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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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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을 넘어 변경을 상상한다

‘우리만 끼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던 접경지대 취재기…
분단 70년, 새로 쓸 한반도의 역사는 한국어문화권 화해라는 목표 향해야 하는 것 아닐까
등록 2015-03-20 17:33 수정 2020-05-03 09:54

며칠 동안, 귀가 호사를 누렸다. 중국 랴오닝성의 단둥에서 어느 때보다 다채로운 우리말을 들었다. 걸쭉한 호남식 입담을 구사하는 한인 사업가, 말쑥한 서울 말씨를 쓰는 한국 대기업의 현지 임원, 평안도 계통의 방언이라는 차진 우리말을 구사하는 조선족 여성, 단어는 다르지만 서울말처럼 단정하고 그보다 느긋한 평양 말씨를 구사하는 북한 관료, 조금 공격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무뚝뚝한 함경도와 황해도 말을 하는 북한 출신의 화교들. 한반도를 포함한 세계 어느 곳에서 이처럼 다양한 우리말을 접할 수 있을까. 그 말들이 어울려 이리 튀고 저리 엉기는 것을 역사의 장막이 허락하지 않았다. 서글픈 일이다.

긴장되고도 설레었던 낯선 우리말

낯선 억양의 목소리들과 대화를 나누는 일은 긴장되는 한편 설레었다. 부인을 대동하고 점심 자리에 나온 북한 관원은 점심부터 거나하게 백주를 들이켰다. 군을 제대하고 뒤늦게 대학에 진학해 어린 학우들과 공부하느라 애먹은 이야기부터, 지금의 아내를 만나 연애하게 된 과정까지 초면에도 숨기는 일 없이 사적인 이야기들을 풀어놓았다. 옆자리에 앉은 그의 아내도 남편의 못난 외모 흉도 봐가며 적당히 대화를 거들었다. “정치 이야기만 빼고 무엇이나 이야기 나눈다”는 것이 암묵의 규칙이라고 접경에서 만난 사람들은 나에게 코치해주었다.

그의 말이 모두 사실인지, 지금은 확인하기 어렵다. 다만 이쪽에선 조금 더 거짓말을 해야 했다. ‘한국인’이라고 하면 그는 애초에 나를 만나주지 않았을 것이다. 역정을 내고 도중에 나가버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청도에서 선생 일 하는 조선족입니다.” 통했을지는 몰라도 공연히 조선족의 말씨를 흉내 내어 말하기도 했다. 그를 만날 때만이 아니다. 북한 화교, 조선족, 접경지역의 어떤 주민을 만나건 이름도 출신지도 하는 일도 자꾸 속여야 했다. 기자 일을 시작하고 처음 시도한 ‘언더커버’(위장) 취재였다.

북-중 접경은 북한만의 땅도, 중국만의 땅도 아니다. 근대 국민국가를 넘어서 이질적인 문화가 혼종을 이루는 변경이다. 지난 2월23일 중국 옌볜조선족자치주 옌지시의 거리 풍경에 한글 간판들이 눈에 띈다.

북-중 접경은 북한만의 땅도, 중국만의 땅도 아니다. 근대 국민국가를 넘어서 이질적인 문화가 혼종을 이루는 변경이다. 지난 2월23일 중국 옌볜조선족자치주 옌지시의 거리 풍경에 한글 간판들이 눈에 띈다.

