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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 없이 ‘군인 의회’ 들어서는 것”

상원의원 250명 군정이 임명하는 신헌법안 통과된 타이… 헌법 개정도, 군정 최고 권력기구 해체도 상원 동의 없이 불가
등록 2016-08-24 20:54 수정 2020-05-03 04:28
8월7일 군정이 250명의 상원의원을 임명하고, 이들이 총리 선출권을 갖도록 하는 타이 신헌법안에 대해 찬반을 묻는 국민투표가 치러진 방콕의 한 투표소 풍경. 신헌법안은 유권자 58%가 투표하고 그중 61.35%가 찬성해 통과됐다.

8월7일 군정이 250명의 상원의원을 임명하고, 이들이 총리 선출권을 갖도록 하는 타이 신헌법안에 대해 찬반을 묻는 국민투표가 치러진 방콕의 한 투표소 풍경. 신헌법안은 유권자 58%가 투표하고 그중 61.35%가 찬성해 통과됐다.

8월7일 타이 군정이 기안한 신헌법안을 두고 찬반 국민투표가 있던 날, 방콕의 한 투표소에서 만난 쏨(가명)은 “부패 정치에 변화가 오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대학에서 독일어를 가르치는 그는 군정이 배포한 축약본을 읽고 ‘부패청산헌법’이란 확신이 들었단다. 그는 “12년 무상교육도 긍정적이다. 이제 가난한 집 아이들도 유치원에 갈 수 있게 됐다”고 덧붙였다. 그가 말한 “반부패” “빈곤가정 아이들도 유치원에” 등의 문구는 군정의 헌법 홍보 수사를 많이 닮았다. 쏨은 밝히기를 꺼렸지만 찬성 쪽에 투표했음을 짐작하게 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공공의료 등 후퇴한 20번째 헌법 </font></font>

투표 일주일 전인 7월31일, 방콕 시내 방콕문화예술센터 앞에선 고등학생이 주축이 된 시위대 대여섯 명이 게릴라 퍼포먼스를 벌였다. 이들은 ‘고등학교까지 무상교육’을 요구하는 피켓을 들고 거리에서 신헌법 반대 운동을 벌였다. 신헌법안 제54조는 “12년 무상교육”을 “유치원부터”라고 명시하고 있다. “유치원부터 12년이면 9학년(중학교)까지다. 하지만 (유치원보다) 더 중요한 건 고등학교다. 고등학교 3년 과정을 무상으로 해야한다.” 시위에 참여한 와리사 수쿰못(16)이 말했다. 와리사는 고등학교 2학년이라 투표권이 없다. 그러나 “투표권 있는 사람들에게 이 문제를 꼭 알려야 한다”고 말했다. 세뇌 교육이 강렬한 타이 교육 풍토를 감안하면 유치원 의무교육은 체제 복종적인 시민을 일찌감치 키워보겠다는 의도로 해석된다. 신헌법 교육 관련 조항에 대한 해석만 해도 이렇게 달랐다.

이번 국민투표에 부쳐진 신헌법안은 타이가 1932년 절대왕정에서 입헌군주제로 전환한 뒤 20번째 헌법이다. 입헌군주제 전환 뒤 84년간 크고 작은 쿠데타가 스무 번도 넘게 일어났던 타이는 4년에 한 번꼴로 기존 헌법을 찢고 새로 쓰기를 반복했다.

이번 투표에서 군정은 헌법 내용을 제대로 공유하지 않았고 반대투표 캠페인, 공개토론도 모두 금지했다. 지난 4월 말 통과시킨 ‘국민투표법’ 제61조에 근거해서다. 국민투표법 제61조는 (신헌법안과 관련해) ‘무례하고’(rude) ‘잘못된’(false) 정보를 유포하는 자를 10년형에 처한다고 명시했다. 논란이 많은 헌법안이었지만 국민투표는 이런 환경에서 치러졌다. 유권자 58%가 투표장으로 갔다. 이 중 61.35%가 찬성함으로써 20대 헌법은 통과됐다. 전체 유권자의 30% 정도가 찬성한 셈이다.

신헌법은 의료·종교 관련 조항 등이 전반적으로 크게 후퇴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특히 군정 최고 권력 기구인 국가평화질서회의(NCPO)가 상원의원 250명 전원의 임명권을 갖는다는 내용은 이번 헌법의 비민주성을 가장 노골적으로 보여준다. 군이 임명하는 250명 상원에는 3군 총사령관, 육군참모총장, 경찰총장, 상임국방장관 등 국가안보와 공권력의 수장 6인도 당연직으로 포함된다.

