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된 땅에서, 전쟁이 벌어지기까지는 채 5년이 걸리지 않았다. 이념에 따라 남과 북으로 갈라선 동족은 1950년 6월25일 그예 전쟁에 뛰어들었다. 서로 피칠갑을 한 채, 3년1개월하고도 이틀을 더 싸웠다. 전쟁은 1953년 7월 27일 체결된 정전협정에 따라, 그날 밤 10시에 잠정 중단됐다. 올해는 정전협정 체결 60주년이다. 그런데….
“오늘 아침 곰곰이 생각해봤다. 아마도 한국전쟁 이후 처음이 아닌가 싶다. 북한과 한국-미국 사이에 지금처럼 긴장감이 높았던 때는 없었던 것 같다. 사령관께서도 동의하시나?”
지난 4월9일 오전 9시30분께(현지시각), 미 워싱턴 중심가에 자리한 상원 더크센빌딩 SD-G50 회의실. 상원 국방위원회는 새뮤얼 로클리어 미 태평양사령관을 출석시킨 가운데 청문회를 열었다. 2014년 국방예산안과 향후 국방정책에 대한 증언을 듣는 자리였지만, 초점은 긴장감이 감도는 한반도 정세로 모아졌다. 5선의 공화당 중진 존 매케인의원의 질문에 로클리어 사령관은 짧게 답했다. “의원님 지적에 동의한다. 내 기억을 더듬어봐도, (정전협정 체결 이후 한반도에서) 지금보다 긴장감이 높았던 때는 없는 것 같다.”
무소속 앵거스 킹 의원은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직후인 1914년 8월을 세밀하게 묘사한 작가 바버라 터크먼의 을 입에 올렸다. 킹 의원은 “작금의 한반도 상황을 보면, 일종의 ‘8월의 포성 현상’이라는 느낌이 든다. (제1차 세계대전 때도) 사소한 오해에서 비롯된 도발과 그에 대한 대응이 상승작용을 일으켜 결국 전면전으로 이어졌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한반도에서 긴장감이 높아지면서 오판에 따른 도발과 그에 대한 응징, 그리고 재도발 다음 단계는 뭐냐”고 캐물었다. 이번엔 로클리어 사령관의 대답이 조금 길어졌다.
“오판에 따른 도발과 그에 대한 응징이 상승작용을 일으키면서, 위기가 급격히 심각해질 수 있다는 점에 동의한다. 특히 남북한의 지리적 근접성 때문에 도발과 그에 대한 대응에 걸리는 시간이 매우 짧을 것이다. 여러 가지로 응급 상황에 대한 대응책을 마련해두긴 했지만, 군으로선 가능한 한 빨리 평화를 복원해 외교가 통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최선이다. …그리 되지 않도록 해야겠지만, 휘발성 높은 것만은 사실이다. 매우 위중한 상황이다.”
지난해 12월 북한의 로켓(미사일) 발사 때부터 시작된 현 위기의 심각성은, 지난 4월8일 ‘잠정 폐쇄’된 개성공업지구(이하 개성공단)가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2003년 6월30일 공단 건설을 위한 첫 삽을 뜬 이래 개성공단은 ‘한반도 정세의 바로미터’로 불렸다. 한반도 정세가 아무리 요동을 쳐도, 개성공단은 의연하게 버텨냈기 때문이다. 김연철 인제대 교수(북한학)는 “그랬던 개성공단이 잠정 폐쇄됐다는 것 자체가 한반도의 현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지적했다.
개성공단의 역사는 2000년 6·15 정상회담 직후로 거슬러 올라간다. 정상회담 직후 남북 경제협력을 적극 추진한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북쪽의 제안을 받아들여 황해북도 개성시 봉동리 일대 총 65.7km2(2천만 평) 부지에 공단을 조성하기로 결정했다. 현대아산과 북 아태평화위원회는 그해 8월 ‘공업지구 건설운영에 관한 합의서’를 체결하고, 2003년 6월 착공식을 열었다. 올해는 개성공단 착공 10주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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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60km, 평양에서 160km 떨어진 개성공단은 ‘남북 공존시대’의 마중물로 여겨졌다. 2천만 평 부지 가운데 800만 평은 공장지대, 나머지 1200만 평은 남과 북의 노동자들이 생활하는 배후도시로 상정한 것도 이 때문이다. 김진향 전 개성공업지구 관리위원회 기업지원부장은 이렇게 설명했다.