접경은 열려 있는 동시에 닫힌 공간이다. 환하게 웃으며 다가오는 이들이 실은 우리네 국가정보원 구실을 하는 북한 국가보위부원일 수 있다. 국경에서 만난 이들은 거듭 나에게 물었다. “그런데 뭘 그렇게 꼬치꼬치 물어보시오? 혹시 안기부 직원 아니오?” 달리 민감한 이야기를 나눈 것도 아니건만 이야기를 나누다 “여긴 안기부 직원이 있을지도 모르니 편안한 데로 가자”는 이도 있었다. 한국 물정을 속속들이 알진 못해도 한국 뉴스는 꼼꼼히 챙겨보는 이들이다. 북-중 국경지대에서 여러 ‘조작간첩’을 꾸며 만든 국가정보원의 뉴스를 모를 리가 없다. 불편한 일은 미리 막고 보자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기자’에 대한 불만이 큰 것은 의외였다. 기자 신분을 밝히기도 전에 사람들은 경계를 드러냈다. 단둥세관 근처에서 단지 뒷모습을 소리 없이 찍기만 해도 “왜 몰래 사진을 찍냐. 그거 찍어서 또 어디에 방송하려고 하느냐”고 항의하거나 사진을 삭제하라고 요구하는 일이 여러 번 있었다. 북한 여공들이 근무하는 공장 역시 북한 당국과 중국 고용주 사이의 제1원칙이 한국 언론의 출입을 막는 것이라고 들었다. 단단한 알레르기 반응이다.

이유를 알 만했다. 북한 화교인 밀수꾼을 만나려는 자리에 동행한 밀수꾼의 친구는 툭 던지듯 경고했다. “거, (만나자는 이유가) TV조선이나 설마 그런 일 쪽으론 아니겠지요? 얘는 내 친구고 동창이고. 내가 옆에서 보면 (취재하는 걸) 허용도 안 할 테지만.” 또 다른 북한 화교는 “TV조선을 즐겨 본다”고 말했다. “TV조선 그거 재밌더라구. 북한에 대한 것도 많이 나오고. 아침에 일어나면 보고 밤에 들어가면 봐.”

TV조선, 신뢰하기 어렵지만

북한 출신 화교들 사이에서 TV조선이 악명과 명성을 쌓은 것은 지난해 여름 조선미디어그룹이 한 연구자와 함께 중국을 오가며 만들었다는 북한 주민 100명 인터뷰 때문이다. 대대적인 홍보와 함께 “이석기, 북한에선 처형” “장성택 처형 끔찍했다” “김정은에 불만 가득?”과 같은 제목의 기사 꼭지를 여러 개 방영했다. 한 남북문제 전문가는 “접경지역에서는 인터뷰를 하고 돈을 받을 수 있다면 신분을 속이는 일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보도를 신뢰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한반도 문제에 대한 건강한 제안이 없는 자극적인 보도에 그친 것도 우려스럽다. 한 북한 화교는 “40~50%는 (TV조선의) 정보가 과장된 거지만 그래도 그냥 보면 재밌다”고 말했다.

북한 화교, 조선족, 접경지역의 어떤 주민을 만나건 이름도 출신지도 하는 일도 자꾸 속여야 했다. 기자 일을 시작하고 처음 시도한 ‘언더커버’(위장) 취재였다.

객관적인 사실 여부를 떠나 우상화된 1인자를 희화화하고 조롱하는 것만으로 어떤 사람들에게는 남한의 종합편성채널을 볼 이유가 충분할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이들에겐 다르다. “나한테는 하느님이고 수령님이오.” 북한을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한 화교 여성은 김정은 위원장을 비판하는 말에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이야기를 꺼내기까지 그와 대화를 나누는 일엔 막힘이 없었다. 한국 방송을 즐겨 보고, 한국 트로트 가수 박상철의 를 좋아해서 세관 몰래 USB에 노래를 담아가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복사해주고 나눠 들었다는 이다.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모르지만, 그는 여전히 북한에서 한국 드라마나 영화를 봤다가 발각되면 총살당하며 총살당하는 걸 자신이 직접 본 적도 있다고 했다. 말하자면 목화씨를 숨겨간 문익점처럼 ‘목숨을 걸고’ 한국 ‘뽕짝’을 퍼트렸다는 이야기다.) 한국 문화를 좋아하고 한국 사람과 대화 나누기를 즐겨하며, 한국 사회에 거리낌이 없는 평범한 북한 출신 주민과 굳이 정치적 문제로 다툼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그제야 느꼈다. 확신에 찬 그의 얼굴은 어떤 정치적 과실에도 흔들림 없이 박근혜 대통령을 지지하는 한국의 중년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박근혜와 김정은을 비교하는 불온함에 대해 불편한 이들이 있을 수도 있겠다. 두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두 사람을 지지하는 이들에 대한 이야기다. ‘정치에 대한 이야기를 뺀다면, 어떤 이야기든 나눌 수 있다’는 접경지역의 룰을 당분간 남과 북에 적용할 수는 없을까.

