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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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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미얀마, ‘휴먼시큐리티’가 절실해

33년간 타이·미얀마 국경지대에서 전쟁 이재민 돌봐온,
‘2022 광주인권상’ 수상자 신티아 마웅 인터뷰
등록 2022-05-29 23:49 수정 2022-05-30 11:35
미얀마-타이 국경지대의 미얀마 이재민 의료시설 매따오클리닉의 설립자 신티아 마웅(가운데)이 신생아와 산모를 돌보고 있다. 매따오클리닉 제공

미얀마-타이 국경지대의 미얀마 이재민 의료시설 매따오클리닉의 설립자 신티아 마웅(가운데)이 신생아와 산모를 돌보고 있다. 매따오클리닉 제공

5·18 광주민주화운동 42주년을 맞은 2022년 5월18일, 미얀마의 전쟁 이재민을 돌봐온 의사 신티아 마웅(63)이 광주를 찾았다. 그는 5·18기념재단이 수여하는 ‘2022 광주인권상’(상금 5만달러)을 받았다. 마웅은 미얀마와 접경한 타이 매솟에서 33년째 매따오클리닉을 운영하며 환자를 돌보고 전쟁 난민의 구호 활동을 펼치고 있다. 광주인권상 시상식을 마치고 서울에 머무는 마웅을 5월20일 만났다.

신티아 마웅은 “한국 시민이 미얀마의 민주화운동에 보여준 관심과 지지는 민주주의와 인권의 가치를 확인하고 연대의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고 말했다. 그는 다민족국가인 미얀마에서 버마족(68%)과 샨족(9%)에 이어 세 번째로 인구가 많은 카렌족(7%) 출신이다. 양곤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카렌주의 한 마을에서 개인병원 의사로 환자를 돌보던 1988년 여름, 스물아홉 청년의 삶은 극적인 전기를 맞았다. 미얀마 국민이 군부독재에 맞선 대규모 민주화운동인 8888항쟁에 참여하면서다. 시위는 당시 수도인 양곤을 비롯해 미얀마 전역의 주요 도시로 들불처럼 번졌다.

1988년 민주화항쟁 부상자를 치료하러

“저도 병원이 있는 마을에서 20마일(약 32㎞) 떨어진 도시까지 거의 매일 나가 시위에 참여했어요. 엄청나게 많은 시민이 나왔는데 보건의료 종사자도 많았지요. 수많은 학생과 시민이 체포됐고, 군인들의 폭력과 살해, 시민 실종 소식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군부 지도자는 텔레비전 방송에 나와 ‘시위에 참여하는 자는 가만두지 않겠다’고 위협했습니다.”

군대의 무차별 폭력으로 사상자와 실향 이재민이 급증했다. “시위대 상당수가 폭력을 피해 타이 국경 지역으로 옮겨가 소수민족 무장단체들과 합류했습니다. 저는 어떻게 할지 동료들과 의논한 뒤 타이 쪽으로 넘어가 민주화운동과 부상자 치료를 하기로 했어요.” 그렇게 열흘 밤낮을 정글 지대를 걸어서 자리잡은 곳이 미얀마와 타이의 국경인 모에이강 건너편 타이 도시 매솟의 매따오 지역이다.

1989년 2월, 마웅은 강기슭의 허름한 나무집에 임시의료원을 열었다. 변변한 간판도 없었고 의사면허증이 있는 의료인은 마웅 혼자뿐이었지만 시위에 참여한 의대생들이 힘을 보탰다. 설립 직후엔 피란민뿐 아니라, 군부에 맞서 무장투쟁에 나섰다가 다쳐 긴급 이송된 학생이 많았다. 의료 종사자와 상당수 환자가 학생이었던 까닭에, 언어가 통하지 않는 미얀마인과 타이 현지인 사이에서 이 임시의료원은 한동안 편하게 ‘스튜던츠 클리닉’(학생들의 병원)으로 통했다.

“의료장비와 의약품이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돈도 없었지요. 초창기엔 마을 성당의 신부님이 쌀과 의약품, 병원 운영비까지 많은 도움을 주셨습니다. 동네 슈퍼마켓에 가서 신부님 이름으로 물품을 가져오면 됐어요.” 매따오클리닉의 활동이 알려지자 도움의 손길도 늘었다. “국경없는의사회에서 의료장비와 의약품을 지원했고, 외국에 사는 미얀마 동포들도 현금과 물품을 보냅니다. 1994년부터는 (미얀마의 분쟁 피해 지역에 인도주의적 지원을 하는) 버마릴리프센터의 도움도 받고 있어요.”

