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다시 시작된 ‘9·11 이후’

FBI 공소장 분석해 재구성한 미 보스턴마라톤 테러사건 전말… ‘체첸계’ 드러나자 다시 ‘이슬람 테러’ 운운하는 언론들
등록 2013-05-05 16:01 수정 2020-05-03 04:27

‘사건번호 13-2106-MBB, 미합중국 대 조카르 차르나예프.’
지난 4월21일 미국 매사추세츠주 연방 지방법원에 제출된 서류의 표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가 입수해 홈페이지에 올린, 매리언 보울러 판사가 서명한 모두 11쪽 분량의 공소장이다. 사건 수사를 총괄한 대니얼 젠크 연방수사국(FBI) 특수요원은 ‘증언’의 첫 장을 이렇게 시작한다.
1차 단서는 사고 현장 CCTV
“이 사건을 수사한 나는, 2013년 4월15일 매사추세츠주 연방 지방법원 관할인 서퍽카운티에서 발생한 사건을 저지른 피고가, 미 연방 형법 제2332조의 ‘대량살상무기 사용’과 같은 법 제844조가 규정한 ‘악의적 파괴 행위에 따른 사망’ 규정을 위반했음에 따라, 아래와 같이 공소를 제기하는 바이다.”
서류에 기재된 ‘공소사실’은 크게 2가지다. 첫째, 피고인은 인명·재산의 파괴를 목적으로 불법적으로 대량살상무기(IEDs·사제폭탄)를 사용했다. 둘째, 폭발물을 이용해 악의적으로 인적·물적 재산을 파괴했다. 공소사실을 좀더 구체적으로 들여다보자.
“보스턴마라톤은 매년 미국을 포함해 전세계적으로 수많은 이들이 참여하는 대규모 체육행사다. 보스턴육상협회의 자료를 보면, 올해는 모두 2만3천여 명이 대회에 참여했다. 경주 코스의 막바지 결승점은 보스턴의 보일스턴 동쪽과 엑스터다트머스 거리 사이에 있는 히어포드 거리에 있다.
사건이 발생한 것은 2013년 4월15일 오후 2시49분께(현지시각), 한창 경주가 진행되는 시각 보일스턴가 북쪽을 따라 마련된 결승점 부근에서 2개의 폭탄이 터졌다. 첫 번째 폭탄은 보일스턴 거리 671번지 앞에서, 두 번째 폭탄은 한 블록 떨어진 755번지에서 각각 터졌다. 폭발물은 결승점을 통과하는 주자들을 보려고 몰려든 수많은 관람객들을 가로막고 있던 금속 장애물 근처에서 터졌고, 이로 인해 3명이 숨지고 200명 이상이 다쳤다.”
젠크 요원의 증언을 보면, 수사의 1차 단서는 사건 현장 주변에 설치된 폐쇄회로텔레비전이었다. 첫 번째 폭발이 나기 11분 전인 그날 오후 2시38분께, 사건 현장 부근에서 젊은이 2명이 목격됐다. ‘폭파범 1’은 짙은 색 야구모자에 선글라스, 흰색 셔츠와 짙은 색 코트를 입고 있었다. ‘폭파범 2’는 흰색 야구모자에 회색 후드 티셔츠, 가벼운 점퍼와 짙은 색깔 바지를 입고 있었다. 폭발을 전후로, 이들은 등에 메고 있던 (폭발물이 들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가방을 현장 주변에 내려놓았다.
사건 발생 사흘 뒤인 4월18일 오후 5시께, FBI는 두 ‘폭파범’을 언론을 통해 공개 수배했다. 그로부터 약 7시간 뒤인 그날 밤 자정께, 매사추세츠주 케임브리지에서 차량 납치 사건이 벌어졌다. 공소장에 기재된 피해자의 증언을 종합하면, 사건은 한 남성이 멈춰진 차량에 다가와 창문을 두드리면서 시작됐다.
“보스턴 폭탄테러 들어봤지? 그거, 내가 한 거야!” 권총을 손에 든 법인은 총에서 탄창을 빼내 운전자에게 보여줬다. 총알이 장전돼 있었다. 그는 “이거, 장난 아니야”라고 말했단다. 이어 주변에 있던 다른 젊은이 1명도 차에 올라탔다. 범인들은 권총으로 위협해 피해자에게서 현금 45달러를 빼앗았다. 이어 피해자의 현금카드로 부근 현금인출기에서 돈을 빼낸 뒤, 케임브리지의 메모리얼 드라이드 816번지에 자리한 주유소 겸 편의점으로 향했다. 이윽고 범인들이 차에서 내렸을 때, 피해자는 목숨을 걸고 도망을 쳤다.