“개성공단 사업은 ‘통일연습’으로 불렸다. 호혜적인 경제 프로젝트이자, 평화 프로젝트였기 때문이다. 특히 남과 북의 주민들이 일상적 상호관계와 문화적 상호침투, 자연스러운 통일문화를 형성하는 계기가 됐다. 5만3천여 노동자들이 시장경제를 직접 배우고 익히는 과정이었다. ‘물량 수주, 상품, 판매, 납기 준수, 성과급, 생산성’ 등 시장경제의 주요 개념을 알아가기 시작했다.”
2004년 12월 개성공단에서 생산된 제품이 처음으로 국내에 반입됐다. 2006년 11월엔 개성공단에 고용된 북쪽 노동자가 1만 명을 넘어섰다. 이듬해 1월30일엔 총생산액 1억달러를 돌파했다. 잠정 폐쇄조치 이전까지 개성공단에 진출한 123개 남쪽 기업에 고용된 북쪽 노동자는 모두 5만3천여 명, 누적 생산액은 20억1703만달러를 기록했다. 계획에 미치진 못했지만, 개성공단은 무럭무럭 성장을 거듭해왔던 게다.
경제적 측면이 전부는 아니다. 개성공단 태동 때부터, 군사적 긴장완화와 남북 평화 정착에 기여할 것이란 기대감이 높았다. 군사분계선(MDL)에서 불과 5~6km 북쪽에 떨어져 있는 공단의 위치 때문이다. 군사력 밀집지대를 남쪽 사람과 차량이 매일 왕래한다는 사실 자체가 지니는 ‘상징적 무게감’이 제법 컸다. 개성공단 시범단지 사업을 주도한 정동영 전 통일부 장관은 이렇게 말했다.
“2004년 8월 도널드 럼즈펠드 미 국방장관을 만났다. 당시 미국 쪽에선 개성공단과 관련해 이른바 ‘속도조절론’이 나오던 때다. 미국 강경파를 대표하는 럼즈펠드 장관의 입장을 바꿀 필요가 있었다. ‘개성공단 사업은 경제뿐 아니라 군사·외교·정보사업이기도 하다. 군사분계선 주변 북 포병화력 밀집지역에 공단을 만들면, 2군단·6사단 관할 포병화력을 15km 북방으로 후진 배치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그제야 미국 쪽에서도 개성공단의 ‘전략적 가치’를 인정했다.”
남북 당국 간 정치·군사적 갈등을 완화·완충하는 구실도 했다. 2007년 6월 미사일 발사와 2009년 5월 핵실험 상황에서도 개성공단은 가동됐다. 2010년 천안함 사건과 연평도 포격사건 당시의 엄혹한 위기 상황에서도 개성공단은 하루도 쉬지 않고 가동됐다. 개성공단은 그 존재 자체로 남북 간 긴장 고조와 위기 심화를 물리적으로 막을 수 있는 실질적 상징이었다.
그런 개성공단이 삐걱거리기 시작한 것은 이명박 정부 출범 직후부터다. 2008년 3월 업무보고에 나선 김하중 통일부 장관은 “북핵 해결 없이 개성공단 확대는 없다”고 강조했다. 그해 11월엔 이대통령이 직접 나서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 통일하는 게 최후의 궁극 목표”라고 강조했다. 화해·협력의 10년 세월을 뚫고, 냉전시대를 떠올리게 하는 ‘흡수통일’의 망령이 오롯이 되살아난 게다.
북쪽이 그냥 있을 리 없었다. 그해 11월6일 김영철 국방위원회 정책국장(현정찰총국장)이 개성을 방문해, 남쪽 법인장들을 면담하는 한편 공단 운영 전반을 조사했다. 그 결과가 개성공단에 상주하는 남쪽 인원을 880명으로 제한하고, 남북 통행 시간대와 통행 허용 인원 축소를 뼈대로 하는 이른바 ‘12·1 조치’다. 그해 12월17~18일 ‘현지 점검’을 이유로 개성공단을 다시 찾은 김 국장은 남쪽 기업인들을 모아놓고 긴 연설을 했다. 이 입수한 당시 연설문을 보면, 김 국장은 이렇게 강조했다.
“개성공업지구는 북과 남 협력사업의 상징이다. 우리 민족이 낳은 좋은 상징이다. 그런데 개성공업지구 협력사업을 남측 당국은 눈엣가시처럼 여기고 있다. 이남 당국을 책임지는 당국자가 나서서 북핵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공업지구의 발전이 없다고 말하고 있다. … 최근에는 ‘개성공단과 같은 공단이 남쪽에 수백 개나 된다. 개성공단 쯤은 없어도 된다’고 한다. 이것은 남쪽 여당의 큰 사람이 한 소리다. 우리 군대는 군용지를 생큼 떼내어서 공업지구 부지로 내주는 아량을 베풀었는데….”
