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 돌아보니 아득하고 내다보니 깜깜하다. 둘러보니 천지간엔 끌고 꾀고 떠미는 것 일색. 혹(惑)하지 않고선 좀체 견딜 도리가 없다. 도처가 허방이니, 추락하지 않으려면 정신줄 바짝 조여야 한다. 불혹(不惑)이란 그저 아스라한 이상(理想)이거나, 부단히 좇아야 할 사십 줄의 최대 강령일 뿐, 마흔의 현실은 말 그대로 ‘미혹’(迷惑)이다.
마흔이 읽는 자기관리·힐링, 베스트셀러로사십 줄 삶을 일러 “벽도 내리받이도 보이지 않는” “너무도 드넓은 궁륭 같은 평화”라던 20년 전 시인의 조롱(최승자 ‘마흔’)은 속절없이 기각된다. 차라리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최승자 ‘삼십세’) 삶을 엄습해온다던 ‘서른’에 대한 그의 진술이야말로 지금의 마흔에겐 더 적합해 보인다. 그사이 내달려온 현실이 그토록 가팔랐던 것일까.
앞선 세대의 삶이 매뉴얼로 기능하지 못하는 시대엔 모두가 불안하다. 하지만 느끼는 불안이 모든 세대마다 고른 것은 아니다. 지워진 책임이 상대적으로 무겁고 생애주기의 변동 폭이 큰 집단일수록 불안의 강도는 세기 마련인데, ‘3말4초’(30대 말~40대 초)가 그런 경우다. 사회·경제적 지위와 처지가 10~20년 전에 비해 급격하게 흔들리고 있다는 점에선 20~30대, 50~60대나 매한가지지만, 나와 가족의 삶을 온전히 혼자 힘으로 헤쳐나가야 하는 시기에 본격 진입한다는 점에서 이 연령집단이 겪는 심리적 동요는 남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실제 지난해 12월 LG경제연구원이 발표한 세대별 ‘사회·경제적 고통지수’를 보면 40대(5)→30대·50대(4.6)→20대(4.5)→60대 이상(3.8) 순으로 높다.
마흔 언저리 세대가 겪는 고뇌와 불안은 ‘마흔’이 표제어에 들어간 책들이 2~3년 전부터 출판계의 스테디셀러로 자리잡은 사실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인터넷 도서판매 사이트에서 ‘마흔’을 열쇳말로 입력하면 검색되는 책이 270권이 넘는다. ‘자기관리’(88권)로 분류되는 책이 가장 많고, 다음이 문학(51권), 경제·경영(40권) 순이다. 가장 많이 팔린 책은 동양학자 신정근씨가 쓴 이다. 2011년 10월 출간된 이래 15만 부 넘게 팔렸다. 5만 부 이상 팔린 책도 적지 않다. 등이다.
를 펴낸 출판사 21세기북스 관계자는 “애초 책을 기획할 당시엔 ‘마흔’이 들어가는 제목을 생각하지 않았는데, 때마침 불어닥친 ‘마흔’ 열풍을 의식하고 편집 단계에서 제목을 붙인 것”이라고 했다. 책은 초반기 30~40대 남성 독자들에게 주로 팔려나가다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른 뒤엔 20대와 50~60대까지 독자층을 넓혀가고 있다. 출판사는 같은 필자의 후속작 를 2월에 출간한다.
눈여겨볼 지점은 지난해에 이어 올해까지도 서점의 베스트셀러 매대를 점유하고 있는 ‘힐링’(마음 치유) 서적의 주요 독자층 또한 ‘3말4초’들이란 사실이다.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은 “2000년대 중반 이후 출판시장의 주 소비층은 3말4초로 확고하게 정착됐다”며 “자기계발서를 탐독하며 20~30대를 보낸 연령층이 최근의 힐링 서적과 마흔 관련서 열풍을 주도하고 있다”고 전했다. 지금의 3말4초는 1972년을 전후해 출생한 2차 베이비붐 세대다.
메시지는 “생애 기획의 주도권을 쥐어라”한기호 소장의 진단은 1월8일 저녁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에서 만난 박정균(39)씨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한 대기업 증권사 지점에 근무한다던 그는 “연말에 사무실 후배에게서 책을 한 권 선물받았다. 마흔을 바라보는 또래 직장인들에게 유용한 처세와 인생 설계 팁이 담겨 있어 좋았다. 서너 권 사서 거래처 사람들에게 선물하려 한다”고 했다. 그가 집어든 책 표지에는 ‘42’라는 큼지막한 숫자와 함께 “청년에서 중년으로, 아들에서 아버지로, 부하에서 상사로, 초보에서 전문가로 인생의 포지션이 바뀌는 지금, 두 번째 인생을 준비하라. 당신은 무엇을 위해 어디로 나아갈 것인가?”라는 홍보 카피가 적혀 있었다.
