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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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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한국식 ‘동결된 전쟁’의 길 걸을까

④우크라이나 ‘종전’ 시나리오 - 협상만이 해결책
서방, 남북한처럼 안전보장하고 끝내는 셈법도 고려…양국은 교착상태
등록 2023-02-20 07:26 수정 2023-04-20 11:50
2023년 2월 한 여성이 러시아의 미사일 공격으로 폐허가 된 아파트를 바라보고 있다. REUTERS/연합뉴스

2023년 2월 한 여성이 러시아의 미사일 공격으로 폐허가 된 아파트를 바라보고 있다. REUTERS/연합뉴스

우크라이나 전쟁이 일어난 지 2023년 2월24일로 1년이 되지만, 종전의 가능성은 가시화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1년을 맞아 러시아의 대공세가 임박한 정황이다. 하지만 전쟁에 대한 피로증이 짙어지면서 협상을 둘러싼 소문이 없지는 않다.

현재로서는 협상에 대한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자세는 명확하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의 점령지 철수가 전제라고 못박고, 러시아는 점령지 인정을 하지 않는 한 협상은 무의미하다고 말한다.

‘크름반도’는 러시아로? 미-러 막후 협상설

세르게이 베르시닌 러시아 외무부 차관이 2월11일 국영 <즈베즈다> 텔레비전과의 회견에서 “우리는 회담할 준비가 돼 있다”면서도 “전제 조건이 없는 회담인 경우에만, 기존의 현실에 기초한 회담인 경우에만 가능하다”고 말한 데서 잘 드러난다. 이에 대해 개전 초기 평화협상 대표이던 미하일로 포돌랴크 우크라이나 대통령 보좌관은 이날 자신의 트위터에 “크렘린(러시아 대통령궁)은 주기적인 ‘평화와 대화’의 미사여구로서 우크라이나 영토를 떠나기를 거부하고, 범죄에 대해 책임지지도 않는다. 이는 대화가 소용없다는 또 다른 증거다. 승리가 아니라면, 유럽에서 전쟁은 끝날 수 없고 세계는 범죄적으로 지배될 것이다”라고 밝혔다.

이는 협상에 관한 양쪽 당국자의 최신 언급이지만, 외교가에선 막후 접촉설도 떠돌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스위스 유력 언론 <노이에 취르허 차이퉁>(NZZ)의 우크라이나 영토 할양을 둔 ‘미-러 막후협상설’ 보도다.

이 신문은 2월2일 윌리엄 번스 미국 중앙정보국장이 조 바이든 대통령을 대신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게 우크라이나 영토의 20%를 할양하는 조건으로 우크라이나 전쟁을 끝내는 평화계획을 제안했다고 보도했다. 번스 국장은 1월 중순 우크라이나 키이우를 비밀 방문한 것으로 드러났는데, 그는 이때 러시아 모스크바까지 방문해 이런 제안을 했다고 신문은 전했다.

‘우크라이나 영토의 20%’는 현재 러시아가 점령한 영토에 해당한다. 우크라이나 쪽은 “영토를 분단시킬 수 없기 때문에” 이 제안을 일축했고, 러시아 관리들도 러시아가 “어쨌든 장기적으로 전쟁에 이길 것”이라고 주장하며 제안을 거부했다는 것이다. 이 제안이 거부되면서 조 바이든 미 행정부는 우크라이나가 요구하던 에이브럼스 탱크 등 공격형 전차 지원을 승인하고 장기전을 준비하고 있다고 신문은 전했다.

이 보도의 소식통인 독일 정치인 중 한 명은 미국이 장기적 소모전을 준비하는 것이 점점 확실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독일이 그런 전쟁에서 경제적·금전적·군사적으로 고통받을 우려를 제기했다. 이 보도는 백악관 등 미국 당국자들이 즉각 부인했고, 신문은 기사를 온라인에서 내려버렸다.

앞서 외교가에서는 미국과 러시아 사이의 협상설이 나돌았다. 이와 관련해 우크라이나 종전 이후 구상에 관한 <워싱턴포스트> 칼럼니스트 데이비드 이그네이셔스의 1월24일 칼럼인 ‘블링컨,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질서 숙고’가 관심을 끌었다.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은 1월23일 국무부에서 칼럼 필자인 이그네이셔스와 한 회견에서 우크라이나 종전과 전후 억제력에 대한 자신의 전략 개요를 설명했다.