김 국장의 이날 발언은 지난 4월8일 김양건 노동당 대남담당 비서가 발표한 담화문과도 맥이 닿아 있다. 이 공개한 담화문 전문을 보면, 김 비서는 “북남 쌍방무력이 첨예하게 대치돼 있는 예민한 군사분계선 일대의 넓은 지역을 통째로 내어줬다”거나,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를 내어준 것은 참으로 막대한 양보를 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이명박 정부가 집권한 뒤) 북남 관계를 모조리 파괴했을 때도 개성공업지구는 살아남았다”며 “그런 개성공업지구까지 대결의 마당으로 만들었다”고 남쪽 당국을 비난했다.
개성공단이 위기에 휘말린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2009년 3월9~20일 키리졸브 한-미 합동 군사훈련 기간에도 3차례 육로통행이 차단됐다. 2010년 3월 천안함 사건에 대한 책임을 물어 개성공단 신규투자를 금지하는 내용을 뼈대로 한 ‘5·24 조치’가 단행됐을 때도, 북쪽은 인민군 총참모부 명의로 남북 협력교류 관련 군사적 보장 조치 전면 철회를 발표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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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올해는 상황이 사뭇 달랐다. 북쪽은 전례 없이 급박하게 움직였다. 지난 3월27일 북쪽은 개성공단 입·출경 채널로 사용되는 남북 간 군 통신선을 차단했다. 4월3일엔 개성공단 통행을 차단한채, 남쪽으로 귀환만 허용했다. 그럼에도 남쪽에선 “개성공단 폐쇄조치까지는 나아가지 못할 것”이란 낙관론이 득세했다. 전문가들은 “개성공단 사업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유업’이어서, 북쪽이 이를 중단하지는 못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보수 진영에선 “개성공단은 북 지도부의 ‘달러박스’다. 쉽게 폐쇄하지 못할 것”이라며 여유를 부렸다.
개성공단이 ‘달러박스’란 말이 아예 틀린 건 아니다. 하지만 그 수혜를 더 많이 챙긴 것은 남쪽이다. 개성공단 사정에 밝은 전 정부 핵심 관계자는 “중국이나 동남아에 진출한 우리 기업이 투자비용을 5년 안에 회수하면 성공적이란 평가를 받는다. 모두 그런 것은 아니지만, 개성공단 입주기업 가운데는 1년도 안 돼 투자비용을 모두 회수한 기업도 있을 정도”라고 말했다.
‘달러’만 생각한다면, 북으로선 개성공단 폐쇄가 그리 나쁜 선택이 아니란 주장도 나온다.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소속인 홍익표 민주통합당 의원은 지난 4월9일 오전에 열린 개성공단 관련 긴급 간담회에서 “북한이 한 해 개성공단 인건비로 가져가는 액수는 약 8400만 달러다. 반면 중국 쪽으로 인력 송출을 해서 벌어들이는 돈은 연간 3억달러에 이른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개성공단 노동자의 평균 임금은 100달러 수준이지만, 중국 쪽에선 최소 300달러를 넘어선다”며 “개성공단 노동자를 중국으로 돌리면, 지금의 3배가 넘는 ‘달러’를 챙길 수 있다는 얘기”라고 덧붙였다.
‘군사요충지’를 내줘야 했던 북 군부로서도 공단 폐쇄를 마다할 이유가 없어 보인다. 복수의 대북 전문가들의 말을 종합하면, 공단에서 일하는 노동자가 늘면서 북 군부에선 개성공단을 두고 “자본주의 황색 바람의 진원지”라고 노골적으로 비난해왔단다.
결국 잠정 폐쇄 조치의 최대 피해자는 남쪽 기업인과 북쪽 노동자다. 문제는 대화를 재개하더라도 개성공단이 입은 상처는 쉽게 회복될 수 없어 보인다는 점이다. 개성공단 입주 기업인들이 내놓는 우려의 말도 한결같다.