정치 이야기 아니라면 어떤 이야기든

압록강과 두만강 국경을 서성이며, 줄곧 ‘우리만 끼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단둥의 마사지숍을 가면 조선족 사장은 무람없이 “북한 주재원들도 우리 단골”이라고 말했다. 북한이 외화벌이를 위해 적극적으로 관광객을 유치하고 있는 나진항에 차량으로 관광을 다녀온 조선족 동포는 “차 안에선 북한 애들이랑 한국 노래도 듣고 어떤 농담이나 주고받았다”고 모험담처럼 전했다. 북한 화교들에겐 낮에 신의주에 갔다가 밤에 제주를 가는 일도 아무렇지 않다. 조선의 말을 나눠 쓰고 역사를 함께 기억하는 이들이 한반도 바깥에서 나누는 일에 우리는 왜 함께할 수 없을까. 단순히 남북한만의 문제가 아니다.

“아버지 가져다드리시라요.” 취재 중 만난 북한 화교는 단둥을 떠나던 날, 북한에서 가져온 미역과 북한산 담배를 바리바리 싸주었다. 또 다른 화교는 “드릴 것도 없는데 중국차나 가져다드시라”며 차를 한 상자 챙겨주었다. 중국 옌타이에서 사업을 하는 조선족 동포는 “옌타이에 놀러오라”며 손을 꼭 쥐었다. 신분을 속이고 만났던 북한 주재원 부부와는 “다음에 다시 만나자”며 악수를 나눴다. 그럴 때마다 이산가족의 일원이라도 된 것 같은 감상에 울컥했다. 한국 사회가 ‘변방’이라고 여기던 이들이 처음 만난 한국인에게 베풀어준 환대에 공연히 숙연해졌다.

(강주원)의 표현을 빌리자면, 단둥 사람들은 압록강 너머 신의주에 발을 올려놓아도 배에서 손만 놓지 않으면 국경을 침범한 것이 아니라고 여긴다고 한다. 이런 사고는 “등안(登岸)은 했지만 월경(越境)은 하지 않았다”는 말로 정리된다. 단둥 사람과 신의주 사람에게 압록강은 양 국가를 연결하는 경제적 수단이다. 국경이 그들의 교류를 제한하거나 단절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교류와 공유의 가능성을 높인다. 국가의 시선으로 보면 비공식적이거나 불법적인 만남과 교류도 이미 압록강변의 사람들에게는 국가의 잣대를 떠나 일상의 한 부분이 된 까닭이다.

교류와 공유의 가능성 높이는 국경

분단 70년, 새로 쓸 한반도의 역사는 남북한의 통일이라는 관념적인 목표가 아니라 근현대사의 상처로 흩어진 동포경제 내지 한국어 문화권의 화해라는 현실적인 목표를 향해 가야 하는 것이 아닐까. “변경이란 근대 국민국가의 엄격한 국경과 대비되는 개념으로, 다양하고 유연한 이질적인 문화가 만나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가는 역사적 공간”이라고 임지현 한양대 교수는 썼다. 그는 “국경을 기준으로 과거를 배타적으로 점유하려는 시각에서 벗어나 다양한 문화가 충돌·혼합되는 경계지역의 역동성을 주변의 시선에서 새롭게” 볼 것을 제안했다. 남북한의 대결을 벗어나 화해로 가는 길에 필요한 건 어쩌면 처음 본 남한 사람에게 먹을 것을 싸주고 다음을 기약하던 ‘변경’의 유연함이 아닐까. 낯선 억양에 귀기울였던 변경의 밤이 벌써 그리워진다.

엄지원 기자 umkij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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