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참사로 한국이 슬픔과 분노에 휩싸여 있을 무렵, 대만인들은 평소와 다른 싸움에 직면했다. 탈핵 활동가들이 서로를 부여잡은 채 밤을 지새웠으며 대규모 집회를 열었고, 이들을 향해 거리에서 물대포를 쏘는 진압경찰과 맞섰다. 이 모든 일은 고귀한 한 생명을 지키기 위한 것과 동시에 마잉주 정부가 ‘4호기 핵발전소’라 불리는 악명 높은 룽먼 핵발전소 건설을 중단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민주진보당(대만 제1야당·이하 민진당)의 전 대표이자 유명한 반핵활동가이기도 한 린이슝(73)은 지난 4월22일 무기한 단식 농성을 시작했다. 그는 집권 여당인 국민당이 사고가 끊이지 않는 4호기 핵발전소를 당장 없애고, 여러 가지 문제로 직접민주주의 정신을 거스르고 있는 현행 국민투표 법안을 수정할 것을 요구했다.
입법원을 막아선 시민들‘국민투표검토위원회’의 발의와 2단계로 나뉜 청원 과정을 거치는 대만의 국민투표 절차는 투표 참여를 독려하기보다는 차단하고 있다. 전국 단위의 유효한 국민투표를 발의하려면, 우선 유권자의 과반수가 무기명 비밀투표에 참여해야 한다. 유권자의 3분의 1이 기준인 한국과 대비된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역설을 마주한다. 2003년 국민투표 법안이 공표된 뒤, 전국에서 발의된 6차례의 국민투표 모두 유권자의 과반수 문턱을 넘는 데 실패했다. 이는 대만인들이 그동안 제대로 된 국민투표 제안을 전혀 못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린이슝 전 대표의 단식 소식이 알려지면서, 이념적 성향과 세대 구분을 떠나 대만 시민사회에서는 불과 6주 전 탈핵 집회(3월8일 후쿠시마 3주기 집회)가 있었지만, 뭔가 행동에 옮겨야 한다는 여론이 더욱 높아졌다. 활동가들과 일부 시민들은 국민투표 개정안을 통과시키기 전에는 그 어떤 입법위원(국회의원)도 떠날 수 없다는 전제를 걸고 대만 타이베이의 입법원(우리나라의 국회의사당) 입구를 막아섰다. 민진당 지도부는 가능한 해법을 찾고자 국민당 고위 관료와 접촉을 시도하느라 분주했다. 대학생들은 수백~수천 개의 노란 리본을 묶은 채 캠퍼스 밖으로 나와 린 전 대표를 응원했다. 100여 개 시민사회단체가 모여 꾸린 전국반핵행동(NNAAP)은 린 전 대표의 단식 5일째가 되던 4월27일, 올해 두 번째 탈핵 집회를 제안했다.
집회 준비가 이뤄지는 동안에도 마잉주 총통과 국민당 정부는 자신들의 입장을 고수했다. 정부는 “4호기 핵발전소 건설이 중단되면, 공기업인 대만전력공사가 큰 금융 손실을 겪고 전기료도 40% 이상 오를 것이다. 또 대만에서 대규모 투자 철회와 금융 파동이 이어질 테고 주식시장은 곤두박질칠 것이다”라는 주장만 반복했다. 그러나 집회 날, 약 5만 명의 참가자들은 바리케이드로 두껍게 가로막힌 총통부 건물 앞에 모여 ‘4호기 핵발전소 반대’와 ‘국민투표 전면 개정’ 요구에 힘을 보탰다. 참가자들은 예정대로 (타이베이에서 가장 혼잡한 거리인) 중샤오 서쪽 도로를 점거하기 위해 타이베이 중앙역으로 향했다. 다음날 아침 교통에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강제 해산하겠다는 경찰의 심각한 경고에도 상관하지 않았다.
나부끼는 1만 개 깃발집회가 열리자 마잉주 총통은 국민당 소속인 모든 시장들과 긴급회의를 열었다. 치안 담당자들에게는 탈핵 집회의 열기가 달아오르는 것에 대응하라고 지시했다. 몇 시간 뒤 국민당 대변인은 “4호기 핵발전소 건설을 일시 중단하며, 재가동 여부는 국민투표 결과에 따라 결정하겠다”고 밝혔다.
