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온두라스 마약은 좋고 베네수엘라 마약은 나쁘다?

마약범죄 45년형 에르난데스 전 대통령 전격 사면… 대선 원격조종
마두로 대통령은 마약 카르텔 수괴로 지명수배 뒤 침공 협박 노골화

2025년 11월30일 온두라스 수도 테구시갈파에서 보수 국민당 대선 후보 나스리 아스푸라가 투표에 앞서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AFP 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베네수엘라를 상대로 ‘전쟁 불사’를 외치는 명분은 마약범죄 단속이다. 베네수엘라 마약 카르텔을 통해 밀반입된 마약이 미국민을 좀먹는다는 주장은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 체제의 전복을 정당화하는 도구다. 미국은 마두로 대통령을 마약 카르텔 우두머리라고 주장하며 지명수배령까지 내린 상태다.(제1592호 참조) 정작 이해하기 어려운 건 온두라스 대통령 선거 전후로 보인 트럼프 대통령의 행태다. 마약범죄 단속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기 때문이다. 좀더 자세히 들춰보자.

“사면을 축하한다. 온두라스를 다시 위대하게!” 트럼프 대통령은 2025년 11월28일(미국 시각) 소셜미디어를 통해 후안 오를란도 에르난데스 전 온두라스 대통령에게 사면령을 내릴 것이라고 밝혔다. 2014~2022년 온두라스 대통령을 지낸 에르난데스는 퇴임 직후 마약 사건 연루 혐의로 미국으로 송환됐다. 그는 재임 기간에 마약 카르텔에서 뇌물을 받고 코카인 400t을 미국으로 밀반입하도록 도운 혐의로 2024년 6월 징역 45년형에 처해진 바 있다. 그는 트럼프 대통령의 사면령에 따라 12월1일 웨스트버지니아주 헤이즐턴 교도소에서 풀려났다.

 

“온두라스를 다시 위대하게!”를 외친 이유

 

오랜 군사독재를 겪은 온두라스는 1982년 개헌으로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대통령 임기 제한 조항을 신설했다. 대통령 임기를 4년 단임제로 규정하고, 연임이 아니어도 재임할 수 없도록 했다. 또 단임 규정을 개정할 수 없도록 하고, 개정을 추진하는 자는 공직 박탈은 물론 10년간 피선거권까지 박탈하도록 했다. 2005년 11월 대선에서 승리한 마누엘 셀라야 전 대통령은 2009년 6월 대통령 임기에 대한 언급 없이 개헌을 추진했지만, 군부의 쿠데타로 강제 망명길에 올라야 했을 정도다. 집권 이전까지 중도보수 성향이던 셀라야 전 대통령은 당시 중남미를 휩쓴 좌파정권과 적극 협력한 바 있다. 미국에 맞서 ‘미주 대륙을 위한 볼리바르 대안'(ALBA) 결성을 주도한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 정권이 대표적이다.

2025년 12월2일 온두라스 수도 테구시갈파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자유당 대선 후보인 살바도르 나스랄라(가운데)가 마이크를 든 채 지지자들과 함께 환호하고 있다. AFP 연합뉴스

셀라야 정권 붕괴 이후 권력을 차지한 것은 온두라스 보수의 상징 격인 국민당이다. 2009년 대선에선 포르피리오 로보 소사가, 2013년엔 에르난데스가 거푸 당선되며 국민당 전성시대를 열었다. 그러던 2015년 5월 온두라스 대법원이 난데없이 헌법에 명시된 대통령 단임제 관련 조항 전체를 ‘위헌’이라고 결정했다. 셀라야 정권을 무너뜨린 쿠데타의 도화선이 된 대통령 임기 제한 문제를 법원이 일방적으로 공중분해시킨 게다. 논란 속에 2017년 11월26일 실시한 대선에서 에르난데스는 중도·좌파 단일 후보로 나선 살바도르 나스랄라와 피 말리는 접전 끝에 득표율 단 1.53%포인트(약 50만 표) 차이로 꺾고 재선에 성공했다.

당시 대선에서 나스랄라는 개표 초반 5%포인트 차로 에르난데스를 앞섰다. 하지만 선거관리위원회가 30여 시간 개표를 중단하는 등 석연찮은 행보를 보인 끝에 결국 에르난데스에게 밀렸다. 에르난데스 쪽이 장악한 선관위는 선거에 앞서 야권 성향 유권자의 투표율을 낮추기 위해 투표 마감 시간을 기존 오후 5시에서 4시로 앞당기기도 했다. 부정선거 논란 속에 항의시위가 번지자 에르난데스는 야간 통행금지령을 내리고 시위대를 탄압했다. 선관위가 최종 개표 결과를 발표한 건 선거 실시 21일 뒤인 같은 해 12월17일이다. 선거감시 활동을 했던 미주기구(OAS) 쪽은 보고서를 내어 “부정선거가 만연했다. 온두라스 모든 국민이 받아들일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은 재선거뿐”이라고 지적했다. 에르난데스 정권은 이를 무시했다. 선관위의 당선자 확정 발표 직후 미국은 에르난데스의 재집권을 승인·축하했다.

