야기들을 풀어놓는다. 옥수수 2천 개에 팔려나갈 뻔했다가 중국에 와서 민박집에 취직한 탈북여성, 북한과 중국에서 각각 아이를 낳고도 한국으로 도망친 탈북여성 이야기 같은 것들이다. ‘압록강은 바다보다 깊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다. 국경의 삶은 합법과 비법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오갈 수밖에 없다. 김 사장의 연로한 아버지는 종종 한국에서 지내는 탈북자로부터 돈을 받아 북한의 가족에게 송금해준다. 그는 ‘브로커’ 따위가 아니다. 그저 잘 알고 지낸 탈북자를 위해 사람의 인정에 따라 해주는 일이다.
만남이 금지돼 있는 북한 사람과 남한 사람이 만나기 위해서도 조선족이나 북한 화교들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하다. 인적 네트워크는 중개인 역할을 하는 이들의 자산이다. 북한 화교 조길룡씨의 소개를 받아, 북한 정부가 ‘외화벌이’를 위해 북-중 접경에 파견한 무역주재원 김선일(52·가명) 대표를 만났다. 그 역시 판로 개척을 위해 누구든 절실하게 만나고 싶어 하던 차였다.
중국에 나온 지 4개월 됐다는 김 대표는 아직 중국 생활에 적응하기 어려운 듯 조심스러웠다. “그저 이제 겨우 적응했습니다. 겨우 집 문 앞에 뭐 있다는 거 알구, 우리 처는 중국어를 못하니 감옥살이하는 것과 같지요.” 취재진을 ‘조선족 사업가’로 알고 함께 자리에 나온 김 대표의 아내가 곁에서 살뜰하게 말을 거든다. “계속 가고 싶습니다, 조국에. 우리 아이들은 집에 간장이 어딨는지도 모르는 애들인데 두고 왔으니 밤마다 울지요.”
군을 제대하고 김일성종합대학을 졸업한 당 간부니 최고위층은 아니라도 엘리트다. 그래도 중국에서의 삶은 녹록지 않은 모양이었다. 국장급 간부지만 체류지역에서 단둥으로 오는 길에는 버스를 탔다고 한다. 중국에 올 때는 큰돈을 꿔서 당 자금으로 바치고 왔다. “오자마자 집도 세를 내서 얻어야지, 그러니 나올 때는 돈을 꿔서 나왔지요. 월세가 1600위안(약 29만원)짜린데 우린 좀 묵은 집이란 말이에요.”
기업소 주재원은 월급도 주지 않는 자리라고 했다. “국가가 우릴 대표로 파견했으면 거기 일 해주니까 노임도 주고 그래야 하지만 그런 거 없단 말이야. 규정은 있지. 급수에 따라 중국의 어디에 살면 돈을 얼마 주라는 규정은 있어요. 그런데 우리가 돈 벌어서 넣어줘야 되는 덴데 우리한테 줄 게 뭐이가. 자체로 먹고살고도 1년에 얼마큼 벌어내라 하는 거지.” 알려진 바로는, 북한 정부가 파견한 무역주재원들은 해마다 10만달러를 당 자금으로 내야 한다. 3년 계약을 맺고 해외에 나와 북한이 만든 상품들을 판매하고, 그 수익 가운데 당 자금을 제외한 나머지를 자신이 챙기게 된다. 사업을 잘하면 계약 기간을 연장할 수도 있다.
10만달러면 작은 돈이 아니다. 그래도 돈 벌 일이 요원한 북한에서 외화벌이 일꾼이 되려면 뇌물까지 바쳐야 할 정도로 경쟁이 치열하다. 한국의 일부 언론이 “외화벌이 무역일꾼들이 스트레스로 망명까지 한다”고 보도한 것과는 조금 다른 이야기다. 외국어를 전공한 김 대표의 아들은 대학 졸업 뒤 해외 파견을 신청했지만, 아버지가 먼저 주재원으로 파견되면서 발이 묶였다. “대학 졸업생이 가장 바라는 자리가 그런 자리라구. 우리 아들도 준비하다가 내가 덜컥 되니까 ‘아버지가 해외 나가 있으면 너 못 나간다’ 해서 잘렸지. 내가 빨리 들어가야 그놈이 간단 말이야.” 마음이 조급한 눈치였다. 그는 덧붙였다. “하루하루가 급한 거지. 어케 빨리 뭐라도 해야 되갔는데.”
