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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신저식 외교적 지혜와 닉슨식 정치적 용기

1971년 키신저가 비밀리에 방중한 뒤 만들어진 ‘닉슨-키신저 모델’
100여 차례 중국 방문해 시 주석 만난 100살의 키신저는 무슨 생각 할까
등록 2023-07-21 23:01 수정 2023-07-23 07:28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오른쪽)이 2023년 7월20일 베이징의 댜오위타이 국빈관에서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을 만나 얘기를 나누고 있다. 연합뉴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오른쪽)이 2023년 7월20일 베이징의 댜오위타이 국빈관에서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을 만나 얘기를 나누고 있다. 연합뉴스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이 중국 베이징을 전격 방문했다. ‘치열한 경쟁 속 치열한 외교’를 내걸고 대중국 관계 개선을 시도하는 조 바이든 행정부에 힘을 싣기 위한 행보로 보인다. 100살 노인의 방문에 중국에선 시진핑 국가주석이 직접 나서 극진히 예우했다. 시 주석은 2023년 7월20일 댜오위타이 국빈관 5호실에서 키신저 전 장관을 만나 이렇게 말했다.

시진핑 주석이 직접 만나 극진한 예우

“키신저 박사님이 이제 막 100살 생일을 지나셨고, 중국 방문 횟수도 이미 100여 차례나 된다. 이 두 가지 ‘100’을 하나로 묶으니, 박사님의 이번 중국 방문이 더욱 특별한 의미를 갖게 된다. (중-미 관계 정상화는) 양국을 이롭게 했을 뿐 아니라, 세계를 변화시켰다. (…) 중-미 관계의 발전을 촉진하고 양국 국민의 우의를 증진하기 위한 (키신저 박사님의) 역사적인 공헌을 잊지 않을 것이다.”

2023년 5월27일 100살 생일을 맞은 키신저 전 장관이 처음 중국 땅을 밟은 것은 52년 전의 일이다. 1971년 7월1일 당시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던 키신저 전 장관은 예고한 아시아 순방길에 나섰다. 미국령 괌을 거쳐 전쟁이 한창이던 베트남의 사이공(현 호찌민)을 돌아, 타이 방콕과 인도 뉴델리를 방문한 그는 7월8일 파키스탄 수도 이슬라마바드에 도착했다. 따라나섰던 취재진 가운데 단 1명만 남을 정도로 “얘기 안 되는” 출장이었다.

야히아 칸 당시 파키스탄 대통령은 키신저 전 장관 일행을 위해 성대한 만찬을 준비했다. 하지만 숨 가쁜 순방 일정으로 피로가 쌓인 키신저 전 장관이 돌연 복통을 호소했다. 칸 대통령은 이슬라마바드 외곽 해발 2천m가 넘는 고지대에 자리한 자신의 별장을 내주고 휴식하도록 했다. 작전명 ‘마르코 폴로’, 미 국무부도 중앙정보국(CIA)도 몰랐던 키신저 전 장관의 비밀 방중은 그렇게 시작됐다. 앞서 칸 대통령은 1970년 10월 중국을 방문해 리처드 닉슨 당시 미국 대통령의 특사로 키신저 전 장관이 방중할 뜻이 있음을 중국 쪽에 전달한 바 있다.

1971년 7월9일 새벽 4시께, 키신저 전 장관은 이슬라마바드의 차클라라 공군기지 활주로에 대기 중이던 칸 대통령의 전용기에 몸을 실었다. 장원진 외교부 유럽-북미국장 등 중국 외교관 4명이 영접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 전용기는 6시간여의 비행 끝에 베이징에 도착했다. 중국 혁명 원로이자 마오쩌둥 주석에 이어 군 서열 2위인 예젠잉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이 키신저 전 장관 일행을 맞이했다.

이날 오후 4시35분부터 밤 11시20분까지 키신저 전 장관은 댜오위타이 국빈관 5호실에서 중국 외교를 총괄하는 저우언라이 당시 국무원 총리와 만찬을 겸한 마라톤 협의에 나섰다. 1971년 7월29일 윈스턴 로드 당시 백악관 국가안보실 선임행정관이 작성한 48쪽 분량의 ‘1급 기밀’(2002년 2월 기밀 해제)로 분류된 보고서에는 당시 두 사람이 나눈 대화 전문이 담겨 있다.