 

우파 독재정권 거드는 트럼프의 ‘보이는 손’

 

트럼프 대통령이 에르난데스 사면령을 발표한 이틀 뒤인 2025년 11월30일 온두라스에서 대선이 치러졌다. 에르난데스의 소속 정당인 보수 국민당의 나스리 ‘티토’ 아스푸라와 2017년 대선 때 야권 단일 후보로 에르난데스와 맞붙었던 중도 자유당의 나스랄라가 막판까지 박빙의 승부를 이어갔다. 트럼프 대통령은 선거 직전 소셜미디어를 통해 “티토와 함께 마약 공산주의와 싸우고, 온두라스 국민에게 필요한 원조를 제공할 것”이라며 노골적으로 아스푸라를 지원하고 나섰다.

온두라스 선관위는 선거를 치른 지 열흘째를 맞은 12월10일까지 당선자를 확정하지 못하고 있다. 개표 초기 근소한 차로 앞서갔던 나스랄라는 개표 기간이 길어질수록 아스푸라에게 밀리고 있다. 2017년 대선 때와 판박이다. 나스랄라는 2021년 대선 때 독자 출마를 포기하고 중도·좌파 단일 후보로 나선 시오마라 카스트로 현 대통령의 러닝메이트로 나선 바 있다. 카스트로 대통령은 셀라야 전 대통령의 부인이다. 카스트로 정권에서 제1부통령을 지낸 나스랄라는 좌파 색채를 지우기 위해 ‘중도보수’를 내세우며 선거운동을 펼쳤다. 나스랄라 쪽도, 카스트로 대통령도 이번 대선을 ‘선거 쿠데타’로 규정했다.

세계은행 등의 자료를 종합하면, 2024년 온두라스의 국내총생산(GDP)은 약 371억달러다. 대미 교역액은 수입 71억달러, 수출 55억달러 등 모두 126억달러에 이른다. 국내총생산 대비 약 30%에 이르는 규모다. 온두라스 경제의 대미의존도를 가늠해볼 수 있다. 온두라스 중앙은행(BCN)의 최신 자료를 보면, 2024년 온두라스 이주노동자의 본국 송금액은 약 96억달러로, 국내총생산의 26%를 차지했다. 온두라스 출신 이주노동자의 약 85%(110만여 명)는 미국에서 불법체류 중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보이는 손’이 온두라스 선거판을 뒤흔들 수 있었던 이유다.

2025년 12월4일 온두라스 수도 테구시갈파에서 열린 집회에서 한 참석자가 마약범죄로 유죄가 확정된 후안 오를란도 에르난데스 전 대통령을 사면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비판하는 손팻말을 들고 있다. EPA 연합뉴스

 

200년 만에 미국에 다시 등장한 ‘먼로 독트린’

 

트럼프 행정부는 카리브해와 동태평양 공해상에서 마약 수송용으로 의심되는 민간인 선박을 폭격하고 있다. 마약 카르텔 우두머리로 낙인찍은 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에겐 “망명과 전쟁 둘 중 하나를 택하라”고 압박하고 있다. 정작 미국에서 마약 사건으로 유죄가 확정된 범죄자는 온두라스 내정 간섭을 위해 사면했다. 이 ‘인지부조화’를 어찌 이해해야 할까?

백악관은 12월5일 누리집에 공개한 트럼프 행정부 2기 국가안보전략(NSS) 보고서에서 “서반구에서 미국의 압도적 우위를 복원하기 위해 오랜 기간 방치했던 먼로 독트린을 다시 집행할 것”이라고 밝혔다. ‘먼로 독트린’은 미국 제5대 대통령 제임스 먼로가 1823년 12월 발표한 외교 노선이다. 겉으론 고립주의를 내세우며 유럽 각국에 중남미 문제에 간섭하지 말 것을 요구했지만, 실제론 아메리카 대륙 전체를 미국 세력권으로 선언한 제국주의적 팽창의 서막이었다. 당시 미국은 혈기 왕성한 신생독립국이었다. 패권을 잃은 제국은 정녕 200년 전으로 돌아가기를 꿈꾸는가?

정인환 기자 [e-mai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