미 다우존스 지수 폭락 등 증시 출렁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은 워터타운 지역에서 피해 차량을 발견했다. 범인들이 그곳 덱스터 거리를 지나면서 추적하던 경찰을 향해 소형 사제폭탄 2발을 던지는 순간 총격전이 벌어졌다. 무차별 총격을 당한 범인들이 몰던 차량은 로렐 거리 부근에서 멈춰섰다. 중상을 입은 범인 1명은 차 안에 남아 있었고, 나머지 1명은 도주했다. 경찰은 차 안에서 사용하지 않은 사제폭탄 2발을 수거했다.
중상을 입은 채 차 안에서 발견된 범인은 매사추세츠주 케임브리지의 노퍽 거리에 사는 타메를란 차르나예프(26)였다. 미국 여성과 결혼한 그는 합법적 영주권자로 밝혀졌다. 총격전 직후 병원으로 옮겨진 그는 결국 숨을 거뒀다. 도주한 범인은 2002년 4월14일 미국에 입국해 시민권을 얻은 타메를란의 친동생 조카르 차르나예프(19)였다.
4월19일 저녁 “수상한 사람이 뒷마당에 둔 소형 보트 안에 숨어 있다”는 신고가 접수됐다. 워터타운의 프랭클린 거리 67번지였다. 이내 경찰이 들이닥쳤고, 무차별 총격이 퍼부어졌다. 보트에서 끌려나온 인물은 지역 명문 다트머스 매사추세츠주립대 학생증과 신용카드 등을 지니고 있었다. 조카르 차르나예프 명의였다. 공소장에는 체포 당시 그가 “머리와 목, 팔과 다리에 심한 총상을 입었다”고 적혀 있다.
사건의 파장을 살필 차례다. 보스턴마라톤 폭탄공격 사건이 벌어진 다음날인 4월16일엔 백악관 우편물 검사소가 발칵 뒤집혔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을 수신자로 한 편지에서 ‘분말 형태의 의심 물질’이 발견된 게다. FBI의 1차 분석 결과, 맹독성 물질인 ‘라이신’으로 밝혀졌다. 미 의회에도 이날과 이튿날인 4월17일 잇따라 괴편지가 날아들었다. 1차 분석 결과, 역시 라이신이 검출됐다. 이 때문에 미 의회 청사 일부가 잠시 폐쇄되는 소동이 빚어지기도 했다.
4월17일 저녁 7시50분께(현지시각) 이번엔 서부 텍사스주 웨이코 외곽에 자리한 비료공장에서 폭발음과 함께 거대한 불기둥이 솟아올랐다. 그로부터 나흘 뒤인 4월21일 텍사스주 경찰 당국이 집계한 사망자 수는 모두 14명, 이 가운데 11명은 초기 진화 작업에 나섰던 이들이란다. 발표 당일까지 ‘실종’된 이들도 모두 60명이나 된다. 폭탄공격과 독극물 테러 시도, 대규모 폭발까지, 2001년 9월11일 이후 미 전역이 다시 테러 공포에 휩싸였다.
조하르 차르나예프가 체포된 뒤에도 흉흉한 분위기는 이어졌다. 4월23일엔 <ap> 트위터 계정을 통해 “백악관에서 두 차례 폭발이 일어났으며, 이 과정에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부상을 당했다”는 긴급 보도가 날아들었다. 소식이 전해진 지 불과 2분 남짓 만에, 미 다우존스 산업평균지수가 145포인트나 떨어지는 등 증시가 출렁였다. 사실이 아니었다. 누군가 통신의 트위터 계정을 해킹해 헛소문을 퍼뜨린 게다.