“세계적으로 개성공단에 대한 신뢰가 깨졌다. 그래도 지금까지는 연평도, 천안함 사건이 있어도 개성공단은 안전하게 돌아간다는 신뢰가 있었는데, 그게 깨져버린 거다. 신뢰가 깨지면 공단의 역할을 할 수 없다. 누가 일을 줄 생각을 하겠는가.”(제조업체 호산에이스 조동수 대표)
“돈은 나중 문제다. 수십 년간 쌓아온 신뢰가 무너지는 게 가장 심각하다. 기업과 기업 간 거래, 거래처 간 믿음이 하루아침에 깨지게 됐다. 아무리 중소기업이라 해도 70~80군데씩 거래처가 있을 거다. 내가 어쩔 수 없다는 점이 가장 견디기 어렵다.”(의류업체 녹색섬유 박용만 대표)
“바이어 신뢰는 이미 땅에 떨어졌다. 아마 우리보다 바이어들이 더 불안하고 초조할 거다. 결국 이 상황이 조속히 해결되지 않으면 신뢰는 무너지고, 나중에 개성공단 가동이 재개된다 하더라도 물량을 주기 어려울 것이다. 외풍에 흔들리지 않을 수 있도록 남북 정부가 제도적으로 확신을 시켜줘야 그나마 떠나간 바이어들이 돌아오는 시간을 줄일 수 있다.”(의류업체 나인 JIT 이희건 대표)
그래서다. 류길재 통일부 장관이 4월11일 전격 대화 제의에 나선 것은 그나마 다행한 일이다. 앞서 류 장관은 북쪽의 개성공단 ‘잠정폐쇄’ 발표가 나오기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실효성이 없다”는 이유로 남북 대화 가능성을 일축한 바 있다.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은 “첨예한 대립 속에 군사적 언어만 난무하던 상황에서, 통일부가 목소리를 냈다는 것 자체가 의미 있는 일”이라고 평가했다.
당국 차원의 힘겨루기가 비등점으로 치닫는 동안에도, 지난 10년 세월 개성에서 쌓은 ‘정’은 변함이 없어 보인다. 극한 대결의 시간을 지나 남과 북이 다시 만났을 때, 미래를 키워가는 데 소중한 밑거름이 될 터다.
“4월8일 퇴근할 때까지도 ‘내일 꼭 만나자’고 했다. 북쪽에서도 ‘그럴 일 없다. 내일 꼭 다시 오마’고 했다. 그날 밤 10시께 북쪽 노동자들에게 ‘출근 불가’ 통보가 간 모양이다. 인사도 제대로 못해 아쉽다.”지난 4월10일 개성에서 나왔다는 한 입주기업 법인장은 “(개성공단에 남은 이들이) 먹을거리가 떨어졌다는 보도가 많은데 사실과 다르다”며 “쌀은 상당히 여유가 있고, 다만 채소 종류가 거의 바닥이 나서 애를 먹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평소 알고 지내던 북쪽 사람들이 김치며 오이 같은 걸 챙겨다 주면서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고 하더라. 그 마음이 고마웠다”고 했다.
천안함 사건 직후인 2010년 4월 개성에 진출한 유통업체 삼우의 임진석 사장은 창고 열쇠를 개성공단관리위원회 쪽에 맡기고 서울로 나왔다. “남아 있는 남쪽 기업 임직원들이 먹을거리가 떨어지면, 언제든 창고에 보관하고 있는 쌀이며 라면, 소시지, 빵 등을 공급해달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그는 “체류 인원이 300명 정도라면, 풍족하지는 않아도 상당 기간 버틸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10년 한반도에서 긴장감이 높아질 때마다, 모두들 개성으로 눈을 돌렸다. 남쪽 기업인들이 군사분계선을 지나 북녘땅 봉동리에서 북쪽 노동자들과 만나는 모습을 지켜보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정전 60주년, 개성공단이 폐쇄된 지금 ‘전쟁’의 망령이 다시 한반도를 떠돈다. 개성공단으로 향하는 문을, 어서 다시 활짝 열어야 하는 이유다. 개성공단의 운명이, 곧 한반도의 미래다.
개성공단의 운명이, 곧 한반도의 미래남녘으로 내려오던 날 아침, 임 사장은 북쪽 관계자들에게 이렇게 인사를 전했단다. “개성 진출 3년 만에 처음으로 휴가를 간다. 일주일 뒤 다시 오겠다.” 개성공단 진출 이후 임 사장은 일주일에 적어도 사나흘을 개성에서 생활해왔다. 북쪽 관계자들도 웃으며 이렇게 말했단다. “그리 되면 좋겠다. …그동안 건강 잘 챙겨라.”
글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서보미 기자 sprin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