블링컨 장관은 △바이든 대통령이 러시아와의 직접 대결을 피하려 하고 △전쟁 이후 우크라이나에 대한 안보 보장은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 가입에 의한 나토의 집단방위 의무가 아니라 국방력 강화를 통하고 △어떤 형태로든 러시아에 크름(크림)반도의 실질적 영유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고 구상한다고 전했다. 이런 입장은 그동안 워싱턴이 표방한 공식 입장에서 상당히 바뀐 것이다. 미국은 그동안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은 나토가 결정할 문제이고, 크름반도는 우크라이나의 영토라고 공식 입장을 유지해왔다.

크름반도를 연결하는 육로도 러시아 영토로 인정할 수 있다는 민감한 대목도 나왔다. “크름반도를 군사력으로 회복하는 건 불가능하리라는 견해가 워싱턴과 키이우에 광범하다. 2023년 크름반도와 러시아를 잇는 육교인 자포리자주에 대한 우크라이나의 어떤 공격도 러시아의 통제를 위협할 수 있었다. 그러나 크름반도를 장악하려는 전면적인 우크라이나의 작전은 비현실적이라고 미국과 우크라이나의 많은 관리가 믿고 있다. 이는 크름반도 공격이 핵전쟁으로 치달을 인계선이 되리라고 푸틴이 시사했기 때문이다.”

<워싱턴포스트>는 “단기적으로 키이우에 중요한 건 크름반도 지역이 우크라이나에 대한 공격 기지로 기능하지 않게 하는 것”이라며 그 해법의 하나로 “비무장 지위”가 우크라이나 행정부 내에서 논의됐다고 전했다. 외교가에선 블링컨 장관의 이런 구상이 미-러 막후협상에서 논의됐거나, 향후 미국의 종전안 틀거지라고 거론됐다.

휴전, 중립국, 러시아 철군 등의 가능성

유사한 종전안은 우크라이나 쪽에서도 나왔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전략소통보좌관을 지낸 올렉시 아레스토비치는 2월6일 현지 매체 <스타라나>와의 인터뷰에서 우크라이나를 남북한 분단 형식으로 종전하는 방안을 서방국가들이 택할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고 <타스> 통신이 2월7일 보도했다. 그는 “상황을 반전시키고 점령지를 수복하면서 승리하려면 나토의 무기로 무장한 약 40만 명의 잘 훈련된 군인이 필요하지만 우리한테 그것이 없고 가까운 시일에 마련될 수도 없다”며 “서방에서도 같은 생각이고, 우리는 서방에 완전히 의존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서방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남북한식 시나리오다. 안전보장을 받은 ‘한국’(한국식 우크라이나)을 세우는 것”이라면서 “그렇게 하면 우크라이나가 적잖은 보너스를 얻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우크라이나 정보장교 출신인 아레스토비치는 돈바스 내전 뒤 평화협상 대표로 일하는 등 우크라이나의 전략통으로 활약했다. 그는 1월 드니프로의 주거용 건물 폭격 사건과 관련해 우크라이나 당국과는 다른 설명을 해서, 압력에 의해 물러났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러시아 미사일이 주거용 건물을 공격해 수십 명이 숨졌다고 발표했지만, 그는 우크라이나 방공 미사일이 먼저 그 건물을 타격했다고 주장했다. 사임하기 전까지 매일 전황을 브리핑하는 책임을 맡아오고 협상에도 참여한 아레스토비치는 최근 우크라이나 상황에 정통한 인물로 꼽힌다. 이에 앞서, 올렉시 다닐로우 국가안보국방위원회 서기도 키이우 쪽이 38선 같은 한국식 해법안을 제안받았을 수 있다며 이를 거부한다고 말했다.

러시아 쪽도 한국식 분단안에 반응했다. 러시아의 2인자라 할 수 있는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국가안보회의 부의장은 2월7일 자신의 텔레그램 메시지에서 “‘한국식 시나리오’는 단지 (서방의) 희망사항인 것이 명백하다”면서도 “이는 사실 현장에서 전개되는 현실을 인정하는 첫걸음이다”라고 말했다.

이런 방안은 개전 초기 열린 평화회담에서 어느 정도 타협됐던 내용이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2022년 개전한 지 나흘 만인 2월28일부터 벨라루스 접경 지역에서 협상을 시작해, 튀르키예 이스탄불로 장소를 옮겨가며 3월29일까지 5차 대면협상을 하고는 4월 초까지는 화면협상을 했다.

벨라루스, 이스라엘, 튀르키예 등의 중재로 이뤄진 이 협상에서 양쪽은 15개 조항의 잠정 평화안 초안에 의견이 접근했다. 이 초안은 휴전, 우크라이나가 중립국 지위를 선언하고 무장력 제한을 수용하는 조건으로 러시아 철군 등을 담았다. 안전보장과 관련해서는 우크라이나가 나토 가입을 포기하고 미국·영국·튀르키예 등의 보호를 받는 대신, 외국군 기지와 무기를 배치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는 것이다. 양쪽은 이 15개 조항의 평화 초안을 놓고 이스탄불에서 본격적으로 협상했으나, 점령지 문제에 대한 이견으로 결국 결렬됐다.