북-중 접경을 드나드는 이들은 누구보다 경계가 만들어내는 차익에 기민하다. 북한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한국 사람을 만난 사실이 알려진다면 김 대표는 곧장 보위부에 끌려가게 될 것이다. 그는 말했다. “당신들이 본래는 한국인이라도 물건 거래만 된다면야 그거는 나와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나는 조선족인 줄 알고 만난 것 아닙니까.” 돈만 벌 수 있다면 국적도 이념도 ‘일없다’는 말이다. 어쩌면 남녘 공무원의 인식보다 한층 개방적인 표현이었다. 외화벌이라는 벼랑 끝에 내몰린 까닭일까, 아니면 변화에 대한 북한 내부의 기대가 그만큼 큰 까닭일까. 그의 손에 들린 한국산 삼성 스마트폰이 의미심장했다.
외화벌이 위해 예식사업도 나서
북한을 나와 해외로 파견되는 외화벌이 일꾼에는 김 대표 같은 간부급 주재원 말고도 공장·식당 노동자들이 있다. 단둥 외곽의 수산물 가공공장이나 압록강변의 북한 식당·호텔에 가면 쉽게 노동자들을 볼 수 있다. 북한 노동자들의 임금은 월 170달러 수준이다. 이 가운데 절반 이상은 북한 당국이 사회보장금 명목으로 공제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단둥에서 만난 한 한국인 사업가는 “중국 노동자 임금의 절반 수준일 뿐 아니라, 일은 더 잘한다. 게다가 숙식하며 북한 보위부 직원이 노무 관리를 하기 때문에 중국 기업으로선 선호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북한은 5·24 대북제재 조처 이후 기존에 중국과의 무역적자를 한국과의 무역흑자로 메우던 삼각무역을 지속할 수 없게 되자 노동자 해외 파견을 통해 공격적으로 외화벌이에 나서기 시작했다. 한국무역협회 자료를 보면, 중국의 북한 입국자는 2013년 20만7천 명으로 직전 해에 견줘 2배 증가했다. 특히 전체 북한인 입국자 중 노동자는 2010년 5만4천 명에서 2013년 9만3천 명으로 늘었다. 연평균 19.9%의 증가율이다. 노동자 대부분은 본국으로의 이동이 쉬운 접경지역으로 파견되는데 주로 경공업에 종사하게 된다.
기존 외화벌이 창구인 외식사업도 다각화되고 있다. 옌볜조선족자치주의 옌지나 단둥에는 조선족이나 북한 화교가 운영하는 북한 식당이 늘고 있다. 직접 경영하기보다는 인력을 파견하는 쪽이 비용 대비 효율이 높다는 걸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중국의 예식 사업에도 진출하고 있다. 중국인들은 혼례에 비용을 아끼지 않는다. 주말 단둥시내 예식장에 가보면 색동저고리를 입은 젊은 북한 여성들이 일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단기적 측면에선 노동자를 착취한다는 인권침해의 요소가 있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외화벌이 사업이 북한 사회를 변화시키는 데 도움이 될 거라는 전망이 있다. 김형덕 한반도평화번영연구소장은 “이미 중국에서 자본주의 사회를 경험한 이들은 결코 이전의 폐쇄사회로 돌아갈 수 없다. 자꾸 접촉해야 (북한을) 바꿀 수 있다는 점에서 접경지역의 인력 파견은 긍정적으로 볼 수 있는 면이 있다”고 설명했다.