사우디 출신 유학생 용의자 헤프닝
웨이코 비료공장 폭발도 사건이 아닌 사고였다. ‘산업재해’라 해도 옳겠다. 이 공장은 지난 28년 동안 단 한 차례도 미 산업안전보건청(OSHA)의 안전점검을 받지 않았던 것으로 드러났다. 미 진보지 은 4월21일 인터넷판에서 “테러공격의 희생자들에겐 대대적인 관심을 보이는 언론이, 산업재해에는 철저히 눈을 감는다”며 “지난해 미국에서 산업재해로 죽은 사람은 모두 4500명에 이른다”고 지적했다. 하루 13명가량의 노동자가 일터에서 목숨을 잃고 있다는 얘기다.
‘라이신 편지’의 실체는 어떨까? 4월18일 미시시피주 코린스에서 폴 케빈 커티스(45)란 이름의 남성을 전격 체포한 FBI는 닷새 뒤인 4월23일 슬그머니 그를 풀어줬다. <cbs>은 이날 인터넷판에서 “커티스의 석방에는 아무런 ‘조건’이 붙지 않았다”고 전했다. ‘무죄 방면’인 게다. 이날 미시시피주 지역지인 는 커티스가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종합해 이렇게 전했다.
“커티스는 평소 엘비스 프레슬리와 본 조비 같은 유명 가수 흉내내기를 즐겼다. 그는 연방정부가 공립학교에서 주기도문 외우는 것을 법으로 금지해 신을 실망시켰으며, 이라크전쟁을 포함해 미국이 저지른 전쟁은 신앙에 기초한 게 아니라 원유와 마약 때문이라고 믿었다. 또한 오바마 행정부가 무인항공기를 이용해 자신을 감시하고 있다고 확신했으며….”
이제 보스턴마라톤 폭탄공격으로 돌아가보자. 사건 발생 직후부터 등 보수 언론을 중심으로 ‘외부 세력에 의한 테러’ 가능성이 고개를 들었다. 린지 그레이엄 상원의원(공화당) 등 일부 정치인들은 대놓고 “범인들을 ‘적국 전투요원’으로 간주해 군사법정에 세워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들이 언급한 ‘외부 세력’과 ‘적국 전투요원’이 누구를 가리키는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사건 발생 당일 밤, 보스턴 리비어 지역의 오션애비뉴에 자리한 5층짜리 아파트 ‘오션쇼어타워’ 주변이 심상찮게 돌아갔다. FBI와 연방 주류·담배·화기단속국(ATF) 요원, 보스턴 경찰특공대가 장갑차와 폭발물처리반까지 대동하고 건물을 에워쌌다. 폭탄공격 직후 현장 주변에서 도망친 사우디아라비아 출신 유학생의 모습이 폐쇄회로텔레비전에 잡혔던 게다. 문제의 유학생은 폭탄 파편에 맞아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었다. 는 그의 룸메이트 무함마드 하산 바바(20)의 말을 따 “무려 5시간 동안이나 경찰의 심문에 시달려야 했다”고 전했다.
이튿날엔 역시 결승선 부근에 있던 ‘모로코인’으로 추정되는 2명의 모습을 휴대전화 카메라로 찍은 사진이 인터넷을 떠돌기 시작했다. 는 아예 ‘폭파범’이란 문구와 함께 이들의 사진을 1면에 올렸다. 이들의 신원은 곧 밝혀졌다. 보스턴 리비어고등학교에서 육상선수 생활을 하는 17살 살라 에딘 바훔과 야신 자이메였다. <ap>은 4월18일 바훔의 말을 따 “내 사진이 인터넷에 떠돌더니 ‘폭파범’이라고 신문에 났다. 바깥에 나가는 것도, 학교에 가는 것도 겁이 난다”고 전했다.
“백인이며, 비무슬림인, 미국인이길”
“젊은 백인으로 보입니다. 대학생 같은데요. 아주, 아주 전형적인 미국인 모습입니다.” FBI가 보스턴마라톤 폭탄공격 용의자로 차르나예프 형제의 사진을 공개한 직후, <cnn>의 시사토크쇼 를 진행하는 앵커 에린 버넷은 이렇게 말했다. 미 언론이 다시 ‘이슬람 테러리스트’를 들먹이기 시작한 것은, 이들이 ‘체첸계’란 사실이 드러난 직후부터다. 그래서다. 차르나예프 형제가 용의자로 떠오르기 전인 4월16일 인터넷 매체 이 일찌감치 이렇게 지적한 것도 이유가 있었던 게다. “보스턴마라톤 폭탄공격의 범인이 백인이며, 비무슬림인, 미국인이길 바란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cnn></ap></cbs></ap>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