2022년 3월29일(현지시각) 터키 이스탄불 돌마바흐체 궁전에서 열린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대표단의 5차 평화협상 모습.TASS 연합뉴스

2022년 3월29일(현지시각) 터키 이스탄불 돌마바흐체 궁전에서 열린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대표단의 5차 평화협상 모습.TASS 연합뉴스

푸틴의 영토 야욕, 다시 불투명해진 협상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교장관은 5차 대면협상 뒤인 2022년 4월7일 우크라이나가 기존 합의에서 후퇴한 안을 제시했다고 주장했다. 기존 합의에는 러시아와 주요 서방국들이 제공하기로 한 우크라이나의 안전보장이 크름반도에는 적용되지 않을 것이라고 명시됐는데, 우크라이나가 이 부분을 제외한 새로운 초안을 제시했다는 것이다. 라브로프 장관은 또 우크라이나가 주권을 유보하기로 합의한 크름반도와 분리독립을 선포한 돈바스 지역에 대해 “효율적 통제”라는 모호한 표현이 들어갔고, 양국 대통령의 회담 의제로 올린다는 구상이 들어갔다고 주장했다.

협상 교착 상태에서 러시아의 키이우 공세 중에 벌어진 ‘부차 학살’이 폭로되면서, 젤렌스키 대통령은 협상 불가를 선언했다. 이스탄불 협상이 깨진 것은 점령지 문제에 대한 이견도 있지만, 푸틴에 대한 서방의 거부, 러시아군의 키이우 철수 등 당시 우크라이나에 유리해진 전황 등도 작용했다. 보리스 존슨 당시 영국 총리는 4월9일 키이우를 전격 방문해 “푸틴을 협상할 상대가 아닌 압력을 받아야 할 전범”이라고 비난했다. 사흘 뒤 푸틴은 우크라이나와의 대화는 “막다른 길에 접어들었다”고 협상 파기를 선언했다.

미국의 피오나 힐 브루킹스연구소 연구원과 앤절라 스텐트 조지타운대학 교수가 2022년 9월 <포린어페어스>에 쓴 ‘푸틴이 원하는 세계’를 보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러시아군의 침공 이전 수준으로 철수와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 포기를 뼈대로 한 “협상된 임시 합의안의 개요에 잠정적으로 합의한 것 같았다”는 미국 관리들의 말을 전했다. 이와 관련해 라브로프 러시아 외교장관은 7월 러시아 언론과의 회견에서 이 타협안은 더 이상 선택지가 아니라며 돈바스만으로도 충분하지 않고 “지형이 변했다”고 말했다.

필자들은 러시아의 영토 야욕이 타협안을 깼다고 지적한다. 확실한 것은 당시 양쪽은 상당한 수준의 합의까지 접근했다는 사실이다. 당시 합의는 현재 전해지는 블링컨 장관의 종전 구상이나 우크라이나 쪽에서도 거론되는 한국식 분단안에 포함되는 핵심이기도 하다.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 포기 등 중립화와 안전보장, 크름반도와 돈바스 지역을 둔 러시아의 통제와 새로운 지위 논의는 양쪽 협상의 최대공약수라는 것이다.

종결이냐 동결이냐

우크라이나와 서방은 2022년 2월24일 침공 이후 러시아의 점령을 인정 못하겠다는 입장이고, 러시아는 그 지역에 대한 우크라이나의 주권을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 전쟁이 마크 밀리 미군 합참의장의 의견처럼 군사적으로 완승해서 끝낼 수 없다는 것이다. 협상은 결국 현실을 인정하는 선에서 출발한다. 그렇다면 양쪽이 모두 인정하는 현실은 향후 전황에 의해 조성될 수밖에 없다. 지금 시작되는 러시아의 대공세가 우크라이나의 전력을 고갈하고 점령지를 확대하거나, 혹은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의 공세를 버텨내고 서방의 지원이 다시 위력을 발휘해 러시아 점령지를 침공 이전 수준으로 되돌릴 수도 있다.

양쪽이 조기에 현실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이 전쟁은 장기전을 거쳐 종국에는 ‘동결된 전쟁’으로 끝날 것이다. 그 동결된 전쟁의 결과는 사실상 우크라이나의 분단이고, 최악의 경우 정전 합의가 없는 불안한 분쟁 상태의 지속이다.

정의길 <한겨레> 선임기자 E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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