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전쟁은 사회주의권 해체 이후 최대의 지정학적 사건이라는 평가처럼 향후 국제질서를 기로에 올려놓았다.
미국 등 서방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좌시한다면 기존 ‘규칙 기반 국제질서’가 와해될 것이라며, 그 수호를 위해 우크라이나 전쟁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있다. 규칙 기반 국제질서란 미국 주도의 자유주의적 국제질서에 기초한 일극체제이다. 반면 러시아와 중국은 우크라이나 전쟁을 2007년 이후 자국이 추구하는 새 질서인 다극체제로 가는 입구로 활용하고 있다. 그들이 추구하는 다극체제란 미국의 패권에 기대고 보장하는 일극체제를 해체해, 국제질서 운용에서 자국이 포함된 다자가 대등한 지분을 갖는 체제를 의미한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우크라이나 지원과 대러시아 제재를 고리로 서방 진영의 전례 없는 단결을 초래했다. 반면 중국과 러시아의 연대가 강화되고 있다. 대러시아 제재에 동참하지 않고 양 진영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려는 ‘글로벌 사우스’(주로 남반구에 있는 개발도상국)도 국제무대에서 존재감을 확대해, 양쪽의 국제질서 다툼에 큰 변수가 되고 있다.
2023년 3월20~23일 러시아를 방문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정상회담은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강화되는 미국 주도의 서방 동맹에 맞서려는 양국의 결속과 연대를 상징했다. 두 정상은 공동성명에서 “러시아와 중국의 관계는 냉전 때 형성된 것과 유사한 군사·정치 동맹을 구성하지는 않으나, 이런 형태의 국가 협력보다 우월하다”고 천명했다. 또 두 정상은 이 관계에 대해 “블록을 형성하지 않고, 대결적 성격을 갖지 않고, 제3국을 겨냥하지 않는다”면서도 미국이 국제안보를 “침해”한다고 비난했다. 중-러 관계가 형식적으로는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 같은 군사동맹은 아님을 강조하면서도 내용적으로는 그 이상임을 과시한 것이다. 실제 두 정상은 이번 회담에서 전략적·경제적 협력에 관한 2개의 전반적 성명 외에 삼림·극동과 북극해 개발 등 전방위적 분야에서 모두 14개의 성명과 협정, 의정서를 체결했다.
이번 중-러 정상회담은 미국의 중국 압박으로 추동된 측면이 커서, 양국 연대의 반미 성격이 더욱 짙어지고 있다. 중-러는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직전인 2022년 2월4일 중국을 방문한 푸틴과 시진핑의 회담 때 양국의 “제한 없는” 우의를 천명했다. 하지만 중국은 우크라이나 전쟁이 일어나자, 러시아의 입장을 이해한다면서도 신중한 행보를 했다. 그해 말에는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부 장관의 중국 방문을 합의하는 등 미국과의 관계 개선도 시도했다. 하지만 2023년 2월 초 터진 중국 기구(풍선)의 미국 영공 침범 사건은 미-중 관계를 다시 냉각시켰다. 미국은 중국의 정찰 비행이라고 몰아붙였고, 블링컨의 방중도 취소했다.
기구 사건은 중국에 미국과의 관계 개선 의지를 불식하고, 러시아와의 연대로 중국을 내몰았다. 곧 외교사령탑 왕이 당 정치국원이 러시아를 방문해 2월22일 푸틴을 만난 뒤 시진핑의 러시아 방문을 확정했다.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시진핑의 첫 러시아 방문이다.
시진핑의 러시아 방문에 앞서 중국은 3월10일 베이징에서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의 국교 회복을 중재했다. 중동에서 미국의 최대 동맹국이지만 관계 조정 움직임을 보이는 사우디아라비아, 숙적인 미국과 핵협상 복원을 줄다리기하는 이란이 미국 주도의 국제질서에 도전하는 최대 국가인 중국에서 중국의 중재로 국교를 회복한 사건은 국제무대에서 중국의 위상을 보여줬다. 이 사건은 동서 양 진영에서 균형을 찾으려는 글로벌 사우스에 전통적 친미 국가들도 가세하고 있음을 드러냈다.