그 접촉의 길이 막혀버린 한국인들에게 번화하는 단둥은 ‘그림의 떡’이다. 한국 기업인들에겐 북-중 접경은 장벽도, 관문도 아니었다. 모든 걸 삼켜버린 거대한 늪과 같았다. 1988년 노태우 정부의 ‘7·7 선언’ 이후 한국 기업들은 발빠르게 대북사업에 뛰어들었고 개성공단 등 본격적인 남북경협 이전에 일반교역의 물꼬를 텄지만 2010년 이명박 정부의 5·24 대북제재 조처 이후 급격히 몰락했다. 5년 만에 3천여 명의 한인 가운데 대부분이 떠나고 1천여 명도 안 되는 이들이 남아 실낱같은 희망을 붙들고 있다.
1997년부터 북한을 상대로 한국의 덤핑상품을 팔아온 이진구(51·가명)씨는 몇 년 전부터 단둥에서 ‘동가식서가숙’하며 지내고 있다. 힘든 사정을 잘 아는 한인 사업가 선후배들을 만나 끼니를 대강 해결한다. 덤핑 물건의 가격경쟁력 하나로 버텨온 10여 년이었다.
돈을 떼어먹히기도 하고, 시장경제에 익숙하지 않은 북한을 상대하느라 손해도 많았다. 다 나중을 위한 비용이라고 생각했다. 교류가 중단되면서 비용은 회수할 길이 없어졌다. “국가가 장려하는 분위기를 만들어놓고 결국 MB 때 다 끝나버린 거 아닙니까.” 2년 전까지만 해도 상표를 떼어낸 한국 물건은 북쪽 세관에서 눈감아주었다. 하나하나 상표를 떼어 다시 포장하는 작업을 해야 했다. 남북관계가 악화 일로를 걸으면서 그나마의 인정도 증발됐다. “언제부턴가 중국산이면 왜 상표를 잘랐냐며 물건을 몰수하더라고요.”
“이젠 기대도 안 해요”
북한 인력을 고용했던 공장들이 ‘올스톱’된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한국인들이 데리고 있던 조선족, 화교들이 다 로반(중국어로 ‘사장’)이 됐습니다. 한국인들이 하던 일, 거래처를 다 가져갔으니까요.” 인천시가 5억원을 들여 세운 단둥의 수제 축구화 공장은 남북경협의 상징으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지만, 지난해 말 북한 노동자들의 월급도 주지 못하고 문을 닫았다. 사장은 도망치듯 단둥을 떠났다. “지난 몇 년 새 단둥에서 한국인들 처지가 ‘한국분’에서 ‘한국놈’으로 떨어졌습니다.”
돈을 벌겠다고 20년을 타지에서 홀로 고생하는 동안 아이들은 다 자라 대학에 다니고 있다. 그 대학 등록금을 내줄 돈이 없어 가족에게 연락하는 일도 면구하다. 이씨는 말했다. “버티고 버텨 여기까지 왔어요. 5·24 조치 해제요? 이젠 기대도 안 해요. 우리끼리는 늘 말하죠. 조국은 우리를 버렸다고.”
옌지·단둥(중국)=엄지원 기자 umkija@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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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스-트럼프, 7개 경합주 1~3%p 오차범위 내 ‘초박빙’
에르메스 상속자 ‘18조 주식’ 사라졌다…누가 가져갔나?
로제 아파트는 게임, 윤수일 아파트는 잠실, ‘난쏘공’ 아파트는?
거리 나온 이재명 “비상식·주술이 국정 흔들어…권력 심판하자” [현장]
노화 척도 ‘한 발 버티기’…60대, 30초는 버텨야
“보이저, 일어나!”…동면하던 ‘보이저 1호’ 43년 만에 깨웠다
이란, 이스라엘 보복하나…최고지도자 “압도적 대응” 경고
구급대원, 주검 옮기다 오열…“맙소사, 내 어머니가 분명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