이번 국민투표에는 추가 질문이 있었다. 의회 내 총리를 선출할 때, 군부가 임명한 상원의원들이 투표권을 가져도 좋은가? 여기에 58%가 찬성했다. 이로써 군이 임명한 상원의원 250명은 선거로 선출될 하원의원 500명과 함께 총리를 선출하게 된다. 이는 총선에서 결정된 다수당에서 총리를 배출한다는 민주주의 원칙을 훼손하고 군부가 정치에 개입하겠다는 의도를 명확히 드러내는 것이다. 상원의원 100% 군 임명에 대해 티띠난 퐁티수락 쭐랄롱꼰대학 정치학과 교수는 “의회 안에 군인정당이 선거 없이 들어앉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표현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군정 통치 ‘합헌’ 체제 눈앞에 </font></font>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를 쿠데타로 뒤집고 현 타이 군정 총리 자리에 오른 쁘라윳 짠오차 총리가 자신이 주도한 신헌법안에 투표하기 위해 국민투표장에 나왔다.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를 쿠데타로 뒤집고 현 타이 군정 총리 자리에 오른 쁘라윳 짠오차 총리가 자신이 주도한 신헌법안에 투표하기 위해 국민투표장에 나왔다.

상원의 막강한 권한은 헌법 개정시 비토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잘 나타난다. 신헌법 제256조는 헌법 개정시 의회의 50% 지지를 받아야 하고 이 중 상원의원 3분의 1이 포함돼야 한다고 적어놨다. 헌법 독소조항에 대한 비판이 아무리 거세도 군이 임명한 상원의 동의 없는 헌법 개정은 불가능하다는 얘기다.

군이 지지하는 후보가 ‘총리’로 선출될 가능성도 높아졌다. 총리는 의회 투표에서 50%, 즉 376표를 얻으면 된다. 2007년 헌법은 총리 후보를 선출직인 하원의원으로 제한했으나 이번에는 외부 인사 출마를 허용했다. 군이 지지하는 ‘외부 인사’가 총리 후보로 나설 경우 군이 임명한 상원의원 250명의 표는 보장된 것이나 다름없고 하원의원 500명 중 126표만 얻으면 된다.

정치학자들은 군정 권력 기구인 국가평화질서회의에서 총리 후보가 나올 가능성을 높게 점쳤다. 헌법재판소 재판관 출신 수칫 분봉칸 쭐랄롱꼰대학 교수는 지난 8월3일 열린 타이외신기자클럽 토론회에서 “다음 의회는 (기존 양당 체계를 벗어나) 군소정당으로 채워질 가능성이 높다. 군소정당과 군의 협의체계가 이루어질 것이다”라고 전망했다. 군은 통제하기 수월한 군소정당을 통해 의회 민주주의에 관여할 가능성이 농후하고 총리 선출 과정에서도 군소정당을 활용해 표몰이 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얘기다.

이런 전망은 투표 직후부터 현실화할 조짐을 보였다. 2014년 쿠데타 직후 꾸려진 군정개혁위원회(NRC) 의원을 지낸 파이분 니티타완은 투표 다음날 친군정 정당 출범을 예고했다. 그는 쁘라윳 짠오차 현 군정총리를 “슈퍼 자이언트 스타”라 칭하며 차기 총리감으로 치켜세웠다.

신헌법에는 국가평화질서회의 해체 조항도 없다. 데이비드 스트렉스퍼스 콘깬대 국제교류센터 국장은 지난 2년여 군정하에서 발표된 (긴급)조치들도 유효하게 남을 거라 전망했다. 그는 신헌법에서 총리 탄핵 조항이 삭제된 것에 크게 우려했다. 군 임명 총리가 나올 가능성이 높지만 문제 발생시 총리를 교체할 헌법적 토대는 약화됐기 때문이다. 타이는 이제 군정통치가 합헌화된 체제를 눈앞에 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군정통치의 ‘각’을 잡는 데 심혈을 기울인 신헌법은 공공의료의 근간도 흔들어놨다. 2000년대 초 탁신 정권하에서 시작된 ‘30밧(1달러) 의료’ 정책은 2007년 헌법에서 “공공의료에 모든 국민은 평등하게 접근한다”는 조항으로 굳어졌다. 그러나 신헌법에선 “평등한 접근권”이 사라지고 대신 “가난한 국민은 법에 따라 국가가 제공하는 무상의료를 받는다”(제47조)는 문구로 대체됐다. 이는 2011년 오세훈 전 서울시장이 ‘전면 무상급식’을 “꼭 필요한 아이들에게”만 하자던 논리와 매우 흡사하다. 공공의료의 핵심인 ‘보편성’을 훼손했기 때문이다.