중국은 시진핑이 러시아 방문 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과 통화해, 우크라이나 전쟁을 종식하는 평화협상을 중재하겠다고 밝혔다. 앞서 중국은 우크라이나 전쟁 1주년인 2월24일 △주권 존중 △전쟁 중단 △평화협상 개시 △일방적 제재 중단 등의 내용이 담긴 12개 항목으로 구성된 ‘우크라이나 위기의 정치적 해결에 관한 중국의 입장’을 발표했다. 서방국가들은 이 중재안이 러시아 입장만 편드는 것이라고 부정적 입장을 밝힌 데 비해, 젤렌스키 대통령은 “몇 가지 동의할 수 없는 지점이 있다”며 완전히 부정하지 않는 미묘한 입장을 내비쳤다.
애초 미국은 블링컨의 방중 등을 통해 중국을 달래서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중국과 러시아의 관계를 벌리려 했다. 하지만 기구 사건으로 중국과의 관계가 악화된데다, 중국이 사우디-이란 관계를 중재하고 우크라이나 전쟁에서도 영향력을 행사하려 하자 곤혹스러운 처지가 됐다.
블링컨 장관은 시진핑 주석이 모스크바에 도착한 3월20일 “전쟁을 끝내기 위한 계획의 핵심 요소는 우크라이나의 영토와 주권을 유지하는 것이고, 이를 우선시하지 않는 계획은 기껏해야 전술적 지연이거나 건설적이지 않은 부당한 결과를 조장하려는 시도일 뿐”이라고 중국이 주장하는 즉각적인 정전 제안을 비판했다. 그는 또 시진핑이 국제형사재판소(ICC)가 푸틴에게 전쟁범죄 혐의로 체포영장을 발부한 직후 푸틴을 만나는 것은 “중국이 러시아의 중대범죄에 외교적 은닉을 제공”하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존 커비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전략소통조정관은 “러시아군을 우크라이나 영토에 남겨두는 휴전 요구에 대해 우려한다”며 “시 주석이 푸틴 대통령에게 우크라이나 주권과 영토를 존중해야 할 필요성에 대해 직접 압박하길 권한다”고 말했다.
미국의 이런 입장으로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중국의 중재는 사실상 원천봉쇄됐다. 하지만 미국의 이런 입장은 양국 정상회담의 반미 성격을 더욱 짙게 했다. 푸틴은 회담 뒤 기자회견에서 “중국이 제출한 평화계획이 평화적 해결의 토대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면서도 “아직 그들(서방·우크라이나)은 그런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두 나라는 ‘중-러 신시대 전면적 전략 동반자 관계 심화에 관한 공동성명’에서 “나토가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평화와 안정을 저해”하고, “미국은 냉전적 사고방식으로 인도·태평양 전략을 추진해 지역 평화와 안정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했다. 또 “세계의 다극화, 경제 글로벌화, 국제관계의 민주화를 촉진”하고 “패권주의, 일방주의, 보호주의가 국제법의 원칙과 규범을 대체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고 합의했다.
중-러 정상회담은 이 성명처럼 국제질서의 다극화를 지향하는 반미 중-러 연대의 완성이라고 볼 수 있다. 미·중·러는 전후 세계의 지정학을 규정하는 세 축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항미 소-중 블록은 중-소 갈등을 파고든 미국에 의해 와해됐다. 이는 반소 미-중 협력으로 바뀌어, 소련이 몰락하는 데 결정적 요인이 됐다. 소련 몰락 뒤 대미 중-러 협력 체제로 바뀌었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는 세 나라의 관계를 다시 격변시켰다. 금융위기에서 비켜난 중국은 미국의 패권에 도전하는 국가로 급부상했다. 미국은 중국을 도전자로 규정하고는 아시아·태평양 지역으로의 귀환, 즉 아시아로의 회귀(Pivot to Asia)로 전략 대변화를 채택했다. 이는 곧 중국을 봉쇄하는 인도·태평양 전략으로 구체화됐다.