집회 참가자의 90%는 국민당이 요구를 받아들였다고 생각하며 거리를 떠났다. 나머지 참가자 약 1천 명은 “린이슝 전 대표의 단식이 계속되고 있고, 국민투표 개정안에 대한 구체적인 그 어떤 약속도 이뤄지지 않았다. 4호기 핵발전소는 여전히 재가동 가능성이 있다”며 떠나기를 거부했다. 그 뒤의 상황은
린이슝 전 대표는 4월30일 단식을 중단했다. NNAAP는 “이번 행동은 제한적이었지만 정부를 압박하는 데 성공적이었으며, 4호기 핵발전소 건설 중단에 대한 첫 대중적 동의를 이끌어냈다”고 평가했다. 4호기 핵발전소 관련 예산의 입법원 통과를 막는 일이 현재 이들에게 남은 과제다. 또 대만의 나머지 핵발전소 3곳의 단계적 폐쇄를 늦추려는 국민당 정부의 시도도 절대 용납하지 않으려 한다. 계획대로 단계적 폐쇄가 이뤄지면, 대만은 2025년 탈핵 국가가 된다.
대만 탈핵운동은 민주화운동이 활발하던 1980년대에 움텄다. 과거 국민당 집권 시절, 4호기 핵발전소는 국가의 주요 사업 가운데 하나가 됐고, 그 뒤 환경운동가들과 정부 집권세력 사이의 대표적인 갈등 쟁점이 됐다. 1980년대 가장 유명했던 구호는 ‘반핵은 곧 반독재’였다. 국민당 인사들과 이들과 오랜 동맹을 맺어온 세력이 주축인 찬핵 진영에 맞서는 탈핵운동의 입장을 완벽하게 대변했다. 그러나 1990년대 말 집권한 민진당은 탈핵운동가들이 기대했던 결과를 이끌어내지 못했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무엇보다 민진당은 4호기 핵발전소 폐쇄에 실패하면서 환경운동 진영에서 오랜 시간 함께해온 조력자들이 사기를 잃고 분노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2011년 일본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는 대만 탈핵운동을 다시 움직이게 했다. 집권당인 국민당 정부에 맞서고자 사람들이 머리를 맞대기 시작했다. 물론 후쿠시마 사고가 미친 영향은 적어도 2년 정도 대만 내 집회를 지켜봐야 알 수 있다. 새로운 탈핵운동은 한국의 386세대와 견줄 수 있는 40대 활동가가 중심이 된 ‘주니어(Junior) 시민단체’를 통해 확산했다. 민진당에 대한 호불호로 구분됐던 기성세대 환경운동가들과 다르게, ‘녹색공민행동’(GCAA) 등의 주니어 시민단체들은 국민당-민진당의 진영 논리를 넘어 창의적인 캠페인으로 새로운 풀뿌리 운동을 심어갔다. GCAA는 100명 이상의 탈핵 강사를 키워냈고, 대만 곳곳에서 순회 강연을 하며 핵발전에 대한 잘못된 정보를 바로잡았다. 이 강연을 들었던 한 카페 주인이 ‘탈핵 깃발’ 아이디어를 제안했고, 짧은 기간 동안 1만 개의 깃발이 주택가와 국숫집, 빵집, 사무실 등에 내걸렸다.
핵 없는 삶으로 전진
지치지 않는 풀뿌리 조직과 연대 활동, 그리고 각종 교육 캠페인의 효과는 핵발전의 단계적 폐지를 지지하는 의견이 대세가 되고 있다는 여론조사 결과를 통해 뒷받침되고 있다. 대만 사회는 지난해 22만 명이라는 최대 인파가 탈핵 집회를 경험했고, 올해에는 국민당 정부로부터 부분적인 타협을 이끌어냈다. 물론 국민당이 약속을 지킬지는 지켜봐야 하지만 말이다. 한 가지 확실한 건, 탈핵 진영도 국민당의 일방적인 약속 파기 상황에 대비해 준비를 할 것이라는 점이다. 핵 없는 삶으로 향하는 행보는 얼마 남지 않았다. 꿈이 아닌 실현 가능한 미래가 되고 있다.
타이베이(대만)=류화젠 국립대만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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