이뿐만 아니라 “불교를 증진하고 보호하자”(제67조), “국가안보를 해치치 않는 범위 안에서”(제31조) 포교 등 종교의 자유도 크게 후퇴했다. 타이 역사상 가장 민주적으로 평가받는 1997년 헌법을 상기해보자. 당시 헌법은 이렇게 적었다. “국가는 신앙의 자유를 해칠 어떠한 조치도 발동하지 않는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토론 없이 치러진 ‘국민투표’의 비민주성 </font></font>
국민투표 일주일 전 방콕 시내에서 고등학생 대여섯 명이 ‘고등학교 무상교육’을 주장하며 신헌법안 반대 투표 캠페인을 벌였다.

국민투표 일주일 전 방콕 시내에서 고등학생 대여섯 명이 ‘고등학교 무상교육’을 주장하며 신헌법안 반대 투표 캠페인을 벌였다.

군정 프로파간다가 말해주지 않았던 비민주적 조항들은 그동안 소수의 활동가들만 체포와 석방을 반복하며 게릴라식으로 알려왔다. 투표 전날인 8월6일 동북부 차이품 지방에서 리플릿을 돌리다 체포된 자투팟 분파타라락사도 ‘신헌법’의 문제점을 알리다가 체포됐다. 반면 쁘라윳 총리 지지와 찬성 투표를 공언하며 하루에도 여러 차례 페이스북 라이브 방송을 하던 수텝 트악수반 전 부총리는 별 탈 없이 표현의 자유를 누려왔다. 수텝은 왕정주의 진영을 포괄하는 이른바 ‘옐로셔츠’ 그룹 내에서도 가장 오른쪽에 선 친군정 극우주의자의 대부 격 인물이다.

이번 투표 결과가 윤곽을 드러내자 반대 투표 캠페인을 주도한 네오민주주의운동(NDM) 그룹과 역시 반대 투표를 공언한 친탁신계 프아타이당과 잉락 친나왓 전 총리는 투표 결과를 받아들이겠다고 말했다. 반면 국민투표 전면 보이콧을 주도한 진영은 쿠데타부터 불법적인 전 과정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이다. 이 운동을 주도해온 노동운동가 찌뜨라 코차데는 반대 투표 진영의 결과 수용에 대해 “실망스럽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프아타이당과 반독재연합전선(UDD·레드셔츠 주류 정파로 친탁신계)이 쿠데타를 진정으로 반대하는지 의구심이 든다”고 비판했다.

반군정 정치권의 지리멸렬과 타협적 태도는 “20년 개혁” 운운하며 사실상 장기 독재의 발판을 다져가는 군정 로드맵에 효과적인 대응마가 되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신헌법 통과 뒤 군정 로드맵이 순탄한 건 결코 아니다. 8월10~12일 방콕 이남 8개 지방에서 벌어진 14건의 연쇄 폭발과 5건의 방화 사건은 현 군정 체제는 말할 것도 없고 (입헌군주) ‘체제’에 대한 도전 신호마저 내포했다.

연쇄 폭발과 방화는 푸껫, 끄라비 등 유명 관광지는 물론 국왕의 궁전이 있는 중부 해변도시 후아힌까지 공격했다. 4명이 사망하고 36명이 부상당했다. 공격이 고조된 시기는 시리낏 왕비의 84번째 생일 전야부터 생일날로 이어지는 8월11~12일이었다. 공격은 국민투표에서 찬성이 80%를 넘어 압도적인 친군정 성향을 보여준 남부를 두루 훑었다.

사용된 폭탄의 종류와 수법은 타이 최남단 3개 주에 거주하는 말레이 무슬림 반군(이하 남부반군)의 전형성을 보였다. 공격 시기와 지역으로만 추리해보면 남부반군일 수도 있고, 반군정 내 특정 세력일 수도 있다. 8월17일 현재 정황과 물증은 남부반군으로 기우는 중이다. 누구의 소행이든 연쇄 폭발은 군정과 체제를 반대하는 진영의 대범한 출발을 예고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새로운 정치 분쟁의 서막 </font></font>

이번 국민투표에서 반대가 우세한 지역은 세 곳이었다. 탁신 정치의 영향력이 큰 북부, 반군정 레드셔츠 강성 지역인 북동부, 그리고 남부반군이 활동하는 남부 3개 주다. 이번 공격이 남부반군의 소행이라면 3개 주 중심으로 펼치던 기존 작전 양상에서 지리적 확장을 시도해 연쇄 공격력을 과시한 것으로 보인다. 가능성은 낮지만 만일 반군정 진영 내 특정 세력의 소행이라면 새로운 정치 분쟁의 서막이 열린 것이다.

방콕(타이)=<font color="#008ABD">글·사진</font> 이유경 국제분쟁 전문기자 Lee@Penseur21.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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