2008년에 일어난 러시아의 조지아 전쟁은 중-러 관계를 대미 중-러 협력 체제에서 반미 중-러 연대로 격상하는 계기가 됐다. 이 전쟁은 열강의 지정학 게임을 귀환시켰다는 평가를 받았고, 세 나라는 본격적으로 지정학적 대결에 들어갔다. 러시아를 겨냥한 미국의 나토 확장은 우크라이나까지 미쳐, 러시아는 2014년 크림(크름)반도 합병으로 응수했다. 이는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가는 서곡이었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하면서, 미국이 주도한 대러시아 제재에 불참하는 친미 국가들이 등장해 글로벌 사우스가 확대됨으로써, 중-러에는 반미 중-러 연대가 지향하는 다극체제 가능성을 키우게 됐다. 대러시아 제재에 동참하는 국가는 유럽의 나토 회원국과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미국 군사동맹국 등 37개국에 불과했다. 이들 국가가 세계 경제력의 5분의 3을 차지해 막강하기는 하나, 제재는 러시아 경제를 마비시키지 못했다.
인도, 튀르키예, 남아프리카공화국, 브라질, 아랍에미리트 등 미들파워 국가들이 러시아와의 교류로 미국 주도의 국제질서에 균열을 내고 있다. 인도는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러시아와의 교역이 400%나 늘었다. 러시아에서 싼 석유 등 에너지를 수입해 자국의 물가 오름세를 막는 데 큰 효과를 봤다. 인도는 자국 화물선을 동원해 러시아 석유를 수송함으로써, 서방의 러시아 에너지 제재를 무력화했다. 튀르키예는 러시아와의 화물 수송이 세 배로 늘었다. 브라질은 러시아 비료를 수입하며 교역량이 늘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침공 직후 제재로 한 달 수입량이 100억달러로 급락했으나, 글로벌 사우스와의 교역으로 2022년 말에는 200억달러로 회복됐다.
2023년 들어 중동과 아프리카 국가 9개국은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교부 장관의 순방을 받으며, 서방과의 관계에서 줄타기 행보를 강화했다. 특히 아프리카의 맹주 남아공의 행보는 미국의 우려를 자극한다. 남아공은 우크라이나 전쟁 1주년인 2월24일 중-러와 함께 인도양에서 연합군사훈련을 했다.
미국에 더 큰 문제는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한 중국의 영향력과 독립성 증가다. 중국의 러시아 에너지 수입은 2021년 528억달러에서 2022년 813억달러로 늘었다. 미국이 러시아를 달러 결제망에서 배제하자, 중-러는 에너지 교역에서 위안-루블화 결제시스템을 도입해 오히려 달러 패권에 구멍을 내고 있다. 중국은 러시아에서 에너지 등 자원과 첨단군사 기술을 수입하고, 러시아에 생필품·반도체·전자제품 등을 수출하면서 서방에서 독립된 경제블록을 형성하고 있다.
중-러를 주축으로 인도·브라질·남아공이 참여한 비서방 경제블록인 브릭스(BRICs)는 2023년 안으로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의 가입을 결정할 예정이다. 미국의 전략가이던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전 국가안보보좌관은 저서 <거대한 체스판>에서 미국에 “잠재적으로 가장 위험한 시나리오는 중국과 러시아, 그리고 아마도 이란이 합세한 거대한 동맹이다”라며 이 동맹을 ‘반패권 동맹’으로 명명했다. 미국이 러시아를 제압하려는 우크라이나 전쟁이 이 반패권 동맹을 부추기는 현실에 미국은 봉착하고 있다.
다극화는 미국과 패권 다툼을 벌이기 위한 중-러 진영의 담론이다. 권위주의체제와 정권들이 추구하는 다극체제가 바람직한 국제질서가 되리라는 보장은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미국 주도의 국제질서가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최대의 도전을 받고 있다는 현실이다.
정의길 <한겨레> 선임기자 Egil@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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