성인이 되는 과정에 대해 한 번도 제대로 학습할 기회를 갖지 못했으니, 중년 이후의 삶을 어떻게 빚어가야 하는지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렇다고 모든 마흔 관련서가 이처럼 ‘인생 후반전’에 뛰어들길 독려하는 것만도 아니다. 상당수 책은 차분히 내면을 돌보고, 고전의 가르침에서 현실의 어려움을 헤쳐나갈 지혜를 구하라고 권면한다. 나 시인 장석주가 쓴 같은 책이 여기에 해당한다. 하지만 설파하는 메시지가 무엇이 든 관통하는 요지는 하나다. “당신의 삶은 당신이 기획하고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 말하자면 ‘생애 기획’의 주도권을 쥐라는 것이다. 서지영(42)씨가 원한 것도 이 주도권이었다.
그가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나온 것은 지금처럼 ‘마흔 이모작’ 바람이 불기 전인 2009년 초다. 대기업 계열사 홍보부서에 근무하던 그는 어느 순간부터 직장 생활에 회의가 들기 시작했다. ‘외국어 잘하고, 아이디어도 반짝반짝하는 후배들이 밑에서 치고 올라오는데, 이 회사에서 내가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그 무렵 같은 업계에서 일하던 대학 선배로부터 함께 홍보회사를 창업해보자는 제안이 들어왔다. 퇴직금을 털어 자본금을 댔다. 안정적 거래처도 서너 군데 확보했다.
“더 늦으면 어렵다”첫 6개월은 괜찮았다. 하지만 대기업이란 든든한 배경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는 컸다. 새 거래처를 트기가 어려웠다. 회사 운영은 적자를 내기 시작했고, 회사 운영 방식을 두고 선배와 불화가 생겼다. 결국 11개월 만에 회사를 접었다. 투자금은 한 푼도 못 건졌다.
호구지책으로 외국계 보험회사를 들어갔다. 한번 실패로 주저앉을 순 없다는 생각에 재기를 꿈꾸며 경영대학원에 등록했다. 학비가 3천만원이 넘었지만, 투자가치는 충분하다고 믿었다. 지난해 다시 창업에 나섰다. 이번엔 혼자였다. 하지만 3년의 공백은 컸다. 그사이 업계 환경은 몰라보게 달라져 있었다. 두 번의 실패를 경험하고 나니 서씨 수중엔 홀어머니와 함께 사는 서울 풍납동의 다가구주택 전세금만 남았다. 그는 아직 미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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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계 정보기술(IT) 회사에 근무하는 박선웅(41·가명)씨는 직장을 뛰쳐나와 한동안 방황하다가 재입사한 경우다. 그가 회사를 그만둔 것은 서른의 아홉수를 못 넘긴 2011년 8월이었다. 까닭 없이 아팠다. 병가를 내고 쉴 당시 그가 쓴 일기의 한 대목은 이랬다. “아프다. 밀려오는 압박과 스트레스를 발산 못하니 내 머리는 아프다. 아파도 아프다고 말하지 않는 싸구려 자존심을 가진 내 가슴도 아프다. 다치고 난 상처에 새살 오르듯, 오늘이 시작이었으면 한다. 내 삶의 후반부가 오늘이었으면 한다.”
사직원을 냈다. 비영리 재단에 들어가 기획·홍보 일을 맡았다. 어린이재활병원 설립을 지원하는 업무였다. 일을 통해 처음으로 보람이란 것을 느꼈다. 건강도 회복했다. 하지만 오래 버티지 못했다. 쑥쑥 커가는 초등학생 아들을 볼 때마다 열정만으로 살 수는 없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5년 뒤에 무엇을 하고 있을지 자문했다.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결국 나왔던 회사를 다시 들어갔다. 물론 그가 후반전 인생 계획까지 포기한 건 아니다. 그는 요즘 희망제작소가 운영하는 ‘퇴근후 렛츠’라는 직장인 교육 강좌를 듣고 있다. 강좌에는 박씨와 비슷한 고민을 하는 5~10년차 직장인이 많이 온다.
퇴근후 렛츠를 운영하는 희망제작소 배영순 연구원은 말한다. “안보이고 막막하니 답을 구하러 온다. 더 늦으면 어렵다는 공감대가 강하다. 그 마지노선이 마흔 언저리다.” 중견 출판사에서 편집자로 일하다 3년 전 독립한 안병률(43)씨의 설명도 비슷하다. “그나마 마흔에 시작하니 실패하더라도 재기할 수 있다. 40대 중반을 넘기면 직장 복귀도, 경제적 회복도 불가능하다.”
을 쓴 김찬호 성공회대 교수는 마흔 줄에 맞닥뜨리는 난감함을 이렇게 기술한다. “오로지 앞으로만 내달려왔건만, 인생의 절반에 이른 가파른 고비에서 이정표가 갑자기 사라진다. 앞길은 온통 오리무중, 가속의 페달을 밟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속도를 늦출 수도 없다.” 결국 이 시기에 이르면, 머뭇거림이나 시행착오에 대해 세상이 더 이상 관대하지 않을 것임을 직감적으로 알아채게 된다.