120개 병상, 하루 100명의 외래환자

매따오클리닉에서 의사는 마웅 혼자라, 마웅이 온갖 진료를 봤다. 말라리아와 설사 등 풍토병 환자가 가장 많고, 임산부와 어린이 환자도 돌본다. 오랜 분쟁과 무장투쟁 탓에 전쟁 트라우마를 겪는 환자도 많다. 열악한 조건에서 시작했지만 지금은 120개 병상을 갖춘 병원으로 커졌다. 하루에 외래환자 100~150명을 치료하고 입원환자는 80~100명 수준이다. 이렇게 많은 환자를 돌보는 의료인력은 미국 뉴욕에 본부를 둔 국제구제위원회(IRC)와 미얀마 소수민족 무장단체들이 세운 에스닉건강기구(EHO) 등에서 제공하는 의료훈련(6개월~2년) 수료생으로 충족한다.

매따오클리닉은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도 운영한다. 유치원부터 초·중·고 과정이 다 있다. 그렇게 교육받은 아이들이 클리닉에서 일하는 의료인력이 되어 돌아오거나 학교 교사로 커나간다. 2020년까지는 학생들에게 기숙사를 무료로 제공했는데, 코로나19 대유행 이후 온라인수업으로 전환했다.

2021년 2월 미얀마 군부의 쿠데타와 이에 맞선 민주화 진영의 민족통합정부(NUG)의 무장투쟁, 그리고 3년째 접어든 코로나19 대유행은 환자 구성과 생활환경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쿠데타 이후 전쟁 부상자가 늘었어요. 거기에다 팬데믹으로 여행(이동)이 어려워지면서 여성과 어린이 환자가 확연히 줄었습니다. 에이즈 병원균인 HIV(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 보균 환자들은 평생 약을 먹어야 하는데 의약품 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군부 쿠데타 이후 무장투쟁이 전개되면서 병원도 의약품과 의료장비, 의료 소모품 확보가 더욱 절박해졌다. “코로나19 자가진단키트, 말라리아 진단키트, 임신부용 초음파 검사기, 소독약과 붕대, 신생아용 강보는 항상 부족합니다. 또 쌀·소금·콩 같은 식자재도 필요하죠.”

무장항쟁이 길어지는데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세계의 눈길이 우크라이나에 쏠리면서 국제뉴스에서 미얀마 소식도 크게 줄었다. 미얀마 시민이 지치고 희망을 잃어가는 건 아닐까? 마웅은 “여전히 군부 탄압이 심하지만 시민과 공무원, 민족통합정부는 굴복하지 않고 지금도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고 말했다. “많은 젊은이가 소수민족 지역과 국경지대로 옮겨와 군사훈련을 받고 무장투쟁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공부할 기회와 인권, 기본적인 생활까지 박탈당했기 때문이죠.”

인간의 생명과 존엄을 중시하는 안보

마웅은 현재 미얀마에서 가장 시급한 것은 ‘휴먼시큐리티’(인간안보·Human Security)라고 말했다. 휴먼시큐리티는 군사력 위주의 국가안보를 넘어 인간의 생명과 존엄을 중시하는 안보 개념으로, 1994년 유엔개발계획(UNDP)의 인간개발보고서에서 처음 제시됐다. ‘공포로부터의 자유’와 ‘결핍으로부터의 자유’가 핵심이다.

“군부의 공습과 폭격, 시민들에 대한 무차별 공격이 계속되고 많은 젊은이가 체포돼 투옥되거나 목숨을 잃고 있습니다. 많은 여성이 어떤 의료 혜택도 받지 못하고, 아이들은 인신매매 위험에 노출돼 있어요. 국제사회의 관심과 도움이 절실합니다.”

마웅은 기록을 남기는 것도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지금 상황이 아무리 어려워도 모든 것을 다 기록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런 기록을 통해 범죄자에게 국제법으로 반드시 책임을 묻고, 인권침해와 폭력이 처벌받지 않고 되풀이되는 악순환이 끊어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신티아 마웅은 5월30일 방한 일정을 마치고 매따오클리닉의 일상으로 돌아간다.

조일준 선임기자 ilj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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