`하나의 중국’에 합의해 미-중 수교 길 터

“오늘 오후 특별한 뉴스가 있더라. 당신이 실종됐다던데….” 저우 총리는 농담으로 말문을 열며 키신저 전 장관 일행에게 담배를 권했다. 중국 쪽에선 예젠잉 부주석과 함께 개혁·개방 초기에 외교부장을 지내게 될 황화 당시 주캐나다대사 등이 배석했다. <중국의 붉은 별>을 쓴 에드거 스노가 1970년 12월 마오쩌둥 주석을 인터뷰한 내용을 소재로 대화를 시작한 두 사람은 키신저 전 장관의 머리발언으로 본격적인 협의에 들어갔다.

키신저 전 장관은 머리발언에서 “평등과 상호존중에 기반한 관계”란 표현을 세 차례 반복해 사용했다. 또 자신이 닉슨 대통령의 특사로 재량권이 있으며, 닉슨 대통령의 방중을 준비하는 것이 협상의 목적이란 점도 분명히 했다. 저우 총리는 미-중이 공식 접촉을 시작한 “1955년 8월1일 이후 모두 136차례 협상이 진행됐지만 아무런 결과를 내지 못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어 이렇게 말했다.

“대사급 접촉을 할 때마다 미국 쪽은 ‘한번에 작은 문제를 하나씩 풀어내다보면, 점차 입장 차를 좁힐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 쪽은 ‘먼저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야 여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양쪽 입장은 항상 엇갈렸다.”

저우 총리가 말한 ‘근본 문제’는 대만 문제다. 이날 협상에서도 인도차이나(베트남)와 소련, 일본, 남아시아 각국 등에 대한 논의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대만 문제에 협상 시간의 절반가량이 할애됐다. 키신저 전 장관은 “대만의 정치적 미래와 관련해 미국은 ‘두 개의 중국’ 해법이나 ‘하나의 중국, 하나의 대만’ 해법 모두 찬성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이른바 ‘대만 독립 운동’에 대해 저우 총리가 묻자, “지지하지 않을 것”이라고 답했다.

두 사람이 이날 나눈 대화는 이듬해인 1972년 2월 닉슨 대통령의 역사적인 중국 방문이 성사됐을 때, “미국은 대만해협 양쪽에 있는 모든 중국인이 ‘중국은 하나밖에 없으며 대만은 중국의 일부’라고 주장하고 있음을 안다. 미국은 이런 입장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이란 내용이 담긴 공동성명을 발표한다. ‘하나의 중국’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중국이 `서구적 민주화’ 하리란 기대는 무너져

당시 미국은 소련과의 대결에 집중하기 위해 베트남에서 철군을 준비 중이었다. 중국은 소련과 국경분쟁을 겪은 직후였다. 양쪽의 이해관계가 맞닿아 있었다. 닉슨 행정부는 중국이 개혁·개방으로 경제발전을 이루면 서구식 민주주의를 받아들일 것으로 낙관했다. 역사는 미국이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았다. ‘닉슨-키신저 모델’은 폐기됐다. 52년 전 저우 총리를 만난 바로 그 방에서 시 주석을 마주한 키신저 전 장관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중국 외교의 사령탑 격인 왕이 중국공산당 외교담당 중앙정치국 위원은 7월19일 키신저 전 장관을 만났을 때 ‘선언’이라도 하듯 이렇게 말했다.

“중국의 발전은 강력한 내생적 동력과 필연적인 역사적 논리를 갖고 있다. 중국을 개조하려는 시도는 불가능하며, 중국을 포위하고 중국의 발전을 억제하려는 것은 더욱 불가능하다. 미국의 대중국 정책은 키신저식 외교적 지혜와 닉슨식 정치적 용기가 필요하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양자관계 미-중 관계를 들여다보는 칼럼입니다. 별은 미국 성조기의 별과 중국 오성홍기의 별을 의미합니다. 부정기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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