남은 것은 이제 인생 후반의 작전타임을 언제쯤 걸 것인지다. 심리학자 카를 구스타프 융(1875~1961)은 인생의 탈바꿈을 시도할 수 있는 결정적 전환기가 40살 전후라고 봤다.
그러나 그 전환기가 왜 굳이 마흔 언저리여야 하는지는 여전히 의문거리다. 많은 이들은 생물학적 수명 연장이 현대인의 생애에 ‘사십춘기’(사십 줄에 맞는 제2의 사춘기)를 불러들였다고 말한다. 하지만 기대수명이 100살에 근접한 상황에서 나이 마흔이란 기껏 근로 가능 수명의 3분의 1을 넘긴 시점에 불과하다. 사회학자 김정훈 박사는 “문제는 생물학적 수명 변화가 아니라 사회 시스템”이라고 말한다. 경제 상황이 양호한 시기였다면, 비슷한 고민을 쉰을 앞둔 시점에야 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이택광 경희대 교수의 진단도 비슷하다. 유연화된 시장의 충격을 조정할 국가 기능이 부재한 상황에서 완충지대인 가족마저 붕괴돼버리니, 일터에서 중간관리직을 수행해야 할 연령집단이 도생의 길을 찾아 불안한 모험의 도정에 뛰어들지 않을 수 없게 됐다는 것이다.
인생의 모드 전환을 위한 마흔 줄의 몸부림이 얼마나 실질적인 삶의 변화를 이끌어내고 있는지도 미지수다. 마흔을 바라보는 퇴직 샐러리맨의 상당수가 후반 인생을 시작하는 외국계 생명보험회사의 경우, 입사 1년 뒤 정착률이 40%가 채 안 된다. P사 관계자는 “창업과 달리 대규모 자본을 투입하지 않고도 고소득을 보장받을 수 있다는 점을 노리고 30~40대 퇴직자들이 몰리지만 대부분 1년을 버티지 못하고 이탈하는 상황”이라고 했다. 지난해 이 회사의 평균 입사 연령은 38살이었다. 창업 전선의 30~40대가 겪는 운명의 험난함에 대해선 더 말할 것도 없다.
문제는 이런 시스템 변화에 따른 지불 비용이 개인의 부담으로 오롯이 전가된다는 점이다.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복지국가의 슬로건이 상징하듯, 현대 자본주의사회에서 인간의 생애주기는 개인이 아닌 국가의 관할 영역이었다. 국가는 출산 관리와 교육, 노동시장, 연금정책을 수단 삼아 개인의 생애주기를 적극적으로 조직·관리했다. 국가 기능의 무게중심을 사회의 보호보다 경제 성장에 두었던 한국식 발전국가에서도 구성원의 생애주기는 적정선에서 관리돼왔다. 서구의 복지 시스템을 대신한 것은 의무교육과 국민개병주의에 바탕한 병역제도, 권위적 인구 관리, 관치경제를 지탱한 적극적 시장 개입이었다.
상황은 1990년대 중반 이후 급격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시장의 규범으로 자리잡게 된 자유화와 유연화의 필연적 귀결이었다. 정년이 무너지고, 퇴출은 상시화됐다. 이제는 더 윗세대가 밟았던 생애 경로를 아랫세대가 되밟지 않는다. 생애 단계의 구성도 변했다. 청년기와 노년기는 길어지고, 유년기와 장년기는 짧아진 것이다.
현실이 이러한데, 최근 넘쳐나는 마흔 관련서가 권면하듯 우리는 생애 기획의 주도권을 틀어쥘 수 있을까. 서동진 계원디자인예술대 교수는 극히 비관적이다. 그가 볼 때 지금의 한국 사회는 생애주기 자체가 존재하기 힘든 국면에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취업, 결혼, 2세 출산, 집 장만, 퇴직 같은 단계를 생애 중간에 기획하고 배치할 수 있는 사람이 지금 얼마나 되나. 한국인 대다수에게 생애주기는 변한게 아니라 해체돼버렸다. 이 상황에서 ‘제2의 인생을 기획하라’고 등 떠미는 것이나 ‘생의 불확실성을 즐기라’고 위무하는 것이나 무책임 하기로 따지면 오십보백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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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능한 길은 뭘까. 목적지는 물론 연대의 원리에 뿌리박은 사회국가의 복원이 될 테지만, 그곳에 이르려면 몇 세대에 걸친 노력이 더해져야 할는지 모른다. 그러니 우선은 조바심을 버릴 것. 기쁨은 나눠 갖고 슬픔은 어루만질 것. “패배도 낙심도 삶의 자연스러운 일부로 받아들이고 자기와 타인의 나약함을 보듬어 안는 측은지심을 가질 것, 유능함과 무능함 사이의 좁은 거리를 확인하면서 세상에 대해 보다 겸허해질 것.”(김찬호 )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박현정 기자 saram@hani.co.kr사진 탁기형 선임기자 kht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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